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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관련 프랑스외무부 자료

한국전쟁 관련 프랑스외무부 자료

자료유형
단행본
개인저자
이지순, 역 박규현, 역 김영, 역
서명 / 저자사항
한국전쟁 관련 프랑스외무부 자료 / 이지순, 박규현, 김영 옮김
발행사항
서울 :   선인,   2021  
형태사항
6책 ; 24 cm
총서사항
성균관대학교 프랑스어권문화융합연구소 한불외교자료총서 ;04-09
ISBN
9791160684506 (v.1) 9791160684513 (v.2) 9791160684520 (v.3) 9791160684537 (v.4) 9791160684544 (v.5) 9791160684551 (v.6) 9791160684490 (세트)
일반주기
색인과 해제수록  
내용주기
v.1. 1950.6.25~1950.12.29 (690 p.) -- v.2. 1951.01.01~1951.05.31 (777 p.) -- v.3. 1951.06.01~1951.12.30 (783 p.) -- v.4. 1952.01.01~1952.06.30 (548 p.) -- v.5. 1952.07.01~1952.12.31 (485 p.) -- v.6. 1953.01.06~1953.07.31, 장관실문서(1950.06.25~1952.12.10) (852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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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a 본 저서는 한국학진흥사업단의 토대연구지원사업에 의해 수행되었음 ▼g (AKS-2016-KFR-122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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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정보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953.0723 2021z1 1 등록번호 111847715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2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953.0723 2021z1 5 등록번호 111847719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3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953.0723 2021z1 3 등록번호 111847717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4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953.0723 2021z1 6 등록번호 111847720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5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953.0723 2021z1 4 등록번호 111847718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6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953.0723 2021z1 2 등록번호 111847716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컨텐츠정보

책소개

한국전쟁은 냉전문제에 관련된 대표적인 전쟁이다. 또 한편으로는 탈냉전의 문제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복합적 국제관계 상황에서 프랑스 자료들은 향후 한국전쟁을 비롯한 냉전과 탈냉전 연구에서 무척 중요하다. 프랑스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거나 미국의 발표에 따라 정보를 수집했음에도 미국과 항상 동일한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독립적인 시각을 견지했다. 이러한 까닭에 프랑스의 한국전쟁 자료는 한국전쟁의 단면을 다각도에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이 자료집이 담고 있는 외교문서를 보면 휴전협상의 과정이 미국의 입장이 유엔에서 관철되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유엔 총회나 휴전회담 전개 과정에서 프랑스가 반드시 미국과 보조를 맞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달리 말하면, 제2차세계대전 이후 달라진 미국의 위상이 절대적으로 반영되기는 하지만 프랑스 또한 유엔에서 자국의 입장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직접 휴전협상국은 아니었으나 각국에 파견된 외교관들을 통해 포로가 된 프랑스 포로들의 귀환을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는 한반도보다는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반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기 종전을 내세우며 미국과는 다른 입장에서 휴전협상을 인식했고, 프랑스외무부 자료에서는 이러한 프랑스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냉전문제에 관련된 대표적인 전쟁이다. 또 한편으로는 탈냉전의 문제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복합적 국제관계 상황에서 프랑스 자료들은 향후 한국전쟁을 비롯한 냉전과 탈냉전 연구에서 무척 중요하다. 프랑스는 미국과 보조를 맞추거나 미국의 발표에 따라 정보를 수집했음에도 미국과 항상 동일한 입장을 취한 것이 아니라 자국의 독립적인 시각을 견지했다. 이러한 까닭에 프랑스의 한국전쟁 자료는 한국전쟁의 단면을 다각도에서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본 자료집이 담고 있는 외교문서를 보면 휴전협상의 과정이 미국의 입장이 유엔에서 관철되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유엔 총회나 휴전회담 전개 과정에서 프랑스가 반드시 미국과 보조를 맞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달리 말하면, 제2차세계대전 이후 달라진 미국의 위상이 절대적으로 반영되기는 하지만 프랑스 또한 유엔에서 자국의 입장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직접 휴전협상국은 아니었으나 각국에 파견된 외교관들을 통해 포로가 된 프랑스 포로들의 귀환을 시도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는 한반도보다는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반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기 종전을 내세우며 미국과는 다른 입장에서 휴전협상을 인식했고, 프랑스외무부 자료에서는 이러한 프랑스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본 자료집에 실린 프랑스 자료는 미국(워싱턴)과 유엔(뉴욕), 일본, 영국, 소련에 주재한 프랑스 외교관들을 통해 수집된 정보가 주를 이루지만, 그 외에도 세계 각지의 프랑스 외교관들을 통해 수집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러한 수집 정보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가 어떠한 부분에 집중하고 있으며, 각국에서 한국전쟁의 어떠한 면이 쟁점으로 제기되고 있는가를 검토할 수 있다.


