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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1 | ▼a 이행기, ▼d 1962- |
245 | 1 0 | ▼a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었다 / ▼d 이행기 지음 |
246 | 1 3 | ▼a 팩트(facts)로 보는 조선과 일본 그리고 청, 열강의 1850-1905년의 역사 |
260 | ▼a 서울 : ▼b 메이킹북스, ▼c 2022 | |
300 | ▼a 2책(408 ; 419 p.) : ▼b 삽화 ; ▼c 22 cm | |
504 | ▼a 참고문헌과 색인수록 | |
945 | ▼a ITMT |
소장정보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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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953.05 2022z7 1 | 등록번호 111871067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No. 2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953.05 2022z7 2 | 등록번호 111870974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컨텐츠정보
책소개
조선근대사를 일본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청,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당시 한반도와 관련이 있던 열강의 움직임을 시간순으로 같이 본다. 조선사의 경우 1850년부터 1905년까지의 철종실록과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1차 사료를 기반으로 하여 사실에 가깝게 보도록 노력했다.
한국인 모두에게 근현대사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특히 근대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현대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과연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이 일본에 팔아먹어 조선이 망했는가 하는 의문을 30년 넘게 갖고 오다가 지난 7년 동안 자료를 찾아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기본 방향은 오직 사실(facts)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사실에 대한 해석은 독자들이 직접 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조선사의 경우 1850년부터 1905년까지의 철종실록과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1차 사료(primary sources)를 기반으로 하여 사실에 가깝게 보도록 노력했다. 그동안 나온 조선근대사 책 중에서 이렇게 1차 사료를 집중적으로 본 책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 외의 자료는 1차 사료가 아닌 2, 3차 자료를 참고하였는데, 다행히 여러 저자들의 책들이 있어서 팩트(facts)를 서로 확인(cross-check) 할 수 있었다. 외국어를 알더라도 외국의 다양한 1차 사료에 직접 접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워 외국의 자료는 결국 2, 3차 자료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시기의 연구 내용이 충분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조선근대사를 일본의 역사와 비교하면서, 청, 러시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당시 한반도와 관련이 있던 열강의 움직임을 시간순으로(chronologically) 같이 본 것이다. 그동안 조선 근대사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은 나무를 제대로 보기도 어렵지만, 숲을 보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조선근대사에 대한 일반인의 지식은 영원히 미로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고, 이는 우리가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도 장애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책을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책을 직접 내게 되었다. 이 책을 보고 누군가가 더 좋은 책을 낸다면 이 책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조선근대사를 이렇게 조망한 책은 없다는 것이고, 이런 책이 한 권쯤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평
서양사, 동양사, 외교사 등의 책을 읽다가 당시 조선은 어땠는지 해당 부분의 조선근대사 책이나 논문을 보면,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보다는 실망을 한 경험이 많다. 조선근대사의 책이나 논문들은 거의 모두 오로지 조선의 내용만 다루고 있고, 그 당시 국제 정세나 당시 조선의 대신들이나 리더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과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언급이나 백성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기록도 거의 없었다. 이처럼 이들 서양사, 동양사, 외교사, 경제사 등의 책의 내용과 깊이에 비해 조선근대사 책이 오히려 입체적이지 못하고, 서로 중복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거나 특정 사항은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것도 똑같았다.
그래서 조선근대사 책에서 말하는 조선근대사의 모습은 서양사, 동양사, 외교사 등에서 언급하는 조선근대사의 모습과 매우 달랐다. 조선근대사 책에서 말하는 조선근대사의 내용이 훨씬 깊이 있고 체계적이어야 하는데 반대로 엉성하고 조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론에서는 아주 거창하게 언급할 것처럼 하지만 본론이나 결론을 보면 새로운 내용이 전혀 없거나 기존의 것과 차이가 없는 것들이 많았다. 왜 그런가 하는 의문 내지 의심을 매우 오랫동안 해왔다. 왜 이렇게 천편일률적인가, 왜 이렇게 연구의 깊이나 폭이 오히려 30-40년 전의 연구 논문보다 깊고 예리하지 못한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참고한 자료 중에는 1962년에 발간된 책도 있고, 1959년에 나온 논문도 있다.
조선근대사의 책이나 논문의 공통점은 1차 사료를 충분히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에도 그 내용이 있는데, 그것을 인용하지 않고 한글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일성록(日省錄)’을 자신이 번역하여 굳이 인용하는 사례도 있다. 이렇게 하면 독자들이 그 내용을 저자가 제대로 번역한 것인지 확인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왜 이렇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
철종실록과 고종실록 56년 치와 승정원일기 56년 치, 비변사등록 38년 치 등 총 150년 치의 1차 사료를 출력해서 읽고 컴퓨터에 정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노동이었다. 책과 학술논문, 석박사 학위 논문 등을 찾아서 읽고 정리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컴퓨터에 입력한 원고의 분량은 A4용지로 약 4,300페이지에 달한다. 두 번의 축약 과정을 거쳐 이것을 A4 용지 500여 페이지로 줄여서 두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많은 부분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고, 사진도 지도도 싣지 못했다. 그랬다면 책이 아마 세 권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세 권 보다는 두 권이 독자들에게는 경제적이라 판단하여, 매우 무미건조하지만 두 권의 책이 되었다.
1차 사료 분석에서 특히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은 숫자이다. 각종 비용과 인구, 회계부 자료 등이 있는데, 그 중 비용 지출에 관한 내용은 당시 조선의 재정 규모, 정책 방향 등을 알 수 있는 객관적 자료로 판단하여 중시했다. 주요 경비 지출 내역은 왕실 행사 비용, 왕릉 이전 및 보수 비용, 장례식 비용, 궁전 건설 및 보수 비용, 군비 지출액, 홍수 · 가뭄 때 내려준 구휼금, 전염병 퇴치를 위해 내려준 금액, 청나라 칙사 대접 비용, 각 부처의 예산 규모, 금 · 은 · 돈 · 쌀 등 주요 자산의 전년도 이월 규모 등의 내역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수치 자료 분석은 조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됐다.
