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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만의 귀향 : 홋카이도 강제 노동 희생자 유골 귀환의 기록 (1회 대출)

자료유형
단행본
개인저자
殿平善彦, 1945- 지상, 智相, 역
서명 / 저자사항
70년 만의 귀향 : 홋카이도 강제 노동 희생자 유골 귀환의 기록 / 도노히라 요시히코 지음 ; 지상 옮김
발행사항
서울 :   후마니타스,   2021  
형태사항
344 p. : 삽화 ; 22 cm
원표제
遺骨 : 語りかける命の痕跡
ISBN
9788964373811
서지주기
참고문헌(p. 338-339)과 색인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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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5 ▼a KLPA

소장정보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중앙도서관/제2자료실(3층)/ 청구기호 331.11730952 2021 등록번호 111852416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컨텐츠정보

책소개

일제강점기에 홋카이도로 강제 연행되어 노동했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 묻혀 있던 사람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그들을 찾아내 고향에 돌려보내려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전공투 시대 직전 일본 교토의 류코쿠 대학을 다니며, 전쟁에 협력했던 불교인과 기독교인의 참회와 평화를 바라며 출발한 종교인 평화운동을 접했다. 학생 시절부터 원자.수소폭탄 금지 운동 및 야스쿠니신사 문제에 몰두한 경험은, 이후 고향에 돌아가 홋카이도의 큰 사찰인 이치조사(일승사)의 주지이자 명망 있는 스님이 된 뒤에도 사회 현실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길을 걷게 했다.

‘일본 안의 식민지’라고 불리는 홋카이도 원주민이 겪는 고통, 일본 사회에서 재일코리안이 맞닥뜨리는 차별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괴로워하던 청년이자, ‘장례를 집전하며 망자를 떠나보내는 일을 하는’ 승려이기도 한 그가 떠나지 못한 망자를 만난 뒤에 선택한 길은, 유족을 찾아 ‘못다 치른 추도’를 마무리하겠다는 결심, 그리고 유족을 만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태어나 자란 고향땅에 유골을 돌려보내겠다는 다짐이었다.

“아버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일제강점기에 홋카이도로 강제 연행되어 노동했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 묻혀 있던 사람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그들을 찾아내 고향에 돌려보내려 애쓴 사람들의 이야기

“홋카이도에는 다코베야라고 불리는, 감금 노동을 강요한 노동 현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조선인들과 함께 일본인 노동자들 다수가 강제 노동 끝에 사망했다. 전후의 일본 사회는 이 희생자들을 간과해 왔다. 슈마리나이의 오래된 사원에 남겨진 위패는 과거를 전해 주는 표식이었다. 유골을 ‘발굴’한다는, 말 그대로 과거를 꺼내는 일을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에 모인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이 시작했고, 그 뒤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이어 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었지만, 끊임없이 과거와 마주하고자 노력함으로써 국경을 초월해 인간관계가 확대된다는 것을 배웠다.”
_저자의 말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화해가 가능한가? 도노히라 스님은 홋카이도 산속에 묻혀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 강제 노동 희생자들과 한국과 일본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만나게 했다. 함께 유골을 발굴하며, 우리는 역사적 상처를 더듬어 치유하는 법을 배웠다. 진실은 진정한 화해와 우정의 출발점이다.”
_정병호(한양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인류학)

“70년 만의 귀향. 제목만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일제 때 끌려가 무주고혼으로 떠돌던 우리 동포들, 우리조차 무심했던 그분들을 고향으로 모셔 와준 도노히라 스님.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을, 이 나라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 주어 부끄럽고, 미안하고, 감사드린다.”
_명진(평화의길 이사장)

1. 화해와 우정의 길을 여는 한 삽의 흙

“‘절에 위패가 많이 있어요.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어요. 방치하기도 그렇고, 좀 봐주었으면 해요.’라고 다나카 후미코 할머니가 말했다. 위패에 쓰인 사망 연월일은 1935년부터 1945년까지 10년간이 대부분이었다. 1931년에 시작해 15년간 계속된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망자들의 위패인 것이다. [슈마리나이댐] 전망대 콘크리트 위령비에 적혀 있던 ‘순직자’라는 글자가 뇌리를 스친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댐에서 가장 가까운 절이다. 방금 전에 본 댐이 전쟁 때 건설되었다면 이 위패는 공사 희생자의 것이 아닐까.”
_본문 89쪽