정보제공 : Aladin

저자소개

이지순(옮긴이)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메스(Metz)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20년 현재 성균관대학교 프랑스어권문화융합연구소 소장이다. 프랑스어권연구소장, 프랑스문화예술학회장, 한국퀘벡학회장 등을 지냈다. 페미니즘 문학과 문화, 20세기 여성 작가들, 문학과 영화의 조우 등 프랑스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연구들을 해왔다. 최근에는 캐나다 퀘벡 문학으로 그 영역을 넓혀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테마가 있는 프랑스 소설>, <프랑스 명작 살롱>(공저), <키워드로 풀어보는 퀘벡 이야기>(공저) 등의 저술과 <퀘벡 영화>, <방랑하는 여인> 등의 번역서가 있다. 그의 문턱 없는 강의실에서는 ‘사랑과 문학’을 테마로 한 청춘들과의 뜨거운 소통이 지금도 한창이다.

박규현(옮긴이)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으며, 파리 8대학에서 '모리스 블랑쇼에게 있어서의 광기의 글쓰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21년 현재 성균관대학교 프랑스어권문화융합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 「모리스 블랑쇼에게 있어서 광기의 글쓰기」「재난의 경험으로서의 글쓰기」「비-현전으로서의 책의 문제」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연애, 그 유혹과 욕망의 사회사> 등이 있다.

김영(옮긴이)

성균관대학교 프랑스어권문화융합연구소 선임연구원

정보제공 : Aladin

목차

[v.1]

