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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시/해제

북행록(北行錄) 해제(解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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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2-21 17:19
조회
1146
청구기호 만송 貴 377

서명 북행록(北行錄)

저자 이해(李瀣)

판사항 고본(稿本)

발생사항 刊寫地未詳, 刊寫者未詳, 刊寫年未詳

형태사항 1책 ; 31.7*20.0cm

1. 개요

이 책은 이해가 1536년(중종 31) 5월 1일부터 5월 24일까지 어사(御史)의 명을 받고 함경도를 다녀온, 24일 동안의 견문과 경험을 기록한 1책의 초서체 행록이다. 지역은 서울을 출발하여 경기도 포천, 강원도 철원 등을 거쳐 어사 임무를 수행한 함경도 일대이다. 함경도 일대의 백성의 생활상, 당시 함경도 지역의 관리와의 교유, 국경 지역의 각 보(堡)와 진(鎭)에 대한 정보, 서울부터 함경도를 왕래하는 경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의 함경도 지역의 어사 수행 임무와 수행 과정의 경험, 함경도 지역의 백성의 생활상 등을 알려주는 점, 그리고 저자의 친필 행록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2. 이해의 생애

이해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이다. 1496년(연산군 2) 예안현 온계리에서 진사 이식(李埴)과 사정(司正) 박치(朴緇)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550년(명종 5) 8월 14일에 5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그의 동생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이우(李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중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중종 28)에 성균관 전적이 되고 사간·정언 등을 역임하였고, 1536년(중종 31)에 함경도 어사로 명을 받아 함경도를 다녀왔다 1541년(중종 36) 홍문관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좌승지·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중종 39) 첨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예조참판을 지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등용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이치(李致)와 함께 탄핵하여,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동지중추부사·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명종 2)에 황해도관찰사, 1550년(명종 5)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少尹)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았고,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보내는 것으로 그쳤지만, 귀양가는 도중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사후 선조 즉위년에 벼슬이 회복되었고, 1691년(숙종 17)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정민(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722년(경종 2) 에 도산서원에서 이해의 문집인 『온계일고(溫溪逸稿)』가 4권 3책으로 간행하였다.

3. 『북행록』의 구성과 내용

『북행록』은 단권으로 저지(楮紙)에 묵서되어 오침안(五針眼)으로 장정된 친필 필사본이며, 분량은 17장이다. 서발문이나 목차 등이 없이 본문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5월 1일 어사로 명을 받은 일부터 5월 24일 서울로 돌아와 복명한 일까지 여정과 견문, 경험이 차례대로 기록되어 있다.

본문 곳곳에 수정, 삭제, 가필 흔적이 있고, 표지 이후 본문 시작 전 페이지에 『북행록』과는 관련없는‘1537년(중종 32) 5월 10일-11일 사이 강원도에 서리가 내려 풀이 죽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북행록에 대해 수정 및 보완하는 과정에 있는 미완성 원고로 보인다. 현재는 본래의 책 위에 후대에 표지를 새로 덧붙여 ‘온계선생북행록(溫溪先生北行錄)’이라는 표제를 새로 붙였다.

본문의 기록은 어사로 명을 받은 5월 1일부터 시작하여 5월 24일까지 적혀 있으나, 매일의 날짜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5월 1일, 2일이 기록되었고, 3일부터 10일까지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다. 11일이 적혀있는 이후, 12일부터 15일은 후에 날짜가 중간에 가필로 적혀있고, 16일부터 24일까지 본문에 날짜가 적혀있다. 수정, 가필의 글씨체는 본문의 글씨체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이해 본인이 초서로 행록을 작성한 이후 직접 수정, 보완하던 원고로 보인다.