1976년 9월 중고차를 처음 마련한 기념으로 친구와 함께 슈마리나이댐과 주변 호숫가 드라이브를 즐기던 가을날에 일어난 작은 사건이었고, 우연한 만남이었다. 그러나 홋카이도에서도 손꼽히는 대설 지역인 슈마리나이의 고즈넉한 사찰 고켄사(광현사)에서 ‘목공 작업을 하고 남은 나무판을 겹쳐 만든 듯한’ 조잡한 위패를 만난 도노히라 요시히코의 삶은 이제 전과 같을 수 없었다.

“나는 일본 최초의 식민지인 홋카이도로 이민을 온 식민 지배인의 자손이다. 내가 소속된 국가는 아시아를 식민지로 취급하고 침략 전쟁을 이어 온 어두운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는 전쟁 직후 홋카이도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뒤이어 절을 물려받고 승려가 되었다.”
_본문 8~9쪽

“홋카이도 시골의 절에서 태어나 승려 후계에 대한 저항감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딱히 확실한 목적이 있을 리 없던 내가 대학에 들어가 선택한 것은 철학이었고, 사회과학에 관심을 갖고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_본문 49쪽

“고등학교 동창생 중에 재일코리안이 있었다. 고교 생활 3년간 매일 같은 기차를 타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학교를 다녔지만, 그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동창생 가운데 누구도 그가 조선인인지 몰랐고, 그럴 가능성조차 헤아리지 못한 채 그냥 친구로 대했다. 대학 시절 귀성하는 나와 우연히 마주친 그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는 격하게 조선인으로서의 견해를 피력하고 일본에서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잘라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자신의 출신을 숨겨 왔던 고등학교 시절 암울한 마음의 폭발이자, 조선인으로서 주체를 자각하고, 조선인을 억압하는 일본에 대한 투쟁 선언이지 않았을까. 내가 그 사실을 이해하기까지는 유골 문제와 관련된 경험과 더불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_본문 328쪽

저자는 전공투 시대 직전 일본 교토의 류코쿠 대학을 다니며, 전쟁에 협력했던 불교인과 기독교인의 참회와 평화를 바라며 출발한 종교인 평화운동을 접했다. 학생 시절부터 원자・수소폭탄 금지 운동 및 야스쿠니신사 문제에 몰두한 경험은, 이후 고향에 돌아가 홋카이도의 큰 사찰인 이치조사(일승사)의 주지이자 명망 있는 스님이 된 뒤에도 사회 현실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길을 걷게 했다. ‘일본 안의 식민지’라고 불리는 홋카이도 원주민이 겪는 고통, 일본 사회에서 재일코리안이 맞닥뜨리는 차별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괴로워하던 청년이자, ‘장례를 집전하며 망자를 떠나보내는 일을 하는’ 승려이기도 한 그가 떠나지 못한 망자를 만난 뒤에 선택한 길은, 유족을 찾아 ‘못다 치른 추도’를 마무리하겠다는 결심, 그리고 유족을 만날 수 없다면 그 사람이 태어나 자란 고향땅에 유골을 돌려보내겠다는 다짐이었다.

“빼앗긴 삶의 흔적인 유골은 강제 매장된 뒤 땅속에서의 긴 침묵에서 해방되어 잠시나마 안심할 만한 장소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중단된 망자의 장례가 재개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의 유족은 아직 찾지 못했다. 긴 장례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_본문 37쪽

“아직도 각지의 사원에 남겨진 유골들은 유족의 품에 안겨 고향 땅에 잠들 날을 꿈꾸고 있다. 우리는 남아 있는 유골들을 찾아내야 한다. 유족을 찾아, 지금까지 유골을 돌려주지 못한 것을 사죄하고, 보상을 제의하고, 정중히 추도해 고향 땅에 묻힐 때 비로소 망자는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 살아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그때야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의 책임을 다하고 장례가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망자가 지금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을까. 유족은 나이 들고 유골도 언제 흙으로 변할지 모른다. 한가하게 보낼 시간이 없다.”
_본문 331쪽