해제

1950년 6월 25일~12월 29일

【1】 북한의 전투 개시에 대한 소식(1950.6.25)
【2】 북한 군대의 성과(1950.6.26)
【3】 6월 25일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채택된 결의안 임시 불어본(1950.6.26)
【4】 안전보장이사회(1950.6.26)
【5】 유엔 한국위원회가 6월 25일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2통의 전문(1950.6.26)
【6】 남한에 대한 총공격(1950.6.26)
【7】 공격에 대해(1950.6.26)
【8】 맥아더 장군(1950.6.26)
【9】 공산주의자들의 남한 침략(1950.6.26)
【10】 한국의 상황(1950.6.26)
【11】 한국의 상황에 대해(1950.6.27)
【12】 본에서의 한국 소식(1950.6.27)
【13】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의 전보(1950.6.27)
【14】 한국 사건에 대한 정보(1950.6.27)
【15】 일본의 상황(1950.6.27)
【16】 한국 군대 현황(1950.6.27)
【17】 1950년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서 번역문(1950.6.27)
【18】 한국전쟁(1950.6.27)
【19】 1950년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광동 언론의 발췌문
【20】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대해(1950.6.28)
【21】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대해(1950.6.28)
【22】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대해(1950.6.28)
【23】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 사태를 다루다(1950.6.28)
【24】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쇼벨 씨가 발표한 원문(1950.6.28)
【25】 도쿄에서 온 소식: 서울에 대한 정보(1950.6.28)
【26】 한국전쟁(1950.6.28)
【27】 미국의 남한 원조 결정과 미국의 전반적인 정략(1950.6.29)
【28】 미국의 남한 원조 결정과 미국의 전반적인 정략(1950.6.29)
【29】 한국전쟁과 안보리가 채택한 결의안에 대해(1950.6.29)
【30】 그로미코 씨의 성명서(1950.6.30)
【31】 소련과 중국의 입장(1950.6.30)
【32】 한국과 극동아시아에 대한 소련의 태도(1950.6.30)
【33】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 사태를 다루다(1950.6.30)
【34】 연합군 활동에 프랑스 참여 가능성에 대해(1950.6.30)
【35】 미군과 다른 유엔 회원국들의 움직임(1950.6.30)
【36】 맥아더 장군이 한국 전선을 방문(1950.6.30)
【37】 유고슬라비아 대표 한국 관련 미 정부 결정 찬성(1950.6.30)
【38】 미국 정부의 결정(1950.6.30)
【39】 한국 사태에 관한 논평에 침묵하고 있는 베오그라드 언론(1950.7.1)
【40】 한국에 관한 국제 연합의 견해(1950.7.1)
【41】 극동 아시아의 사건에 대해(1950.7.2)
【42】 한국 전선의 상황(1950.7.2)
【43】 극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상황(1950.7.3)
【44】 소련의 직접적인 한국 개입에 대해(1950.7.3)
【45】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 문제(1950.7.3)
【46】 유럽과 아시아에 관한 보고(1950.7.4)
【47】 한국의 상황(1950.7.7)
【48】 한국과 일본의 상황(1950.7.7)
【49】 한국문제(1950.7.7)
【50】 한국 사태에 관한 설문 조사 결과(1950.7.8)
【51】 한국의 군 정세(1950.7.8)
【52】 한국 사태(1950.7.8)
【53】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정책(1950.7.8)
【54】 한국문제에 관한 네덜란드 정부의 입장(1950.7.10)
【55】 한국 사태에 관한 브라질의 반응(1950.7.10)
【56】 한국 사태(1950.7.10)
【57】 미군과 한국군의 접촉에 대해(1950.7.12)
【58】 한국문제에 대한 이집트의 태도(1950.7.12)
【59】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 여론의 반응(1950.7.12)
【60】 극동 아시아 상황의 진전(1950.7.13)
【61】 3척의 구축함을 남한 방어를 위해 보내기로 결정한 캐나다(1950.7.13)
【62】 계속 공격 중인 북한군(1950.7.13)
【63】 한국 전선의 상황에 대한 뉴스(1950.7.13)
【64】 연합군의 조직과 히커슨 씨의 대화(1950.7.13)
【65】 한국전에 관해 불가리아에서 온 소식(1950.7.14)
【66】 대구로 정부를 이전한다는 결정(1950.7.14)
【67】 한국의 군사령부에 대해(1950.7.14)
【68】 이본 경이 아데나워 서기관과 가진 면담에 대해(1950.7.15)
【69】 인도 수상에게 총사령관 스탈린의 답신 메시지 전달(1950.7.15)
【70】 요시다 씨의 연설(1950.7.16)
【71】 한국 전선의 상황(1950.7.16)
【72】 한국군의 상황(1950.7.16)
【73】 한국 전투의 결과에 따른 미국의 반응(1950.7.16)
【74】 외국 정치에 관한 세미나에 대해(1950.7.17)
【75】 한국문제에 관한 국제적인 반응(1950.7.17)
【76】 서부와 동부지역의 상황(1950.7.17)
【77】 한국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의 태도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태도(1950.7.17)
【78】 뉴욕 관점에서 본 한국문제(1950.7.17)
【79】 극동 아시아 사건에 관해(1950.7.18)
【80】 한국의 군사적 상황 진전(1950.7.18)
【81】 중국과 소련의 관계(1950.7.18)
【82】 한국문제에 따른 국제 정세(1950.7.18)
【83】 한국문제에 관해 독일에서 온 소식(1950.7.19)
【84】 한국전쟁과 원자폭탄 사용(1950.7.19)
【85】 크렘린의 사고에 대한 무닌 씨의 보고(1950.7.20)
【86】 분함대가 포항에 상륙했다(1950.7.20)