이 책은 결코 하룻밤에 다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생각을 하면서 읽어야 하고, 그렇게 이 책을 본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 그러나 분명 어느 누구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이 시기의 역사를 잘 모르면서 가르치려 들지 못할 것이고, 영화나 역사물, 소설 등을 보더라도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스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국제법, 경제학, 헌법학, 물리학 등의 교과서와 책을 참고한 이유 또한 한 줄을 쓰더라도 추측으로 독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주석을 달 때는 석박사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항상 생각하면서 그들의 귀중한 시간과 돈을 뺏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최대한 정확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정보제공 :

저자소개
목차
[v.1] 서문 1800년 ~ 1849년 조선의 역사 10세의 순조 즉위와 수렴청정/“장차 몇 시절이나 지탱”할지 걱정한 대왕대비/‘애절양’/1810년의 굶주린 백성의 수/홍경래의 난/“소방의 미약한 힘으로 어떻게 제때에 초멸할 수 있었겠습니까?”/세자 책봉에 관한 청 황제의 ‘칙서’와 ‘고명’ 내용/급격히 줄어든 강화부의 군량/과거제의 폐단/“얻은 것은 항아리 하나의 저축”/“반드시 망하게 될 뿐입니다”/왕이 불태우게 한 흉서/“속국 중에서 가장 공순하다”/왕세손 책봉의 칙서와 조서/궁중의 사치와 탐관오리/순조가 지적한 과거제의 문제점/7세의 헌종 즉위와 수렴청정/헌종 책봉의 칙유/프랑스 신부 처형/아편전쟁 정보를 입수한 조선/1848년의 과거제 실상/18세의 철종 즉위와 수렴첨정 1800년 ~ 1849년 일본의 역사 막부, 쇼군, 번, 번주/‘산킨고타이’/조정과 막부의 관계/서양 지식에 개방적이었던 막부/인구조사/인체 해부도 ‘해체신서’/국방강화와 해외진출/오사카와 에도 농민들의 생활/종합세계지리서와 대백과전서/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청국의 외국 정보 수준/‘대일본연해여지전도’/《신론》/쇄국책/지볼트 사건/해외팽창론/아편무역이 중요한 영국과 인도/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모리슨호 사건/데키주쿠/아편전쟁/고도칸/백과사전 《후생신편》/포술교육, 반사로, 내화벽돌/덴포개혁/신수급여령/난징조약/‘해방팔책’/네덜란드 국왕의 개국 권고/대형 선박 건조허가 요청/미국 함대의 에도 출현/석탄 중간 공급지/혁명의 해 1848년/조선의 연호 사용 1850년 조선 암행어사도 눈물을 흘렸다/“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백성/ 왕릉과 묘지 수리비 1850년 일본 대총제조방/함풍제 즉위와 태평천국의 난/빛의 속도 측정 1851년 조선 인구의 3%가 죄수/“고리대금업자가 이자놀이” 하는 것 같은 세금징수/조운선 고의 침몰/이명섭 모반사건 1851년 일본 사쿠마 쇼잔/일본 최초의 신문/해저 케이블, 지구자전 증명, 세계 박람회 1852년 조선 우의정과 좌의정의 호소/“당장 무슨 변이 일어날 듯” 불안해하는 좌의정 1852년 일본 슈세이칸/요시다 도요/미국함대의 방문 계획을 통보받은 막부/러시아의 사절단 파견/나폴레옹 3세 즉위/《해국도지》 1853년 조선 “궁핍한 백성을 보는 것은 어찌 그리도 야박하단 말입니까”/“모두가 죽음에 빠지게” 될 것을 염려하는 영의정/경상북도에서 발견된 흉서 1853년 일본 에도 앞바다에 출현한 ‘구로후네’/미국 대통령의 국서/총의 도면을 그리게 한 번주/번주들의 의견을 물어 개항을 결정한 막부/인재육성과 해군건설론/이사가와지마 조선소/대형 선박 건조 허용/러시아 사절단의 방문/요시다 쇼인의 밀항 실패/대외교섭 사료집 완성 1854년 조선 영의정의 호소/고향을 떠나는 백성들/“백성을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병조가 한심한 병조판서/싸움판이 된 과거장/러시아 제독의 조선 방문 보고 1854년 일본 일미화친조약/페인트, 증기기관차, 전신/밀항에 또 실패한 요시다 쇼인/일영화친조약/함선 제조 기술 습득 노력/러시아와 국경선 확정/네덜란드 국왕의 해군교육 제의/네덜란드 장교의 일본해군 창설 건의/후쿠자와 유키치와 사카모토 료마 1855년 조선 신하를 만나지 않는 왕/돈이 없는 병조와 경기도/호조의 재정난/옛날과 싸우는 유생들 1855년 일본 해군교육 시작/‘양학소’ 1856년 조선 탐관오리의 처벌을 호소하는 대신들/호조판서와 병조판서의 상소/능을 옮기는 비용/가구당 2냥 이하의 구휼금/조선 점령을 건의한 프랑스 제독 1856년 일본 33세에 곱셈, 나눗셈을 배웠다/지중해 진출이 좌절된 러시아/애로우호 사건/미국총영사 부임/‘쇼카손주쿠’/네안데르탈인 화석 1857년 조선 “미치광이” 좌의정의 절규/궁전 수리비 등/칙사 대접에 군량미까지 동원 1857년 일본 아무르 지역을 탐내는 러시아/일미화친조약 개정/통상조약 체결 의사를 표명한 막부/제2차 네덜란드 군사교관단 1858년 조선 여전히 곤궁한 병조와 호조/재산을 뺏기는 부자들/궁전 수리비와 구휼비 1858년 일본 안세이 5개국 조약/안세이 대옥/암살 시도, 에도 유학, 영어 공부/일미수호통상조약/톈진조약/아이훈 조약 1859년 조선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철종/“극한 지경”에 이른 진주/침묵하는 언관과 신하를 만나지 않는 임금/조선인 범죄자는 조선에서, 일본인 범죄자는 쓰시마에서 처벌/상소하면서 돈을 뜯는 유생들/군량미까지 동원한 궁전과 왕릉 수리 1859년 일본 네덜란드 해군교육 완료/초대 주일 영국공사 부임/톈진조약 무효를 선언한 청/《종의 기원》 1860년 조선 “매질하고 긁어내어 흩어지고 쓰러지는” 백성들/군기고에 화약이 없었다/전국 관청의 돈을 동원하여 궁전 수리/안세이 5개국 조약 체결 통보/‘열하문안사’ 파견 결정 1860년 일본 미국방문 사절단의 충격/사절단의 기록과 건의/‘사쿠라다문 밖의 변’/함풍제의 피신과 러시아의 연해주 획득/‘만엔킨’ 1861년 조선 “피맺힌 간절한 마음을 토로”한 좌의정/왕의 문란한 생활을 직언하는 영의정/“흉년이든 풍년이든 불쌍한 사람은 백성”/병조의 1천 냥도 궁전 수리비에/“참으로 예의의 나라이다”/러시아와 조선의 국경선 확정 1861년 일본 해군의 해외 유학 건의/러시아군의 쓰시마 점령/‘항해원략책’과 존황양이파/‘도사근왕당’/외국군의 요코하마 주둔/‘총리아문’/동치제 즉위와 서태후/남북전쟁, 농노해방 1862년 조선 진주민란/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민란/“눈물을 닦아도 그칠 줄을 모릅니다”/“그토록 맹목적인 헌신과 존경, 복종을 배우지 않았더라면”/창고가 빈 호조와 병조 1862년 일본 분큐사절단과 런던각서/분큐사절단의 문명 탐방/네덜란드에 최초의 유학생 파견/계속되는 암살. 습격. 