2. 망자에게 부친 편지, 유족이 보낸 답장

고켄사에서 찾아낸 ‘매・화장 인허증’에는 본적을 비롯한 희생자 정보가 적혔고, 그중 조선인 희생자 15명은 모두 현재 한국에 속하는 지역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과 일본이 국교회복을 한 지 10년 남짓에 불과해 교류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특히 한국은 군사정부가 집권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에 직접 가서 유족을 조사하는 일을 상상할 수 없었고, 한국 정부에 희생자 유족의 조사를 요청하기도 어려웠다. 그때, 다코베야 강제 노동을 겪은 재일코리안이자 저자와 뜻을 함께하며 활동한 채만진이 제안했다. “한국에 갈 수 없다면 죽은 본인에게 편지를 보내 보면 어떨까요.” 세상을 떠난 사람 앞으로 편지를 쓴다는 얄궂은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알립니다. 이번에 일본 홋카이도 주민들을 중심으로, 소라치 지방의 민중사를 조사하는 단체인 ‘소라치 민중사를 이야기하는 모임’을 통해 소라치 민중사, 특히 일본에 끌려온 조선 동포들의 역사를 조사한 결과 슈마리나이댐 공사에서 ‘○○○ 씨’가 희생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 단체로 연락해 주길 바랍니다.

연락처: 일본 홋카이도 후카가와시 다도시 일승사 소라치 민중사를 이야기하는 모임 앞”

15명 가운데 주소가 확인된 14명에게 편지를 부쳤다. 1977년 2월 18일 후카가와 우체국에서 발송되었다. 3월이 되자 한국에서 일곱 통의 답장이 도착했다. 전후 일본 정부는 물론 강제 연행을 한 기업이 공식적으로 유골을 조사하거나 반환하려는 시도가 없던 상황에서, 일본 시민들이 한국의 유족에게 편지를 보내 희생 사실을 전한 일은,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새로운 운동이 펼쳐졌음을 의미했다.

“회답서
일본 홋카이도에서 서신이 왔기에 열어 보니 부친인 김○○ 씨가 노무자로 끌려가 사망했으나 원인은 알 수 없고 그쪽 형편대로 처리되어 사체만 고국으로 운송되어 매장하고 왜정 치하라 식민지 민족이 일언반구도 할 수 없이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의 서신을 보니 대한민국으로부터 무슨 보상 제도라도 요구할 수 있는지요. 자세한 내용은 보고 들을 수도 없고, 아는 것은 수천 리 떨어진 타국에서 사망한 사실뿐이올시다. 국가가 무슨 대책이라도 수립하여 노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희생자 가나자와[김] ○○(1918년 10월 10일생. 1942년 5월 31일 사망. 당시 24세)의 아들 김××이 보낸 답장

“회답 전하옵니다.
엄동설한에 일본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수십 년 세월이 흘렀지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 알 길이 없었는데 오늘에야 편지를 받고 감격했으며, 일본에 계신 동포 여러분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메모토 씨의 가족과 친지들은 일본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 항상 염려해 주시는 덕분에 농사에 힘쓰고 있습니다.
자세히 알아봐야 할 일들이 있으면 편지를 보내 주시는 대로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일본에 계신 동포 여러분의 건강을 축복하면서 두서없는 글로 소식을 전하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소식 있기를 바랍니다.”
_희생자 우메모토[진] ○○(1923년 1월 15일생. 1943년 1월 4일 사망. 당시 20세)의 조카 진××(경상남도 ○○군)이 보낸 답장