【87】 한국문제에 있어서 정치적이며 군대적인 사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관점(1950.7.25)
【88】 한국전쟁(1950.7.25)
【89】 한국문제에 대한 판디트 네루의 중재(1950.7.26)
【90】 판디트 네루의 중재 시도(1950.7.27)
【91】 한국전쟁의 양상(1950.7.27)
【92】 유고슬라비아에 대해(1950.7.28)
【93】 한국의 군 상황(1950.7.28)
【94】 한국의 군 상황(1950.7.28)
【95】 한국 작전의 국제 연합군 참여(1950.7.29)
【96】 한국인을 위한 물품과 의약품 원조(1950.7.29)
【97】 전선의 상황(1950.7.30)
【98】 전선의 상황(1950.7.30)
【99】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보고(1950.7.31)
【100】 대서양과 극동아시아 정책 범위 내에서 프랑스(1950.7.31)
【101】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 사태를 다루다(1950.8.1)
【102】 미군의 상황(1950.8.1)
【103】 프랑스 군대의 한국 전투 참여 가능성(1950.8.1)
【104】 한국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소련의 의도(1950.8.3)
【105】 의사결정에 포함된 항목에 대한 논쟁(1950.8.3)
【106】 미국의 의도에 대한 두 가지 요점(1950.8.3)
【107】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해(1950.8.3)
【108】 말리크 씨가 한국에 대한 미 정책을 비판하다(1950.8.4)
【109】 남한, 북조선인민공화국, 중국 인민공화국에 대한 안보리 논의(1950.8.5)
【110】 한국문제에 대한 안전보장이사회의 토론(1950.8.5)
【111】 한국문제에 관한 위원단의 보고(1950.8.16)
【112】 안전보장이사회에 북한 대표 초청에 관해(1950.8.8)
【113】 한국문제에 대한 안전보장이사회의 토론(1950.8.5)
【114】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1950.8.8)
【114-1】 별첨 1-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
【115】 한국의 군 상황(1950.8.9)
【116】 한국문제 전체에 대한 해결 계획안(1950.8.10)
【117】 트루먼 대통령의 언론 회견(1950.8.10)
【118】 소련의 한국 침략에 대한 고발(1950.8.11)
【119】 한국문제(1950.8.16)
【120】 한국의 군 상황: 덕산동 근처에서 도강을 시도한 적군(1950.8.16)
【121】 공산주의자들의 실제에 관해(1950.8.16)
【122】 미국의 여론과 한국의 폭격(1950.8.16)
【123】 한국 내전에 대한 미국 개입에 대해(1950.8.17)
【124】 미국 내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행정부 공격(1950.8.17)
【125】 남한 왜관 지방 폭격(1950.8.17)
【126】 한국의 군 상황(1950.8.17)
【127】 서독의 안전이라는 일반적인 주제에 관한 아데나워 수상의 회견(1950.8.18)
【128】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소련의 계획 실행(1950.8.18)
【129】 한국문제에 관한 인도의 의도(1950.8.18)
【130】 한국의 상황(1950.8.18)
【131】 미 국무장관에 대한 공화당의 공격(1950.8.18)
【132】 한국문제의 차후 해결 가능성에 대해(1950.8.19)
【133】 한국문제에 있어서 남아프리카 연방(1950.8.19)
【134】 군 상황(1950.8.19)
【135】 군 부대와 한국인에 대해(1950.8.19)
【136】 8월 17일의 한국 상황(1950.8.19)
【137】 베네갈 라우 경(1950.8.20)
【138】 전보에 대한 논평(1950.8.20)
【139】 영국 정부가 보병사단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1950.8.21)
【140】 한국의 군 상황(1950.8.23)
【141】 한국의 군 상황(1950.8.24)
【142】 한국문제에 대한 드장의 전보들(1950.8.24)
【143】 미 국립심리전략위원회(1950.8.24)
【144】 로베르 슈만 외무장관님께 보내는 서신(1950.8.29)
【145】 남한에 관한 소련의 선전(1950.8.30)
【146】 미국 정책, 소련 그리고 유엔(1950.8.31)
【147】 유엔한국임시위원회 프랑스 대표의 개인 비망록
【148】 외무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연설(19501.9.1)
【149】 한국의 군 상황: 9월 1일 낙동강 전선과 남쪽지구에 대한 적군의 총공격(1950.9.2)
【150】 한국의 군 상황: 9월 3일(1950.9.3)
【151】 북한군 철수 지역에서 발견된 소련제 탄약들(1950.9.4)
【152】 한국위원회와 군 감시단에 대해(1950.9.4)
【153】 소련 대표의 선전 연설(1950.9.5)
【154】 한국전쟁에 대한 피어슨의 연설(1950.9.5)
【155】 북한군에 대한 워싱턴의 견해(1950.9.5)
【156】 북동지구의 위기 상황에 대해(1950.9.6)
【157】 미 공군의 공격(1950.9.7)
【158】 9월 7일의 한국 상황(1950.9.8)
【159】 9월 7일의 한국 상황(1950.9.8)
【160】 미 군정의 마산 주민 대피 명령(1950.9.9)
【161】 한국문제의 해결에 대한 조건에 대해(1950.9.9)
【162】 미군 참모본부에서 온 정보(1950.9.9)
【163】 항공 활동(1950.9.11)
【164】 9월 4일의 항공 사건에 대해(1950.9.12)
【165】 인천 부근의 상륙(1950.9.15)
【166】 미 침략자들의 형사적 책임
【167】 인천 상륙(1950.9.16)
【168】 인천 상륙(1950.9.17)
【169】 인천 상륙 작전의 조건에 대해(1950.9.17)
【170】 38선을 넘는 문제에 대해(1950.9.18)
【171】 호주 정부의 결정(1950.9.19)
【172】 9월 19일 연합군 사절단에게 제공된 정보(1950.9.19)
【173】 서울과 부산의 군 상황(1950.9.21)
【174】 9월 22일의 한국 상황(1950.9.22)
【175】 9월 23일 참모본부가 제공한 정보(1950.9.24)
【176】 군 상황(1950.9.26)
【177】 일본 주재 호주 사절단장 겸 육군 대령이 부산에 도착했다(1950.9.26)
【178】 맥아더 장군이 북한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메시지(1950.9.30)