방화 사건/비스마르크 수상 1863년 조선 경상도의 가장 작은 고을/사망 3개월 전 “다급해하는” 철종/좌의정의 사직상소에 나타난 실상/프랑스 선교사가 본 조선인의 정신 상태/고종 즉위와 수렴첨정/동학의 실상과 최제우의 체포/1863년의 회계부 1863년 일본 ‘상락’과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조슈 파이브’의 영국유학/사츠에이 전쟁/8.18사변/사카모토 료마의 각오/이홍장의 편지 1864년 조선 1월부터 돈이 없는 호조/대왕대비가 본 조선/도고를 폐지하라/조운선 고의 침몰/나태한 무관과 잡과의 실상/27만 냥을 횡령한 관리/최제우 사형 1864년 일본 ‘이케다야의 변’과 ’금문의 전투’/제1차 조슈정벌/사쿠마 쇼잔의 암살/시모노세키 전쟁과 히코시마/가이텐 궐기/27세 외교책임자의 헌책/‘막부는 유한하지만 일본은 무한하다’/《만국공법》 1865년 조선 대보단과 만동묘/“생산이 모조리 텅텅” 비었다/경복궁 중건 결정/원납전 515만 냥/장부에는 16만여 석, 실제는 1만여 석/강화부의 군사 대비 태세 1865년 일본 시바타사절단과 조선소 건설 계약/주일 영국공사의 포함외교/사츠마번의 유학생 파견/‘만국공법’ 학습 열풍/청국 세관 총세무사의 상주문 1866년 조선 수렴첨정 철렴/병인박해/병인양요/왕비 책봉 의식/제너럴셔먼호 사건/“상국(上國)”의 공문이 있어야 교역을 할 수 있다/전선(戰船) 수리 비용/강화도 백성들에 1만 냥/원납전 액수와 수령직, 초사직/전선수리비와 강화도 구휼금의 규모 1866년 일본 《서양사정》/삿쵸동맹/요코스카 제철소 건설 시작/개세약서/민중들의 봉기/제2차 조슈정벌/막부 내부의 ‘대정봉환(大政奉還)’ 의견/“이 한 목숨 이슬같이 사라진다 한들 무슨 한이 남으랴”/붕괴되기 한 해 전에도 유학생을 보낸 막부/빈춘사절단/보오전쟁과 북독일 연방 탄생 1867년 조선 슈펠트 제독의 방문/야도 마사요시의 정한론/문을 무보다 더 중요시하는 왕과 대신들/원납전과 무기 수리비/구휼금 1만 4천 냥/당백전 주조 중단과 호전의 폐해 1867년 일본 파리로 간 시부사와 에이이치/프랑스 장교의 부국강병 건의/조선과 프랑스, 미국 간의 화해를 추진한 막부/삿도맹약/대정봉환/‘왕정복고의 대호령’/미국, 알래스카 매입 1868년 조선 미국 군함 쉐난도호의 방문/포격을 받은 쉐난도호/5개월간 원납전과 인건비 비교/사형 집행의 사례들/국경선에 대한 고종의 지식/일본 외교문서 접수 거부 1868년 일본 도바-후시미 전투/열강의 신정부 승인/조약 체결권자는 천황/조선의 ‘인신무외교’/쇼군의 항복/‘정체서’와 태정관 제도/에도 무혈 입성/‘5개조어서문’/막부 지지세력의 저항/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저항/청의 벌링게임 사절단/조선, 청, 일본의 인재육성 1869년 조선 “나라가 나라로 유지되지 못한다”/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는 백성/처참한 주거환경/함경도 백성들의 러시아로의 집단탈주/종친의 과거 특채와 난장판이 된 과거장/경상도와 전라도의 민란/외교문서 접수 거부 이유/정현덕과 안동준 1869년 일본 판적봉환/전신 부설과 전신망/‘쇼콘사’와 ‘야스쿠니 신사’/국력배양 우선론/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와 ‘엔’/관제 개혁, 징병제/대륙간 철도, 수에즈운하, 주기율표 1870년 조선 왕릉과 종묘 수리비와 조총 제작비/“서양오랑캐”들도 “중국 성인의 가르침에 다 감화될 것”/월급도 못 주는 경상감영/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러시아로 넘어간 백성들, 잘 살고 있었다/서계를 수정한 일본 외무성/조선과의 조약 체결 의사를 표명한 미국 1870년 일본 공부성, 공부대학교/가쓰라 다로/대(對)조선 강경론/청국과의 수교 결정/미국의 재정 · 통화정책 조사/농민봉기/보불전쟁 1871년 조선 신미양요/로우 공사의 철수 결정/척화비 설치와 우의정의 ‘정신승리’/서원 철폐와 유생들의 저항/영해민란/군기조성소에 10만 냥/‘외무성’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조선 1871년 일본 해외유학생 규칙과 우편제도/조폐공장, ‘신화조례’, 금본위제, ‘엔’/폐번치현/‘일청수호조규’와 조선의 지위/류큐인 피살 사건/이와쿠라 사절단의 출발/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탄생한 독일제국/‘파리 코뮌’ 1872년 조선 외무성 관리 접촉을 거부하는 조선/계속되는 일본 외무성의 회견 요청/‘관왜난출’/외무성 관리들의 조선 철수/외무성의 왜관 접수와 ‘대일본공관’/경복궁 중건 비용 783만 냥/9개 고을 수재민에 3천 냥 1872년 일본 기상관측 시작/프랑스 군사고문단, 도미오카 제사장/백성들 간에 도는 소문/‘학제’/일본 최초의 철도/‘국립은행’ 조례/이와쿠라 사절단의 미국 방문/일본의 반성을 촉구/정치제도, 운하와 물류비, 마찰과 도로/영국 방문 기록/일본의 낙후 원인/이홍장의 중국 사대부 비판 1873년 조선 궁전공사에 반대하는 상소/사신들의 허위 보고/일본을 모멸한 동래부사/최익현의 대원군 비판 상소/“이미 300년 동안을 신하로서 섬겨” 온 조선 1873년 일본 징병령/농민폭동/잿더미가 된 황궁/심각한 재정적자/청국 대신의 답변 내용과 양계초/목례로 청 황제를 알현한 외무경/조선에 군대파견과 특사파견의 대립/사이고 다카모리의 낙향/비스마르크의 충고 1874년 조선 역관 오경석과 영국 서기관의 대화/중국어를 모르는 사신들/백만 냥이 드는 전각 세 채 건설/“시를 지어서 적을 물리치겠습니까?”/군인명부는 빈 장부/수재민 구휼금 규모/세금이 아니라 약탈이었다/아내를 팔고 아들을 팔게 만드는 환곡제도/우의정의 일본에 관한 인식과 정보 수준/고종과 암행어사의 대화/일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일본에 서계 수정을 요청 1874년 일본 일본군의 대만 출병/대만 출병에 대한 일본 측 논거/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한 청/‘민선의원설립 건백서’/‘사가의 난’/육군사관학교, 의사시험제도 등/서계를 수정한 외무성/광서제 즉위, 몰트케의 연설, 캐번디시 연구소 1875년 조선 연호를 ‘광서’로 사용/“작은 나라”의 감격/청국 황제에게 곡하고 “만세”를 외치는 고종/서양대례복과 행사장 정문 출입을 거부/서계 접수 거부 결정/일본공관원의 귀국/운요호 사건/일본 전권대신의 부산도착/강화도 복구비 75%는 현지 조달/세입의 3배를 지출하는 호조/방납과 도고의 문제점/“모든 법도가” 무너졌다는 고종 1875년 일본 대조선 정책/‘입헌체제 수립에 관한 조칙’/사할린과 쿠릴열도/거문도 점령을 건의한 주일 영국공사/조선에 특사 파견 결정/조선 정벌을 주장하는 건백서들/폐도령/이홍장의 중국 유학자 비판 1876년 조선 강화도조약 체결에 대한 청의 충고/세 차례의 회담/‘서술책자’에 나타난 조선의 입장/강화도조약/서계 접수거부에 대한 조선의 해명/일본의 무기류 기증/고종과 신헌의 대화/조약 책자 전국에 배포/최익현의 강화도조약 반대 상소/고종도 개탄한 무기상태/수신사 김기수 임명/김기수의 귀국 보고/〈무역규칙〉 조인 및 수출입세 면세/“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러시아로 흘러들어가는 사람들”/가뭄, 경복궁 화재 1876년 일본 조선의 ‘속방’ 논쟁/김기수의 방문 일정/외무성이 