이 행록은 1536년(중종 31) 5월 1일 어사로 명을 받은 일부터 5월 24일 서울로 돌아와 복명한 일까지 시간 순으로 기록하여 당시 어사 임무 수행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월 1일 승정원에서 입궐하라는 명을 받고 장악정(掌樂正) 김수성(金遂性), 승문판교(承文判校) 박수량(朴守良), 사복정(司僕正) 김익수(金益壽), 보덕(輔德) 김미(金亹), 사성(司成) 안사언(安士彦), 풍저수(豊儲守) 홍춘경(洪春卿), 응교(應敎) 김광진(金光軫), 군기정(軍器正) 하계선(河繼先)과 함께 입궐하여 계자(啓字)가 찍힌 봉함(封緘)과 편폭(片幅)을 받았다. 하계선(河繼先)을 제외한 8명이 8도의 어사로 임명된 것이니, 홍춘경(洪春卿)이 경기도, 김익수(金益壽)가 충청도, 안사언(安士彦)이 황해도, 박수량(朴守良)이 강원도, 김수성(金遂性)이 경상도, 김흔(金舋)이 전라도, 김광진(金光軫)이 평안도, 그리고 이해가 함경도 어사로 각각 임명되었다. 이해는 가장 먼 함경도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즉시 궐문을 나와 집에 들러 동생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작별하고 급히 출발하였다. 경기도 녹양역(綠楊驛)에 도착하여 수행원 손순량(孫順良)을 만나고, 역관에서 목적지가 적힌 봉투를 열어보니, 고원(高原), 명천(明川), 부령(富寧), 삼수(三水), 훈융(訓戎), 신방구비(神方仇非) 등이 적혀 있었다. 밥을 먹고 즉시 길을 떠나, 계손(季孫)이란 역리(驛吏)의 안내로 험준한 석문령(石門嶺)을 피하여 장수원(長壽院)에서 샛길로 포천(抱川)에 이르니 벌써 날이 새어 5월 2일이 되었다. 잠시 쉬고 영평(永平)의 양문역(梁文驛), 강원도 철원(鐵原)의 풍전역(豊田驛)에서 말을 바꿔 타고 김화현(金化縣)에 이르렀다. 5월 1일과 2일의 기록은 이해가 함경도 어사로 명을 받고, 매우 급하게 서울을 출발하는 과정을 급박하게 서술하였다. 이해는 1531년(중종 26)에 죽산(竹山)에서 낙마(落馬)로 왼쪽 다리를 다친 일이 있었는데, 이틀 동안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주야로 달려온 탓에 다리 통증이 재발하는 고생까지 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온계일고』에 수록된 「연보(年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5월 초1일, 왕명을 받들어 관북을 염찰하였다. 북도는 아주 멀고 험하였고 여름 장마가 한창이었으나, 선생은 나라 일을 느슨히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밤낮으로 달려갔다. 위태로운 곳을 여러 번 지나 두 다리에 부종이 생겼으나 오히려 휴식할 겨를이 없었다. 아주 구석지고 매우 먼 곳까지 백성들의 질고를 탐문하니, 남녀노소 백성들 모두 서로 붙들고 기뻐하며 적폐를 호소하였다. 5월 24일 복명하였다. 행록이 1권 있다.”

이후 고산(高山), 안변(安邊), 영흥(永興), 단주(端州), 마곡(麻谷), 임명(臨溟), 길주(吉州), 명천(明川), 부거(富居), 녹야(鹿野), 건원(乾元), 경원(慶源), 훈융(訓戎), 종성(鍾城), 고령(高嶺), 회령(會寧), 부령(富寧), 수성(輸城), 경성(鏡城), 증산(甑山), 갑산(甲山), 삼수(三水), 신방구비(神方仇非), 함흥(咸興) 등의 함경도 지역을 살펴본 일을 적고 있다. 그 후 귀경길에 올라 22일 남산역(南山驛), 고산역(高山驛), 철령(鐵嶺), 회양부관(淮陽府館)을 거쳐 금성현(金城縣)에서 숙박하고, 23일 김화연(金化縣) 풍전역(豊田驛)과 양문역(梁文驛), 안기역(安奇驛)을 거쳐 포천현(抱川縣) 구화역(仇火驛)에 도착한 후, 24일 입궐하여 복명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사 임무 수행 중에는 보(堡)와 진(鎭)에서 군졸(軍卒) 및 국방 장비를 점검하여 국경의 방비 상태를 확인하였다. 어면보(魚面堡) 지역에서는 문을 지키는 군사가 바로 문을 열어주지 않고 방문한 사람에 대해 엄격히 확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어사의 순행에 엄격한 방비를 보여주기 위해 바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하는 에피소드를 기록하였고, 신방구비(神方仇非) 지역에서는 보(堡)와 보(堡) 사이가 매우 멀다는 점을 기록하여 국경 방비에 대한 걱정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수자리 서는 군인들이 경작하는 농작지도 점검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의 목사(牧使)를 만났고 5월 19일에는 함흥(咸興)에서 함경도 관찰사 신공제(申公濟)의 영접을 받기도 하였다.