【179】 저우언라이의 성명서
【180】 38선에 대한 맥아더 장군의 견해(1950.10.4)
【181】 맥아더 장군이 북한 정부 수반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다(1950.10.9)
【182】 10월 18일 부산에 도착한 터키군(1950.10.18)
【183】 제5연대가 19일 평양에 입성했다(1950.10.20)
【184】 한국의 군 상황(1950.10.21)
【185】 매우 혼란스러운 한국의 정치 상황(1950.10.31)
【186】 한국전에 중공군 사단의 개입(1950.11.2)
【187】 국제적십자의 한국 활동(1950.11.2)
【188】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1950.11.4)
【189】 적군의 새로운 공격(1950.11.5)
【190】 군수산업과 중국의 개입(1950.11.6)
【191】 압록강 댐에 관한 발표(1950.11.6)
【192】 한국분쟁의 확장을 조장하는 것(1950.11.6)
【193】 중국의 한국개입을 종결하는 방법(1950.11.6)
【194】 포로와 사상자 수(1950.11.6)
【195】 중국의 한국 개입에 대해(1950.11.7)
【196】 전기를 공급해주는 북한의 댐(1950.11.7)
【197】 한국문제에 관한 안보리 6, 7월 결정(1950.11.8)
【198】 미 공군의 개입 문제(1950.11.13)
【199】 한국문제에 대한 미 정부의 태도(1950.11.14)
【200】 한국문제와 유고슬라비아 상황(1950.11.15)
【201】 항공 전투(1950.11.16)
【202】 국제정세에 대한 보고(1950.11.15)
【203】 한국문제와 중국 개입으로 야기된 상황(1950.11.16)
【204】 한국의 군 상황(1950.11.16)
【205】 한국 상황의 발전에 대해(1950.11.16)
【206】 비무장지대(1950.11.17)
【207】 한국문제(월경추적권)(1950.11.17)
【208】 댐과 전력 통제에 대해(1950.11.18)
【209】 한국의 군 상황(1950.11.21)
【210】 비무장지대 설치에 관해(1950.11.20)
【211】 중립지대(1950.11.22)
【212】 유엔위원회에서 중국 문제(1950.11.22)
【213】 비무장 지대 설치에 대해(1950.11.22)
【214】 중국 사단의 개입과 한국의 군 상황(1950.11.23)
【215】 해양법의 의미에 대해(1950.11.23)
【216】 한국문제에 대한 조정안(1950.11.24)
【217】 한국의 통일과 재건을 위한 유엔위원회(1950.11.24)
【218】 미국 정부의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격 결정(1950.11.25)
【219】 소련과 중공의 관계를 바라보는 맥아더의 시각(1950.11.25)
【220】 소련과 중공의 관계를 바라보는 맥아더의 시각(1950.11.25)
【221】 맥아더와 워커 장군의 혜산진 제7사단 방문(1950.11.25)
【222】 한국의 전세와 비무장지대 구상(1950.11.25)
【223】 완충지대 한계를 정하는 안보리의 결정(1950.11.27)
【224】 한국의 민간원조(1950.11.27)
【225】 한반도의 저항선 설치에 대해(1950.11.28)
【226】 비무장지대(1950.11.29)
【227】 미국의 한국 개입(1950.11.29)
【228】 심각해진 한국의 상황(1950.11.29)
【229】 한국전쟁의 정치적 관점에 대해(1950.11.29)
【230】 맥아더 장군의 성향(1950.11.30)
【231】 소련 정부(1950.11.30)
【232】 미 국무부가 수집한 한국전쟁 정보(1950.11.30)
【233】 국제 정세(1950.12.1)
【234】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의에 대해(1950.12.1)
【235】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 대표의 연설(1950.12.1)
【236】 중공군의 활동(1950.12.1)
【237】 한국의 상황(1950.12.2)
【238】 한국에서의 원자폭탄 사용 가능성(1950.12.3)
【239】 맥아더 장군의 성명(1950.12.3)
【240】 워싱턴 회담(1950.12.4)
【241】 한국문제와 중국 공산당의 유엔 가입 가능성(1950.12.4)
【242】 한국 상황에 대한 소련 신문들의 반응(1950.12.5)
【243】 트루먼 대통령의 최근 발표에 대한 언론의 반응(1950.12.5)
【244】 ?더네이션?: 「치욕의 시간」(1950.12.5)
【245】 미국의 극동아시아 정책(1950.12.5)
【246】 외교 정책 컨퍼런스: 한국과 독일의 비교(1950.12.6)
【247】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의사 방해(1950.12.6)
【248】 한국전쟁의 확산에 대해(1950.12.6)
【249】 한국의 군 상황(1950.12.6)
【250】 한국문제에 대한 스타슨의 해결안(1950.12.6)
【251】 한국문제와 중국(1950.12.6)
【252】 한국에서의 적대행위 중지에 관해(1950.12.7)
【253】 극동아시아 사태(1950.12.8)
【254】 한국의 군 상황: 연합 저항선(1950.12.8)
【255】 맥아더 장군의 성명(1950.12.8)
【256】 한국의 휴전을 위한 중국의 조건(1950.12.11)
【257】 한국의 군 상황(1950.12.12)
【258】 서울의 분위기(1950.12.13)
【259】 한국의 일시적 휴전 조건(1950.12.14)
【260】 한국의 군사 상황(1950.12.14)
【261】 한국에서의 유엔군과 중공군의 상황(1950.12.17)
【262】 유엔군 철수 시의 영향(1950.12.21)
【263】 중공군의 대공세 예상(1950.12.22)
【264】 한국의 군사 상황(1950.12.23)
【265】 미 참모부의 적군 공격력 예상(1950.12.26)
【266】 연합군의 정찰보고 및 군사 배치(1950.12.27)
【267】 한국전쟁과 중공군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반응(1950.12.28)
【268】 중공과의 협상을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들(1950.12.28)
【269】 한국의 군사 상황(1950.12.29)
【270】 중공군의 한국 개입 주요 국면(1950.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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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