준비했던 일정/김기수의 조선 내 위치/보이지 않는 ‘가이드라인’/마음껏 시찰하라는 일본과 곧 돌아가야 한다는 김기수/김기수의 고뇌/이노우에의 충고/김기수의 방문 소감/수신사의 귀국/회계학 연구서, 서양식 부기법/오가사와라제도 편입/헌법기초제정 칙어 발표/‘질록처분’과 사무라이들의 불만/사무라이들의 반란/일본, 청, 조선의 철도/민간기업 독려/과학사/타자기, 탄산음료 1877년 조선 궁궐의 절제를 호소하는 영의정/1876년의 회계부/거지에게 5전씩/서울 관아에 곡식이 바닥났다/계속되는 조운선 침몰/급여를 못 받은 훈련도감 병사들/일본의 개화 지원 의사 1877년 일본 세이난전쟁/박람회, 전화, 콜레라/공부대학교, 동경대학 등/이홍장과 곽숭도의 사대부 비판/러터전쟁과 일본의 정보력 1878년 조선 서원 복설을 요구하는 유생 1만 명/“머리끝부터 다 병들었다”/리델 신부 석방을 명령한 청 황제/“상국 지휘”/리델 신부가 본 조선 감옥/군의 실상과 치안 상태/암행어사가 보고한 삼남 지방/일본 수입품에 대한 과세 시도/이동인 1878년 일본 농민반란/오쿠보 도시미치의 암살/일본공사의 시베리아 횡단 기록/다케바시 사건과 ‘군인훈계’/《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러시아의 지중해 진출 좌절/곽숭도의 한탄 1879년 조선 “단 하루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부자와 부부가 하염없이 서로 바라볼 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백성들/사신과 고종의 ‘정신승리’ 대화/일본군함 시찰을 거부한 훈련대장/“차라리 외교란 말을 하지 말고 앉아서 제 나라나 지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고종이 본 위급한 조선 1879년 일본 콜레라로 10만여 명 사망/홍콩과 일본 신문 내용/청에서 나온 조선의 개국 문제/전 미국 대통령의 청과 일본 방문 1880년 조선 미국의 조선과의 조약 체결 시도/수신사 김홍집의 출발/무기제조술을 배우려는 “작은 나라”/김홍집의 복명/고종과 영의정의 《조선책략》 대화/《조선책략》 비판 상소/함경도 백성들에게 내린 교서/열 집에 아홉 집은 빈 북방/“상하가 빈곤에” 허덕였다/일본공사의 부임과 무기류 기증 1880년 일본 미야코제도와 야에야마제도/‘흥아회’/김홍집의 일본 도착과 외무경의 조언/《조선책략》의 내용/재정악화와 마쓰가타 마사요시/참모본부장의 군사력 증강 강조/이홍장의 슈펠트 초청 1881년 조선 유생 1만 명의 《조선책략》 비판 상소/김홍집의 사직상소/황재현과 홍시중의 《조선책략》 비판 상소/홍재학, 신섭 등의 《조선책략》 비판 상소/청국 칙사에 은 7천 냥/별기군/수구파비판 상소/조사시찰단의 귀국 보고/“가난을 편안히 여기게 만드는” 안빈낙도/이재선 사건/김윤식의 상소/세자 결혼식비용은 12만 냥/“나라 일은 날로 잘못되고”/대궐 내의 문제점과 기강. 치안 1881년 일본 국회 개원 조칙 발표/가네코 겐타로와 우에키 에모리/조선의 방문단/‘마쓰가타 디플레이션’/미국과의 협상을 피한 조선/이리 지방을 획득한 청/알렉산더 3세 1882년 조선 조미수호조약 체결/조미수호조약의 내용/‘속방조회문’/속방조회문을 무시한 미국/임오군란/어윤중과 김윤식의 대원군 제거 건의/대원군 납치/“대국과 너희 조선은 임금과 신하의 관계”/청국군, 왕십리와 이태원 습격/제물포조약/묄렌도르프, 마건상/30세 고종의 결의/척양비 제거/27세 지석영의 상소/“마음으로는 옳게 여기면서 입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조중상민 수륙무역장정〉/고종의 하유 1882년 일본 이토, 헌법연구를 위해 유럽 방문/“귀국 일은 언제나 토할 듯 토하지 않을 듯하니, 이러고서 일이 될 것인가”/‘속방’ 조항을 둘러싼 이홍장과 슈펠트의 대립/불공정조약 개정 회담과 주일 영국공사/일본의 조선 파병 결정/청국의 조정 제의를 거부한 일본/미국, 조선이 독립국임을 일본에 통보/군비확장 논의/청 내부의 대일 주전론/임오군란 사죄사 파견/무라타 총과 탄약 5만 발 기증/37세의 ‘일본은행’ 초대 총재/군비확장 계획과 증세/박영효를 만난 주일 영국공사 1883년 조선 무너지는 공권력/배로 귀국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조선 사신/보빙사 파견/‘조일통상장정’과 관세권 회복/청국인이 남대문에 내건 ‘방문’/‘조영수호조약’/“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므로 본토와 같이 본다”/한성순보, 전환국, 혜상공국, 해관 1883년 일본 4년 전 유학생과의 약속을 지켜 세운 회사/22세의 기술자가 입안한 비와호 건설/주청 영국공사 파크스/‘조일통상장정’에 대한 유럽 공사들의 불만/보빙사의 미국 시찰과 귀국/배에서 유교 서적만 읽은 민영익/영국, 조선에 총영사 파견 결정/‘만국공법’ 번역가가 본 청과 일본의 차이점 1884년 조선 ‘한성순보’ 사건/세계표준시 확정 국제회의/청국군 1,500명 철수/민영익의 귀국 보고/“광명세계로 들어갔다가 이제 또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좌절된 고종의 의복간소화 시도/거의 공석이 된 주진독리/변리공사로 강등된 미국공사/2천 년 전 중국 사람에 대한 시험을 치는 조선/호조판서와 영국 총영사/갑신정변/청국군과 일본군의 교전/부친들의 자결/청년들에게 희망을 가졌던 김옥균/한성조약/고종의 결의/유학을 떠난 윤치호 1884년 일본 1년간 유럽시찰에 나선 육군경/헌법제정을 위한 조직 구축/화족령/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청불전쟁/세계표준시 확정/주청 영국공사와 갑신정변 해결 방향/주청 영국공사, 거문도 점령을 건의/청국의 갑신정변 해결 방침/일본의 갑신정변 해결 방침/조선의 개혁을 주장한 주청 영국공사/조러조약과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일본 해군 식단에 고기, 빵, 우유 등장 1885년 조선 거문도 점령/이홍장과 일본 공사의 서한/조선의 영국 비난/청국과 일본 군대의 철수/민란과 활빈당의 준동/월급이 없는 지방 하급관리/“세상에 우리나라처럼 가난한 나라는 없습니다”/당오전 문제와 조운선 고의 침몰/“군량이 없는 몇 길이나 되는 빈 성을 지키며”/대원군 귀국 저지와 이홍장/제1차 조러밀약설과 원세개 파견/대원군이 귀국하던 날에 사형집행/대조선 강경책으로 전환한 이홍장/원세개와 메릴, 조선 해관 1885년 일본 NYK, 무라타 총, 하와이 이민/반청 감정과 ‘오사카 사건’/예조참판의 일본 방문/‘탈아론’/펜제 점령과 거문도 점령/주청 영국공사의 청국 설득/톈진조약/제1차 조러밀약설과 일본 외무성/청불전쟁의 종식과 손문의 결의/내각제도 실시/서아프리카 회의 참고 사항 조선과 일본의 연혁/1800년 ~ 1891년 조선의 남녀별 인구 및 가구 수, 가구당 인구/1800-1905 회계부 내역 중 주요 항목/ 원납전 내역 주석 상권 참고 자료 리스트 [v.2] 2권을 시작하며 1886년 조선 군사 1명 양성에 연간 최소 200냥과 쌀 10석이 필요 | 제2차 조러밀약과 고종 폐위주장 | “권력자들의 명령을 장님처럼” 따르는 조선 백성 | ‘조선대국론’, ‘유언사조’ ‘시사지무십관’ | 고종이 본 위태로운 조선 | 고종의 용기와 과단성 부족을 지적한 좌의정| 월급을 못 받는 관리들 | “어찌 뼈에 