“회답합니다.
보내 주신 소식, 잘 받아 보았습니다.
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옵고 작은아버지의 장례는 어떻게 치르셨는지요. 이곳에 사는 조카의 마음 같아서는 본적인 대한민국 충북 ○○군으로 모셔 영혼이라도 위로하고 싶습니다.
이곳 조카로서 무슨 말씀을 올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조카로서 알고 싶은 것은 작은아버지가 아이를 몇 두셨는지요.
조카인 저는 형제가 여럿이며 자녀 삼남매를 두었습니다.
이 편지를 받는 대로 답장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 알립니다.”
_희생자 박○○(1915년 5월 20일생, 1943년 7월 23일 사망. 28세)의 조카 박××이 보낸 답장

3.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어지는, 시민들의 연대와 협력

“전후 60년이 지난 홋카이도 산속에서 삽질을 하면 조선인 강제 노동 희생자의 유골이 나왔다. 눈앞에 나타난 유골은 그저 뼈라는 물체가 아니다. 60년 전 존재했던 조선인 젊은이의 목숨을 가리킨다. 그 목숨에는 아버지, 어머니, 가족이 있다. 배우자와 자식도 있었을지 모른다. 어떤 식의 강제에 의해, 어떤 경로로, 어떤 감언이설에 속아, 어떤 욕설을 들으면서 아사지노로 연행되었을까.”
_본문 39쪽

“유골은 한 번도 만져 본 적이 없어요. 저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무서워서, 화장된 유골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유골을 씻으면서 점점 유골이 친근해졌습니다. 땅 밖으로 나오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시 발굴이 있으면 반드시 참가하겠습니다.”
_본문 173쪽(1983년 유골 발굴에 참여한 고등학생의 말)

“발굴에 맞춰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에서 사망한 희생자 유족이 초대되었다. 이미 유골을 반환받은 유족이었지만 아버지가 죽은 장소에 직접 방문하기를 원했다. 부산에 사는 장××(74세)의 부친 장○○는 1942년 8월에 헌병과 면사무소 직원에게 붙들려 트럭에 실려 연행되었다. 당시 11세였던 그는 아버지의 바지를 붙잡고 ‘가지 마!’라고 소리치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아버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갑시다.’”
_본문 37~38쪽

한 삽의 흙으로는 부족했다. 저자는 함께할 사람을 수소문했고, 소식을 듣고 나선 이들이 힘을 보탰다. 슈마리나이댐 공사 현장에서 일했거나 노동 실태를 목격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유골이 매장된 땅의 소유주와 마을 주민들은 발굴을 허락했다. 홋카이도 곳곳의 고등학생들이 발굴에 참여해 1980년부터 4년에 걸쳐 유골 16구를 지상으로 인도했다. 일본 정토진종 사원에서 포교하던, 일면식도 없는 한국인 승려 효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해 1982년 10월 한국에 와서 유족을 만났다. 강제 연행 및 강제 노동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조계종 승려 남현과의 만남을 계기로 1992년에는 유족이 확인된 유골 2구를 천안 망향의동산에 안장했다. 소라치 민중사강좌 회원들은 고켄사를 사사노보효 전시관(유골 발굴 및 조선인 강제 연행 등의 역사 전시)으로 탈바꿈했다.
저자와 한국의 정병호 교수, 오사카의 재일 교포 김광민 활동가가 제안한 ‘강제 노동 희생자 유골 발굴 한일 공동 워크숍’(이후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이 결성되면서 13년 만에 발굴이 재개되었다. 1997년 한여름 홋카이도에서 한국과 일본, 재일코리안 젊은이들이 어우러졌고, 함께 땀을 흘렸고, 치열하게 다투고 뜨겁게 화해했다. 출토된 유골 앞에서 과거 식민 지배와 그에 따른 지금의 한일・북일 관계, 재일코리안의 존재를 실감하며 그 의미를 나눴다. 정부 차원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었을지 모르지만, 시민들은 협력과 우정의 교류를 이어 왔다.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모여 흙을 다지자, 살아 있는 사람도 세상을 떠난 사람도 기댈 만한 둔덕이 만들어졌다.