해제

1951년 1월 1일~5월 31일

【1】 중국 규탄에 대한 미 정부의 양분된 태도(1951.1.1)
【2】 한국의 전세(1951.1.1)
【3】 한국의 전세(1951.1.2)
【4】 서울 철수 성명에 따른 조치(1951.1.2)
【5】 중국 대공세와 그에 대한 조치(1951.1.2)
【6】 중국 규탄 결의안에 대한 영국의 입장(1951.1.3)
【7】 한국의 전세(1951.1.3)
【8】 중국의 공세가 전장과 각국에 미치는 영향(1951.1.3)
【9】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문제에 대한 외교적 입장(1951.1.3)
【10】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문제에 대한 각국의 입장(1951.1.4)
【11】 한국전에 대한 맥아더 장군의 견해(1951.1.4)
【12】 서울 총 퇴각의 상황(1951.1.4)
【13】 정세에 대한 불안감과 집단 조치 준비(1951.1.5)
【14】 한국전에 대한 캐나다의 입장(1951.1.5)
【15】 중국 개입에 대한 유엔 결의안 채택을 주장하는 미국의 입장(1951.1.5)
【16】 미묘한 영미 관계와 한국전쟁(1951.1.5)
【17】 중국을 침략국으로 규정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1951.1.6)
【18】 중국을 침략국으로 규정하는 문제에 대한 각국의 입장(1951.1.7)
【19】 한국의 군사 상황(1951.1.7)
【20】 한국의 군사 상황(1951.1.8)
【21】 중국 규탄에 대한 아시아와 영연방국가의 입장(1951.1.11)
【22】 특별위원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프랑스의 입장(1951.1.12)
【23】 휴전 협정에 관한 각국의 입장(1951.1.13)
【24】 연합군 철수와 중국 봉쇄안에 대한 준비(1951.1.14)
【25】 한국의 군사 상황(1951.1.14)
【26】 한국문제에 관해 각국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상황들(1951.1.15)
【27】 미국 계획에 대한 인도의 입장(1951.1.16)
【28】 미국의 한국 철수에 대한 영국의 의구심(1951.1.17)
【29】 미국 장군들의 임명과 한국 주재 유엔군(1951.1.17)
【30】 미군 인사들의 도쿄 방문(1951.1.17)
【31】 한국의 상황(1951.1.17)
【32】 수원 근방의 상황(1951.1.17)
【33】 미국의 조치에 대한 영국의 입장(1951.1.18)
【34】 한국에서의 연합군 태세(1951.1.18)
【35】 맥아더 장군의 위상 실추(1951.1.19)
【36】 한국의 상황 보고(1951.1.19)
【37】 미국에 대한 다른 국가들의 입장(1951.1.20)
【38】 미국의 주저함(1951.1.20)
【39】 베이징의 답변을 기다림(1951.1.20)
【40】 결의안의 미국 단독 발표 결정(1951.1.20)
【41】 노르웨이 정부의 관점(1951.1.20)
【42】 미 국무부의 반론(1951.1.21)
【43】 결의안의 주요 사항(1951.1.21)
【44】 프랑스의 입장 전달(1951.1.22)
【45】 캐나다와 인도의 신중한 입장(1951.1.22)
【46】 군 정보에 대한 검토(1951.1.22)
【47】 미국의 결의안 결정과 관련한 사항들(1951.1.23)
【48】 미국 결의안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입장(1951.1.23)
【49】 미국의 결의안 결정과 관련한 사항들(1951.1.24)
【50】 미국의 결의안에 대해(1951.1.24)
【51】 한국의 현재 전투 상황(1951.1.24)
【52】 한국 사태(1951.1.24)
【53】 한국의 현재 전투 상황(1951.1.25)
【54】 ?데일리헤럴드?의 사설(1951.2.1)
【55】 결의안 투표 결과에 대한 각국의 반응(1951.2.1)
【56】 영국 대표의 중재위원회 설립 제안(1951.2.1)
【57】 한국 전선의 상황(1951.2.1)
【58】 중재위원회 설립에 대한 의견 교환(1951.2.2)
【59】 저우언라이의 성명(1951.2.3)
【60】 한국 전선의 상황(1951.2.3)
【61】 한국 전선의 상황(1951.2.3)
【62】 한국 전선의 상황(1951.2.4)
【63】 유엔군의 진격과 38선에 대한 논의(1951.2.5)
【64】 유엔의 조직 상황(1951.2.5)
【65】 소련의 결의안 기각(1951.2.7)
【66】 유엔의 결의안 발표에 대한 스웨덴 정부의 입장(1951.2.8)
【67】 38선 주변의 상황(1951.2.8)
【68】 적군의 사상자 추산 및 한국 전선의 상황(1951.2.9)
【69】 한국 전선의 상황(1951.2.10)
【70】 한국에서의 군사작전에 대한 평가(1951.2.11)