사무치도록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 러시아 상인이 본 금광 노동자들의 삶 | 김규식, 배재학당, 육영공원, 콜레라 1886년 일본 콜레라 사망자 11만여 명 | 건축학회, 학교령, 교과서 검정제도, 관료임용제도 | 불공정조약 개정 회의 | 김옥균의 상소문 | 이홍장의 거문도 철수 협상 | 화물선 침몰 사고와 영사재판권 문제 | 헌법 초안 기초 작업 1887년 조선 “오늘날의 도적은 오히려 알려지지 않을 것을 걱정합니다” |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지석영의 유배 | 조선의 독립에 비관적인 러시아·미국공사 | “사람을 죽이는 것도 부족하여 무덤까지 파고 있다” | 외교고문 데니의 활약 | 해외 공사 파견에 간섭하는 청 | 주미공사 파견과 청국에 항의한 미국 | 박정양의 신임장 단독 제정과 러시아 외무상의 보고 | 박정양의 귀국과 황현의 기록 | 외국 공사들의 반응 | 연무공원 1887년 일본 건전지, 수력발전소 | 일본적십자사 | ‘방어선’ 확장 | 조약 개정 반대 여론 | 시베리아 철도 건설 논의 | 헌법 교육을 받은 천황 | 보안조례 | 호예원 | 전자기파 1888년 조선 박영효의 ‘건백서’ | 궁전 공사비 50만 냥 | “왼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오른손으로 네모를 그리는” 병조판서 | 러시아와 프랑스 정부의 대(對)조선 지침 | 외국인에 대한 소문 | 대궐 내에서 노름하는 군사 | “벙어리에 귀머거리, 소경까지 겸했으니” | “모리배들”에게 놀아난 화폐주조 | 조선이 청에 흡수될 것을 우려한 러시아공사 | “마른 수레바퀴 자국 안에서 헐떡거리는 붕어보다” 심각한 백성 | 관직매매와 ‘벼락감투’ | “상인들은 낮으로 울부짖고 행인들은 밤으로 통곡하는데” | 무정부 상태 | 데니의 외로운 투쟁 1888년 일본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 | ‘제국헌법’안 심의와 추밀원 | 전국이 초토가 되더라도 저항할 것 | 불공정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영국 | 물리학 용어의 번역 통일 | 롤 필름과 코닥 카메라 | 서태후, 해군 예산을 황실 별장 공사에 전용 | 데니, 《청한론》 발간 1889년 조선 제대로 안 되는 현지 보고 | 진주의 환곡, 징세 문제와 광양의 “반란” | 행동을 하지 않는 고종 | 신하들에게 탓을 돌리는 고종 | 출근을 거부하는 영의정 | “당장 부끄러움으로 죽고만” 싶은 호조판서 | 토목공사, 기도비용, 사치를 억제하라는 상소 | 평안감사의 사직상소 | 아직까지 세계 지도도 안 본 고종과 신하들 | “지옥으로부터 한 걸음 앞에” 놓인 조선 | 러시아 장교와 영국총영사가 본 조선 | 방곡령 1889년 일본 메이지헌법 발포와 선거법 | 오스트리아 교수가 강조한 조선의 중요성 | 서구의 메이지 헌법 평가 | 폭탄에 한쪽 다리를 잃은 외무대신 | 징병제 개정, 육군사관학교 1기생, 히비야 공원 | 에펠탑과 엘리베이터 1890년 조선 “모두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습니다” | 조선의 차관 도입을 막은 청 | 대왕대비 장례비 122만 냥 | “털끝까지도 모두 병이 든 것과 같다” |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백성들 | 속방의식을 본 외교사절 | 프랑스공사와 영국총영사의 보고 | 미국공사의 보고 | 러시아공사의 보고 | 원세개의 《사한기략》 | 끝없는 수탈에 시달리는 백성들 | “거북의 등에서 털을 깎아내야 할 정도”의 재정 상태 1890년 일본 민법, 민사소송법, 상법 공포 | 조약 개정 방침 | 첫 중의원 선거, ‘교육칙어’, ‘불경사건’ | 주권선과 이익선 | 비스마르크의 퇴진 1891년 조선 돈이 없는 군부 |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하지 마시고” | “과연 제대로 다스려졌다고 보십니까” | “과거를 설행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 73년 전과 다름없는 과거의 문제점 | 천둥의 마지막 기록 | 조선의 관리를 “강도들”이라 부른 영국 인류학자 | 전 영국군 장교와 미국공사가 본 조선 1891년 일본 오쓰 사건 | 죄형법정주의와 사법부 독립 문제 | 시베리아 철도 착공 | 북양해군의 일본 방문 | 행정부와 의회의 충돌 | 삼국동맹, 독러 재보장조약, 러불동맹, 삼국협상 1892년 조선 “나라의 군대 위용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 “조정 백관들은 고식적인 의논을 능사로 삼고 지방관들은 탐학만을 일삼고” |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니” | “조석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 몹시도 두렵습니다” | 좌의정이 지적한 당시 조선의 문제점들 | 11년 후의 러시아 민속학자 | 미국공사의 정확한 예측 | 청으로부터 20만 냥 차관 도입 | 함경북도와 평안도의 민란 | 동학교도의 삼례역 집결 1892년 일본 의회 해산과 총선거 |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 | 제국대학 교수 해임 사건 | GE, 디젤 엔진 1893년 조선 광화문 앞 ‘봉장규혼’ | ‘봉장규혼’ 비판 상소와 체포 명령 | 외국 군함들의 인천 입항 | ‘척왜양창의’ | 청국군 파견 요청을 제기한 고종 | 탐관오리와 조선왕조 | 동학교도들의 귀향 |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보아도 결국은 전혀 대책이 없고” | 무당과 점쟁이에 심취한 왕과 왕비 | 만석보 수세와 전봉준, 함경도 | 평안도와 황해도 민란 1893년 일본 정부와 의회의 타협 | 조선에 대한 주청 러시아 무관의 보고 | 육군참모차장의 조선과 청국 시찰 | ‘전시대본영’ 조례 | 군비의견서 | 조약 개정 반대 운동과 의회 해산 | 메이지 천황의 후회 | 기타무라 도코쿠 | 시베리아 철도 위원회 1894년 조선 고부군아 습격과 해산 | 고부민란에 관한 기록 | 주청 러시아공사의 보고 | “그의 사지를 찢고 그의 살점을 씹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 “이놈의 세상은 얼른 망해야 한다” | 러시아공사가 본 동학난의 원인 | 파병 준비를 건의한 일본 임시대리공사 | 청국군과 일본군의 상륙 | 전봉준의 원정서 내용과 고종의 책임 | 전주성 탈환 및 동학도들의 귀향 | 미국공사의 보고 내용 | 조선의 마지막 사신, 걸어서 북경까지 | 일본의 개혁 항목 제시와 조선의 거부 | 일본군의 경복궁 난입 | 청일전쟁 개전과 고승호 사건 | 190년 만에 폐지된 명나라 황제 제사 | 군국기무처, 갑오개혁, 그리고 방해 세력 | “청나라를 두려워하는 마음… 일본을 의심하는 마음” | 도량형과 〈신식화폐장정〉 | ‘교환의 매개’ 기능을 상실한 엽전 | 경장을 알리는 고종의 교서 | 〈조일 잠정합동조관〉, 〈조일동맹조약〉 | 박영효의 사죄의 글 | 평양전투와 황해해전 | 발각된 대원군의 밀서 | 동학도의 2차 봉기 |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된 