“일정이 끝나기 전날, 유골 발굴 현장의 기억을 계승하기 위해 산소를 만들기로 했다. 한국, 재일코리안, 일본의 젊은이들이 달빛 아래에서 발굴 현장에 큰 산소를 만드는 작업을 했는데, 밤늦게 한국식 산소가 완성되었다. 묘 앞에는 일본식 묘표를 세웠다. 워크숍에 참가한 젊은이들이 함께 만든 산소는 희생자를 추도하는 기념물이 되었다.”
_본문 231쪽

4. 70년 만의 귀향

“발굴 참여자들이 만나는 것은 그저 희생자라든가, 식민 지배의 결과라는 식의 추상화된 개념이 아니다. 땅속에서 나온 그 유골을 눈앞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는 유골이 지탱해 온 삶과 대면하는 체험이다. 유골을 손에 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상상력이 있다면 유골 저편에 있는, 친했던 것과의 이별, 그리고 희생자와 재회할 날을 기다려 온 유족의 존재가 보일 것이다. 유골을 유족에게 전하는 일이, 유골을 발굴한 인연으로 맺어진 만남의 역할이며 책무임을 자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_본문 44쪽

“2013년 여름, 슈마리나이에서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과 함께] 밤을 밝히며 이야기한 기억이 떠올랐다. 장례 행렬을 만들어 일본열도를 종단하는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면 70년 전 조선에서 강제 동원된 젊은이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열차나 배를 갈아타면서 홋카이도까지 연행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여정을 거꾸로 해 70년 만에 유골이 홋카이도에서 한국으로 향한다. 전세 버스를 타고 육로를 달려, 숙박하는 각지에서 추도 법요식을 연다. 시모노세키부터는 페리로 부산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계획을 세웠다.”
_본문 316쪽

“유골 115구를 봉환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과 한국의 시민들이 공동으로 시도해 일군 화해의 일환이다. 정부가 방치하고 있는 동아시아 화해의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이, 국경을 초월한 연대를 통해 지속되어야 한다.”
_본문 322쪽

“1976년 가을, 슈마리나이 광현사를 방문해 망자의 위패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생사의 드라마는, 37년간 계속되어 유골과의 만남이 이어졌다. 지금도 슈마리나이 구 광현사(사사노보효 전시관) 봉안당에는 희생자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_본문 323쪽

그 뒤로도 유족이 확인된 유골이 한국에 봉환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한국 출신 강제 노동 희생자라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는 신원 불명 유골이었다. 그 115구는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의 일본・한국・재일코리안 젊은이들이 오랫동안 함께 조사하고 발굴한 유골이기도 했다. 자신의 손으로 유골을 유족에게, 고향에 돌려보내는 것은 발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책임이자 바람이었다. 노력 끝에, 광복 70주년이기도 했던 2015년 9월 ‘70년 만의 귀향’이 이루어졌다(http://return2015.com/). 저자는 2013년 출간된 원작에는 담지 못한 이 과정의 이야기를 한국어판에 새롭게 추가했다.


정보제공 : Aladin

저자소개

도노히라 요시히코(지은이)

1945년 일본 홋카이도 후카가와에서 태어나 류코쿠 대학을 졸업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를 수료했다. 정토진종(浄土真宗) 본원사파(本願寺派) 일승사 주지이다. ‘소라치 민중사강좌’ 대표,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 포럼’ 공동대표, 대한민국 총리실 산하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해외 자문위원, NPO 법인 ‘동아시아 시민네트워크’ 대표로 있다. 저서로 『念仏の鼓動: アイヌ問題, カンボジア問題など』, 『若者たちの東アジア宣言』, 『[東アジア] 日本が問われていること』(공저), 『真宗と社会』(공저), 『クッキ物語』 등이 있다.

지상(옮긴이)

정토진종 본원사파 승려이다. 사이버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학부를 졸업했다.

정보제공 : Aladin

목차

들어가며 7

1장. 유골은 말한다 15
2장. 민중사로의 발걸음 47
3장. 유족을 찾아서 113
4장. 유골을 유족 품으로 175
5장. 홋카이도에 남겨진 유골들 235
6장. 역사의 망각을 넘어서 277

나가며 332

참고문헌 338
찾아보기 340

관련분야 신착자료

Borjas, George J. (2021)
국민연금공단. 국민연금연구원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