【71】 한국 전선의 상황(1951.2.11)
【72】 38선 돌파에 대한 미국의 여론 분석(1951.2.12)
【73】 세계평화위원회의 베를린 개최 결정(1951.2.12)
【74】 38선 돌파에 대한 의구심(1951.2.12)
【75】 38선 돌파에 대한 의구심을 전한 ?뉴욕타임스?(1951.2.12)
【76】 한국 사태의 국면들과 38선 돌파에 대한 영국 수상의 의견 발표(1951.2.13)
【77】 맥아더 장군의 38선 돌파에 대한 의견 발표(1951.2.13)
【78】 한국 전선의 상황(1951.2.13)
【79】 미군의 원산 정박(1951.2.14)
【80】 맥아더 장군의 입장 발표(1951.2.14)
【81】 한국의 상황(1951.2.15)
【82】 38선 돌파에 대한 프랑스의 견해 전달(1951.2.1)
【83】 한국의 포로들 문제와 국제적십자(1951.2.15)
【84】 38선 돌파에 대한 영국의 입장(1951.2.16)
【85】 38선 돌파에 관한 미국 정부의 입장 설명(1951.2.16)
【86】 한국에서의 중국과 유엔군의 교전 상황과 군대의 재편(1951.2.17)
【87】 한국의 상황(1951.2.18)
【88】 2월 13일자 맥아더 장군의 성명(1951.2.18)
【88-1】 별첨 1-맥아더 장군의 성명 번역문(1951.2.13)
【89】 한국의 상황(1951.2.19)
【90】 한국의 상황(1951.2.20)
【91】 유엔의 한국에서의 행동 노선(1951.2.20)
【92】 미국 건물 근처에 떨어진 이상한 발사체에 대한 소문(1951.2.21)
【93】 38선 돌파에 대한 맥아더 장군의 의견(1951.2.21)
【94】 한국의 상황(1951.2.21)
【95】 원산 근방에서 38선 이남으로의 해군 이동(1951.2.22)
【96】 순양함 이동에서 보여준 영국의 태도(1951.2.22)
【97】 한국의 전선 상황(1951.2.23)
【98】 포트 르위스에 편입된 캐나다 군대의 한국 차출(1951.2.24)
【99】 한국 사태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공감대(1951.2.24)
【100】 한국전쟁에 대한 정보들(1951.2.25)
【101】 추가조치위원회 계획안(1951.2.26)
【102】 추가조치위원회의 초안(1951.2.26)
【103】 주중국 스웨덴대사의 중재를 통한 중국과의 협상 시도(1951.2.26)
【104】 국제적십자위원회 회장의 중국 출국(1951.2.27)
【105】 극동에서의 소련의 군사력과 중국 지원에 대해(1951.3.1)
【106】 한국군의 상황과 프랑스 대대 소식(1951.3.2)
【107】 여러 지역의 전투 상황(1951.3.3)
【108】 추가조치위원회의 보고문(1951.3.5)
【109】 한국 전선의 상황(1951.3.5)
【110】 영미 결의안의 수정(1951.3.6)
【111】 유엔군 및 북한군의 주둔지 상황(1951.3.8)
【112】 미8군의 공격에 대한 미 국방부 대표의 의견(1951.3.9)
【113】 체코 외무장관의 세계 평화 및 한국전쟁 관련 발표(1951.3.10)
【114】 공산군 부대의 이동과 저항 전선(1951.3.13)
【115】 추가조치위원회에서 미·영·불 3국의 견해(1951.3.14)
【116】 맥아더 장군의 인터뷰(1951.3.14)
【117】 언론간담회에서 리지웨이 장군의 발표(1951.3.14)
【118】 에를 코크 미국 재향군인회 사령관의 인터뷰(1951.3.14)
【119】 한국전에서 유도폭탄 사용 논의(1951.3.14)
【120】 맥아더 장군의 인터뷰가 불러온 파장들(1951.3.15)
【121】 맥아더 장군의 인터뷰가 불러온 파장들(1951.3.15)
【122】 한국 전선의 현재 상황(1951.3.16)
【123】 중국군 총사령관을 맡은 펑더화이 장군(1951.3.16)
【124】 서울 수복과 전선의 상황(1951.3.17)
【125】 프랑스 군대의 활약(1951.3.17)
【126】 리지웨이 장군이 부대 지휘관들에게 보낸 지침들(1951.3.17)
【127】 중국 정부와의 합의 가능성에 대한 소문들의 불명확성(1951.3.18)
【128】 평화감시위원회 회의 개시와 소련 대표가 제출한 결의안의 기각(1951.3.18)
【129】 평화감시위원회의 논의(1951.3.18)
【130】 한국 전선의 상황(1951.3.18)
【131】 영국과 미국이 수정한 결의안의 번역문(1951.3.19)
【132】 결의안에 대한 워싱턴 정부의 보충 설명(1951.3.19)
【133】 한국의 영국 포로들에 대한 ?데일리워커? 뉴스(1951.3.19)
【134】 38선 부근에서의 상황에 대한 논의(1951.3.20)
【135】 미국의 독가스 사용에 대한 중국 언론의 규탄(1951.3.21)
【136】 의장 성명서의 수정안 전달(1951.3.21)
【137】 의장 성명 계획안(1951.3.21)
【138】 미국과 영국의 의견 차이와 계속되는 논의들(1951.3.22)
【139】 한국 전선의 상황(1951.3.22)