전봉준 | 갑오개혁 비판 상소 | 일본의 개혁안 20개조 | 강원도와 황해도에서의 전투 | 김개남의 체포 | 홍범 14조 | 두 명의 탐관오리가 120만 냥 횡령 1894년 일본 중의원 선거와 야당의 승리 | 조약 개정 반대 운동과 의회 해산 | 대본영 설치 | 청과 일본의 파병 통지 | 내정 개혁 추진 방침을 청에 통보 | 청, 영국과 러시아에 공동철병 중재를 요청 | 조선 내정 개혁을 거부한 이홍장 | 조선 내정 개혁안 확정 | 미국·영국·일본공사들의 움직임 | 일본에 유감을 표명한 미국 | 공동철병에 대한 러시아와 영국의 조치 | 제2차 절교서 | 베베르와 이홍장의 회담 | 청 해군의 실상 |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청 | 조선의 운명을 예측한 주청 러시아 무관 | 청, 조선에 군대 증파 | 영일통상항해조약 | 외국의 자국 침략에 대한 일본의 의지 | 청국 내의 주전론과 일본의 출전 명령 | 청과 일본이 조선을 공동 점령할 것을 재촉하는 영국 | 청일전쟁 | 고승호 사건과 영국 여론 | 대조선 정책 결정 | 일본 의회의 방향 전환 | 주청 러시아 무관의 보고 | 확전론과 야마가타의 소환 | 독일, 러시아, 미국에 중재를 요청한 청 | 전쟁에 동원된 일본군 | 니콜라이 2세 즉위 | ‘사한기략’과 ‘속국’ 1895년 조선 재산을 뺏기는 동학도 | 청나라 연호 사용 폐지 | 지방관의 저항으로 좌절된 징세 제도 개혁 | 회계법 | 이준용 모반 사건 | 독립경축 행사에 불참한 미국공사 | 베베르에 대한 고종의 신임 | 갑오개혁의 파탄 | 갑오개혁에 대한 고종의 불만 | 갑오개혁과 왕의 권력 | 갑오개혁의 반대 세력 | 죽음을 예감한 총리대신 | 콜레라 발생과 인구 변동 | 을미사변 | 민영준에 대한 프랑스공사의 보고 | 스기무라 서기관의 기록 | 러시아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한 고종 | 양력, 소학교, 단발령, 연호, 의복제도 | 춘생문 사건 | 미국무장관의 훈령 | 영국 여행가의 눈에 비친 조선 1895년 일본 전염병으로 5만 3천여 명 사망 | 센카쿠제도 편입 | 일본은행, 조선에 300만 원 차관 제공 | 정여창 제독의 자결 | 러시아 무관의 일본군에 대한 평가 | 미국이 파악한 러시아의 만주에서의 움직임 | 러시아의 삼국간섭 방침 확정 | 시모노세키조약 체결과 청국 내 반대 세력 | 양계초, 엄복, 담사동의 비판 | 일본의 환호와 삼국간섭 | 러시아 함대의 중국 집결 | 일본, 요동반도 포기 결정 | 군사 1백여 명의 자결 | 1만 4천 명을 희생한 대만의 저항 | 일본, 조선에 대한 간섭 배제 결정 | “빗물로 머리를 감고 불어오는 바람으로 목욕을 하면서” | 향후 10년간 전함 건조 계획 | 미우라 고로 임명 | 청의 차관 도입과 러시아 | 요동반도 반환 각서 교환 | 미우라의 을미사변 보고서 | 시모노세키조약 체결에 감사를 표시한 조선 | 대조선 불간섭 정책 | 요동반도 반환조약 | 대폭 증가한 다음 해 예산안 | 러시아의 마산포 관심 | 과학사 1896년 조선 단발령 반대상소 | “머리카락과 구습을 한꺼번에 끊으며” | 단발령으로 인한 사회 혼란상 |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사회 혼란상 | “차라리 머리털을 보존하다가 (조선이) 망하는 편이 낫다” | 아관파천과 대신들의 처참한 말로 | 고무라 공사의 보고 | 단발령 철회 | 경인철도 부설권과 독립신문 창간 | 고무라-베베르 협정 | 경의철도 부설권 | “초조함과 근심은 갈수록 더욱더 심해집니다” | 관찰사들의 사직상소 | “백성들의 산업이 날로 쓸쓸해지고” | 압록강과 울릉도 삼림벌목권 양도 | 내각 폐지와 의정부 부활 | 외국인과 외국정부가 본 조선 |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조선 | 당시 조선 주변의 상황 | 조선군의 실상 | 예산의 98%가 관리의 월급과 비용 | 고종과 신하들에 대한 러시아 측의 보고 1896년 일본 일본과 러시아의 대화 채널 | 조선과 관련한 조약 체결을 건의한 주일 러시아공사 | 한반도 중립화를 제의한 영국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와 39도선 | 민영환의 러시아 방문 | 민영환 일행의 방문 기록 | ‘동청철도’와 남만주지선 | 러-청 비밀동맹 조약과 동청철도 협정 | 일본의 해군 확장 계획 1897년 대한제국 김홍집 등을 “역적”, “흉적”으로 본 고종 | 관찰사들의 사직상소 | “백성들의 신음 소리가 도리어 전보다 심하니” | 독립신문의 ‘조선병’ 치료 방법 | 고종의 환궁 | 미국무장관의 훈령 | 백성의 원망을 듣는 암행어사 | 외부대신은 56일, 군부대신은 64일 | 고종의 결의와 단발령 취소, ‘광무’ | 러시아 외무상의 훈령 | 황제로 칭할 것을 아뢰는 상소들 | 고종, 황제에 오르다 | ‘황제’에 반대한 서로 다른 이유 | 여전한 왕실 행사비 지출 | “상호 시기하고 의심하는” 군부 | 4만 호의 인구에게 1년에 5만 원도 큰돈 | 백성을 수탈한 지방군 1897년 일본 5연발식 무라타 총, 교토제국대학, 영화 | 야하타 제철소 | 러시아의 대일 정책 | 러시아의 현상 유지책 | 경봉철도 | 독일의 교주만 점령 | 러시아의 대련, 여순 점령 | 일본 외무성의 반응 | 독일의 해군증강책 1898년 대한제국 “조선 백성들은 몇백 년을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압제를 받아” | “나라의 재정은 꾸릴 방도가 없고” | 러시아의 철수 | 러시아와 프랑스공사의 본국 보고 내용 | ‘주막의 나그네’ | 장례비와 기민의 구휼비 비교 | 황국협회 | 최시형의 사형 집행 | 배신자는 가까운 사람이었다 | 유럽전권공사의 사직의 변 | “필요한 때에는 … 잡세”를 신설 또는 증설할 수 있다 | 조약 이행을 강조하는 외부대신 | “글이 매우 외람”된 상소 | 경부철도 부설권 | “협회라는 것”의 활동 금지 명령에 “분통이 치밀어” 오른 윤치호 | 헌의 6조 | 독립협회 “혁파”와 박정양 등 파면 | ‘익명서 조작 사건’과 독립협회 간부 체포 | 만민공동회의 철야 시위, 독립협회 간부 석방 | 보부상의 습격과 독립협회 복설 | 외국 공사들의 회의 | 고종의 약속 미준수 | 독립신문의 사설 |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해산과 집회 금지 | “눈썹에 불이 붙은 것처럼” 다급한 탁지부 | 러시아·일본·미국공사의 보고 1898년 일본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인정한 러시아 | 양자강 연안 불할양 협정 | 독일 및 러시아의 조차 조약과 남만주지선 철도 부설권 | 일본과의 연합을 주장한 미국 해군 전략가 | 영국 식민상의 일본과의 동맹의사 | 니시-로젠 협정 | 미국 언론의 선동과 미국-스페인 전쟁 | 러시아와 영국의 철도 건설 상호 인정 | ‘무술변법’ | ‘무술정변’과 ‘백일유신’, 광서제 유폐 그리고 조선 | 담사동 | 강유위, ‘동아동문회’ | 영국과 일본 | 경봉철도 건설 차관계약 | 한반도 점령을 건의한 러시아 해군 제독 | 사이고 다카모리의 동상 | 세균학자 시가 기요시 1899년 대한제국 학부 예산은 세출 예산의 2.2% | 독립협회 지회 활동도 금지 | “구보나 하는 능력”의 군사들 | 주미공사 부임 거부의 변 | 프랑스공사가 보고한 관직매매 | 