이해는 곳곳에서 민생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니, 바닷가에서 남녀가 고기잡는 모습이나 민가에서 남녀가 싸우는 모습, 북쪽 기후와 환경에 따른 북방지역에서의 농사짓는 모습과 농작물이 남쪽과는 다른 모습 등 여정 중 본 백성들의 삶을 생생히 기록하였다. 특히 5월 13일에는 어느 인가에 들어가니 늙은 아낙이 어린 남녀만 데리고 있으며 남자 주인은 군인으로 수자리 살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내용을 기록하여 국경 지역의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 강에서 주로 많이 서식하고 있는 여항어(餘項魚)를 맛있게 먹고 강에서 여항어를 본 것이나 이깔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을 지나며 이 진액을 채취하여 창(瘡)에 바르면 신효(神效)하다는 말을 전해들은 소소한 에피소드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또한, 이해는 문신답게 여정 중에 시를 지은 것도 기록하였다. 5월 10일 임명관(臨溟館)에 도착해서는 그곳에 걸려있는 고금의 시 중에서 안(鞍)자로 압운한 시에 화운하여 지은 시를 적었다. 시는 다음과 같다. “임명에 도착해 안장을 푸니, 망망한 운해가 펼쳐졌구나. 저물녘 비바람 세차게 몰아치더니, 역참의 난간을 모두 적셔놓았네.(到得臨溟解我鞍, 茫茫雲海一邊寬. 晩來急雨顚風過, 濕盡郵亭數曲欄.)”이 시는「차임명판상운(次臨溟板上韻)」이란 제목으로 『온계일고』 권1에도 실려 있다.

4. 『북행록』의 가치

『북행록』은 조선 중기 문신인 이해가 1536년(중종 31) 5월 1일부터 5월 24일까지 어사(御史)의 명을 받고 함경도를 다녀온, 24일 동안의 견문과 경험을 기록한 1책의 행록이다. 이 행록은 저자 친필본, 그리고 문집인 『온계일고』에 수록되지 않은 유일본이다. 저자 본인이 친필로 수정하고 보완한 원고로 후대인들의 산삭과 변개를 거치지 않은 본래의 기록 그대로 보존되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필사본이라는 점에서 서지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행록은 저자가 서울을 출발하여 경기도 포천, 강원도 철원 등을 거쳐 어사 임무를 수행한 함경도로 간 여정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 서울에서 함경도를 왕래하는 경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당시 함경도 지역의 관리와의 교유, 국경 지역의 각 보(堡)와 진(鎭)에 대한 정보와 함께 조선시대 어사 임무의 수행 내용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함경도는 국경과 인접해 있어 조선시대에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지이다.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국경 문제 등의 분쟁이 자주 발생하는 곳으로, 변병 영토에 대한 방비 등이 자연스럽게 행록에 담겨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행록은 조선 중기 함경도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5. 참고문헌

박동욱, 2013, 「조선 지방관의 고단한 서북(西北) 체험」, 󰡔영남학󰡕 23.

이종호, 2006, 「온계 이해의 문학과 정신세계」, 󰡔안동사학󰡕 11.

강석화, 2000,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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