빈번한 법령 공포 | 무덤가 돌 장식 비용의 반도 안 되는 교육비 | 러시아 해군의 마산포 측량과 토지 매입 시도 | 대포 소리, 폭발 사고가 일어나는 경성 | 원수부 설치 | 대한철도회사 | 이승만의 탈옥과 체포 | 대한국국제와 홍범 14조 | 세금 체납을 “탄식”하는 고종 | “백성들이 …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 매일신문, 독립신문 폐간 1899년 일본 소학교 학생 346만 명, 수족관 | 의화단의 등장 | 루즈벨트 주지사의 연설 | 이토의 부국강병론 | 영국과 러시아의 철도협정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 마산포를 원한 러시아 해군 | 남만주철도 건설 시작 | 제2차 보어전쟁 | ‘대한정책의견서’와 마산포 | 프랑스의 광주만 조차 1900년 대한제국 세출 예산 616만 원 | 각종 비용 항목과 금액 | 예산의 10%가 넘는 왕실 비용 지출 내역 | 땅에 떨어진 대신의 권위 | 내장원에 진 빚을 갚으라고 탁지부를 독촉하는 고종 | 고종 폐위 쿠데타 주모자 처형 | 마산포 조차 조약 |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해나가는” 군부 | “협잡꾼들”을 보내 세금을 걷는 황실 |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절박”한 경기도 | “위란이 곧 닥칠 형세입니다” |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신하들 | 귀임한 주일공사 | 족보 위조 | 가로등 3개 점등과 파리의 지하철 1900년 일본 세계의 주요 지표 | 선거권자 자격, 공중전화, 아드레날린, ‘무사도’ | 러시아 해군대학의 전쟁 도상 훈련 | 의화단의 난, 8개국 연합군, 러시아의 만주 점령 | 제2차 문호개방 선언 | 러시아의 한반도 분할론 | ‘북청사변선후책’과 일본의 만한 교환 제의 | 일본과의 비밀조약 체결을 제의 | 대한제국의 중립국안 제의 | 일본의 대한제국 통치를 희망한 루즈벨트 | ‘국민동맹회’의 정부 압박 | 러-청 비밀협정 가조인 | 대한제국 중립화를 제의한 러시아 | 영국, 일본, 미국의 공동의 적이 된 러시아 | 독일, 함대건설법 통과 1901년 대한제국 세출 예산 907만 원 | 세출 예산의 약 20%가 황실 비용 | 일본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일공사 | 이재수의 난 | 세금의 몇 배를 거두어들이는 봉세관 | 50일 묵는 데 2만 3천여 원 지출 | ‘저주받은 인민들’ | 200년 전에 살고 있는 신하들 | 경부철도 기공식 | 법집행이 안 된다 | “세금을 받아 낼 길이 없는 지경으로” 가고 있다 | 고종의 세금 독촉 | “집들은 텅 비고 누더기를 걸친 굶주린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 “가죽을 벗겨 내고 뼈를 긁어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습니다” | 신하들의 경고 | 순빈 엄씨를 순비로 책봉 | 백성은 쉽게 사형 당했다 | 유길준의 고종 폐위 쿠데타 실패 1901년 일본 야하타 제철소 완공 | 람스도르프-양유 협의 | 가쓰라 다로와 고무라 | 영국과 일본의 교섭 시작 | 베이징 의정서 | 배상금 포기 | 외무대신의 적극적 정책 | 영국의 동맹조약 초안 | 러시아와의 협상 우선을 주장한 이토 | 초조한 영국 외무상 | 외부대신의 일본 방문 | 이토의 러시아 방문 | 일본의 수정안 제시 | 서태후의 ‘변법상유’ | 유에스스틸, 노벨상, 로이터와 특약 1902년 대한제국 “곳곳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 “오막살이를 다 뒤져내어” 가져가는 세금 | “말류의 폐단”을 걱정하는 내장원 경 | 즉위 40주년 행사 | 제2의 수도 건설 결정 | “통탄”하는 탁지부대신 | “사람마다 열 손가락은 피가 흐르고 입은 푸성귀 색깔이니” | “별다른 대책”이 없고 “나라 창고는 비어” | 행사비와 건축비에 148만 원 | 왕실 경비와 서경 공사비가 예산의 최소 25% | 제2수도 공사비에는 은화 55만 원, 수만 명 죽은 전염병 퇴치에는 “특별히 은화 3,000원” | 관우 외에 유비와 장비에게도 제사지냈다 | 지방 유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 여전히 중화사상에 잠겨 있는 1902년 10월의 대한제국 | 1년은 견딜 수 있을 것으로 본 미국공사 |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본 러시아공사들 | 굶어 죽은 백성들에 관한 기록 | 유길준과 이승만 | 군부의 실상 | 두어 달 근무한 유럽공사와 황족의 해외 유람 보고 | 권력 투쟁 | 하와이 이민 1902년 일본 무선 기술 연구, 해외 유학생 수 1만 1천여 명 | 나쓰메 소세키가 본 일본 | 청의 대규모 일본 유학생 파견 | 동사 사고 | 영일동맹 | 동맹 조약 제1조에 관한 주영 일본공사의 설명 | 일본의 지위 향상 | 프랑스, 독일, 미국의 입장 | 만주 철군 협약 | 드러난 영국의 문제점들 | 대한제국을 일본에 양도할 것을 권유한 프랑스 대통령 | 대한제국의 양도를 주장한 주한 러시아공사 | 동청철도 파괴를 주장한 참모들 1903년 대한제국 “빼돌리는 것이 열에 여덟아홉입니다” | “정승의 직책은 한갓 이름만 있고” | “결국은 나라가 망하는 화를 만들어 내니” | 최소 열두 번 사직을 청한 외부대신 | 황성신문의 우려가 현실로 | 주일공사는 공석 중 | “귀머거리에게 듣는 일을 시키고 벙어리에게 말하는 일을 시키는” | “피골이 상접하여 다 죽어” 가는 경상도 백성들 | “밥 짓는 연기도 거의 나지” 않는 전라도 | “떠돌다가 점점 죽고 말” 경기도 백성들 | “백성의 근심은 죽음보다 심한” 충청도 | 제2수도 건설 공사비에 짓눌리는 평안남도 | “흩어져 떠돌고 있는 무리가 줄을 잇고” 있는 함경도 | 제2수도 건설 공사에 추가 지출 | 청과 러시아로 “흘러 들어가는” 백성들 | 대신들의 출근 불량 | 신라왕릉 보수 요청 상소 | 백동화의 폐단 | “100리도 안 되는데 세금을 거두는 곳은 열여덟 곳” | 순비 엄씨를 황귀비로 책봉 | 이태리 총영사의 기록 | 미국 기자의 기록 | 전 러시아공사의 기록 | 러시아 민속학자의 기록 | 러시아의 경의철도 부설권 요구 | 러시아의 용암포 땅 매입과 영국, 일본 | 조차 조약 체결을 부인하는 대한제국 | 신뢰를 잃어가는 대한제국 | 경성-개성 철도공사 계약 | 일본의 개전을 바라는 황성신문 |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 | 러시아 영토로의 피신을 문의한 고종 1903년 일본 제2차 만주 철군 취소와 동청철도 완공 | 러시아 해군의 전쟁 예측 | 러시아 내 강경파의 등장 | 만주 철군을 위한 7개 항 요구 조건 | 전쟁 불사 결정과 영국공사의 보고 | 주청 러시아 무관의 강경론 | 러시아 황제의 강경책으로의 전환 | 청국 내 반청 세력 | 러시아 육군상의 일본 방문 | 개전론과 어전회의 | 대한제국을 넘겨줄 것을 건의한 주일 러시아공사 | ‘7박사 건의서’ | 알렌과 록힐의 설전 | 총리의 사직서와 원로들의 퇴장 | 주일·주청 러시아 무관들의 보고 | 일본, 러시아에 6개 조 협약안 제시 | 러시아, 만주에 극동총독부 설치 | 일본과 러시아가 거부한 대한제국의 국외 중립 제의 | 러시아의 3차 철군 거부 | 일본의 제안과 크게 다른 러시아의 1차 회답 | 일본 내 반러시아 여론 | 고다마 겐타로와 도고 헤이하치로 | 러시아의 봉천 재점령과 일본의 2차 서한 | 더욱 커지는 반러 여론 | 러시아의 2차 회답 | 환영받지 못한 고종의 특사 | 개전을 결심한 일본 총리 | 주일 러시아 무관들의 보고 | 일본의 3차 서한 | 대한제국과 ‘보호 조약’ 체결 방침 확정 | 영국의 엄정중립 |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 포드자동차, 퀴리, 라이트 형제, 등대, 회전목마 1904년 대한제국 불안한 서울 민심 | 파천에 실패한 고종 | “어찌 야만인이라 하지 않겠는가” | 중립 선언 | 러일전쟁 발발과 황성신문 | 한일의정서 | 이때 일본의 피보호국이 되었다 | 한일협정서 | 백성들이 “구렁과 골짜기에 나뒹굴 상황”의 함경도 | “민력이 이미 고갈”된 평안도 | “도탄에 빠진” 황해도와 “이산하는 실상”이 심각한 강원도 | “소요”와 “유랑”이 계속되는 경상도 | “약탈”과 “민란”의 충청남도와 “탄식”과 “기근”의 전라도 | 신하들에게 탓을 돌리는 고종 | “조석도 보전할 수 없을 만큼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 | “나라의 비용을 소모하여 해악을 끼치는 자들에 불과할 뿐입니다” | 외교를 담당할 인재가 없다 | 파산 상태임을 알리는 탁지부대신들 | 부정부패와 “착취”가 일상임을 알리는 내부대신들 | 인재 육성이 없었다는 학부대신 | 1904년의 대한제국 | “오늘날 폐하의 백성들이 불쌍하고 가엽지 않습니까?” | 권한이 없는 의정부 | “폐하의 것”, “폐하만이 부유해질 리가 있겠습니까?” | “신의 허리가 작두에 잘려도 … 신의 목이 도끼에 찍혀도” | “장기짝”처럼 교체되는 대신들 | 내시, 점쟁이, 무당을 가까이 한 고종 | 직급이 낮다고 면박당한 상소 |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망하게 한 다음에야 남이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 “폐하가 과연 무엇을 믿고서 두려워하지 않는가를 모르겠습니다” | 손병희 | “자신만이 현명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다” | “성인군자의 학문에만 갇혀” 산 중국 사대부 | 두 명의 장례 비용이 예산의 최소 10% | “항상 그랬듯이 이 사람들은 주인이 하나 있어야 합니다” | 실패한 의정부 중심의 국정 운영 시도 | 경운궁 화재 | 근무 기강을 질책한 고종 | “비옥한 땅을 그대로 버려두고 있습니다” | 해외 공관원들 철수 | 《독립정신》 서문 | 일진회에 대한 《매천야록》의 기록 | 민란 | 동학도 소탕을 명하는 고종 | 고위관리들의 도박 | “이 변고는 10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축적되어 형성된 것” 1904년 일본 미국과 독일의 중립 선언 | 주일 러시아공사의 본국 건의 | 주일 미국공사와 러시아무관의 보고 | 러시아와 일본의 마지막 교신 | 러시아, 영국과 프랑스에 중재 요청 | 일본, 개전 결정 | 여순 공격과 선전포고 | 외채 발행에 실패하면 일본은 붕괴된다 | 에드워드 7세와 시프 | 목표의 8배의 외채 발행에 성공 | 루즈벨트와 미국인의 일본에 대한 인식 | 영불협정 | 일본의 승전을 바라는 중국 신문들 | 대한제국을 ‘피보호국’으로 삼는다 | 루즈벨트의 강화조건과 독일 황제 | 고무라의 12개 조 강화 조건 | 요양전투 | 미국의 ‘한일협정서’ 인정 | 영국의 러시아 함대 견제 | 도거 뱅크 사건 | 러시아 민심과 레닌의 러일전쟁 비판 | 여순전투 | 물리학자 나가오카 한타로 | 미쓰코시 백화점 1905년 대한제국 1월, “썩은 밧줄에 매달린 것 같고” | 2월, “언제 망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 3월, “팔짱을 끼고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 4월, “강제로 빼앗고 토색질을 감행하여” | 5월, “나라의 운명이 안착할 곳이 어디가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 8월, “이는 바로 외국에서 말하는 무정부라는 것입니다” | 외국 공사들이 본 대한제국의 무정부 상태 | 한날에 올라온 4부 대신들과 협판들의 사직상소 | 경무사의 사직상소 | “집들은 모두 텅” 빈 함경도 | “물 없는 연못에서 몸부림치는 물고기” 같은 평안남도 백성들 | “구렁텅이에서 죽어” 나뒹구는 황해도와 다스리기 번거로운 강원도 | 도둑이 극성인 충청남도와 “이미 구제할 수도” 없는 경상남도 | 경부선 개통 | 일본군을 위문하고 온 위문사와 특파대사 | 러시아 황제에게 밀서를 보낸 고종 | 신하를 비난하는 고종 | 신하들의 고언 | 루즈벨트 딸의 방문 | 영일동맹 조약 내용에 항의한 외부대신 | 의병 소탕 명령 | 450년 전에 사는 신하들 | 이토 도착 5일 전 대한제국 궁궐 내부의 실상 | ‘한일협상조약’ 초안 | ‘한일협상조약’ 체결 | 을사조약 비판 상소 | 외국공사관의 철수 | 민영환과 조병세의 자결 | 해외 공사관 폐쇄 | 1906년 세출 예산 796만 원 |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주기를 상소한 다섯 대신 | 고종이 신하들에게 책임을 전가한 사례들 |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충청남도 관찰사의 사직상소 | 알렌, “너무도 오랫동안 무사안일의 세월을 보냈다” |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이다 1905년 일본 대학의 독립과 학문의 자유 | 여순 전투 | 프랑스 무관의 러시아 해군 평가 | 피의 일요일 사건 | 대한제국 병합 의사 표명 | 독도 편입 | 봉천전투 | 비테, 대한제국 양여 등 종전 조건 제시 | ‘한국보호권확립’ 통과 | 중국신문, 일본의 승전을 기원 | 강화 조건과 제2차 일영동맹안 | 일본의 쓰시마해전 승전과 강화 협정 중재 요청 | 러시아 내 시위와 유혈 사태 | ‘중국혁명동맹회’, 일본과의 연대를 중요시 | 이승만의 석방과 미국 파견 | 주한 영국총영사, 일본의 대한제국 통치를 건의 | 미육군장관의 일본 방문 | 강화 협상 시작 | 제2차 영일동맹 | 전쟁의 인적·물적 손실 |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고종의 밀서 |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 | 분노에 찬 일본 여론 | 루즈벨트와 고무라의 회담 | ‘만한시설강령’ | 영국,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에 지지 표명 | ‘10월 선언’ | 로마노프왕조의 최후와 조선왕조 | 기아선상에 놓인 주미공사관원들 | 보호 조약 체결에 관한 고무라의 구상 | 만주 철병과 철도 인도 | 을사조약 체결 사실을 해외에 통보 |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 이론 발표 책을 마치며 주석 2권 참고 자료 리스트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