【140】 휴전을 위한 북한 당국자들과의 협상 가능성(1951.3.22)
【141】 휴전을 위한 소련과의 교섭(1951.3.22)
【142】 한국 군대 상황의 보고(1951.3.22)
【143】 일본에서 미군 피습 사건(1951.3.23)
【144】 성명서 초안에 대한 프랑스의 수정 요구(1951.3.23)
【145】 한국의 상황에 대한 미국 정부의 논의(1951.3.24)
【146】 한국 사태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입장 표명(1951.3.24)
【147】 38선을 향한 유엔군과 한국군의 전진 상황(1951.3.24)
【148】 유엔군의 38선 돌파에 대한 한국 정치계의 입장(1951.3.24)
【149】 미국의 성명 발표에 대한 프랑스의 수정 요구 사항(1951.3.24)
【150】 한국 전선의 상황과 중공군의 동태(1951.3.26)
【151】 38선 돌파에 대해(1951.3.26)
【152】 맥아더 장군이 외교계에 일으킨 파문(1951.3.27)
【153】 한국 전선의 상황(1951.3.27)
【154】 맥아더 장군의 성명과 워싱턴 정부의 태도(1951.3.27)
【155】 맥아더 장군에 대한 다양한 언론의 태도(1951.3.28)
【156】 한국 사태 해결을 위한 영국 외무부의 제안에 대해(1951.3.28)
【157】 추가조치위원회의 업무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논의(1951.3.28)
【158】 유엔 추가조치위원회의 업무 계획 초안 내용(1951.3.28)
【159】 미국의 군사작전에 대한 마셜 장군의 설명(1951.3.28)
【160】 미군의 한국에서의 유독가스 사용(1951.3.28)
【161】 베이징라디오 방송의 내용(1951.3.29)
【162】 성명서에 대한 프랑스의 수정 요구(1951.3.30)
【163】 한국의 군사적 상황(1951.3.31)
【164】 딘 애치슨 국무장관과의 담화(1951.3.31)
【165】 신형 대형 헬기(1951.3.31)
【166】 소련 언론의 미국에 대한 반응(1951.4.1)
【167】 트리그브 리 유엔사무총장의 서한 계획안(1951.4.1)
【168】 트리그브 리 씨의 편지 계획안 주요 내용(1951.4.1)
【169】 이승만 대통령의 발표(1951.4.1)
【170】 맥아더 장군과 미국 정부의 관계(1951.4.2)
【171】 트리그브 리 씨의 편지 계획안에 대한 총회의장과 멕시코 대표의 의견(1951.4.3)
【172】 트루먼 대통령의 발표계획안에 대한 중재위원회 세 위원의 입장(1951.4.3)
【173】 극동담당 국무차관보의 미 정부 입장 설명(1951.4.4)
【174】 맥아더 장군의 발언(1951.4.5)
【175】 영국의 제안(1951.4.5)
【176】 추가조치위원회의 부수적 결정(1951.4.5)
【177】 미-영-프 대표단의 새로운 초안 문서(1951.4.5)
【178】 미 국무부 소련담당 과장의 답변(1951.4.6)
【179】 한국 상황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기자회견(1951.4.6)
【180】 한국문제(1951.4.6)
【181】 맥아더 장군의 3월 24일 발표 이후: 중공과 유엔(1951.4.5)
【181-1】 별첨 1-맥아더의 후안무치한 선언에 대한 세계평화중국인민위원회의 반박문
【182】 맥아더 장군의 권한에 대한 기사(1951.4.6)
【183】 미국 발표계획안에 관한 타 정부들의 견해(1951.4.7)
【184】 유엔담당 국무차관보와의 대화(1951.4.7)
【185】 한국에 수용된 영국 포로들과의 서신 교환(1951.4.6)
【186】 아시아 대표단의 중공에 대한 교섭 구성(1951.4.8)
【187】 부산 유엔묘지 낙성식(1951.4.7)
【188】 프랑스 대대의 상황(1951.4.7)
【189】 한국 전선의 상황(1951.4.8)
【190】 맥아더에 관한 영국 정부의 입장(1951.4.9)
【191】 소련과 우방국들 간의 관계에 대한 고찰(1951.4.9)
【192】 한국전쟁과 맥아더 장군(1951.4.10)
【193】 장면 국무총리의 발표(1951.4.10)
【194】 장면 국무총리의 성명문 전문(1951.4.9)
【195】 맥아더 장군에 대한 비난과 옹호(1951.4.19)
【196】 워싱턴의 성명 준비 상황(1951.4.10)
【197】 아시아 국가들의 중공과의 중재 구상(1951.4.10)
【198】 추가조치위원회의 사업계획문서(1951.4.10)
【199】 추가조치위원회의 편지계획안 검토(1951.4.10)
【200】 추가조치위원회의 편지계획안 검토(1951.4.10)
【201】 자유중국군의 개입 가능성(1951.4.10)
【202】 극동에 대한 견해차와 문제점(1951.4.10)
【203】 한국의 군사 상황(1951.4.10)
【204】 사절단장 회의(1951.4.10)
【205】 한국문제(1951.4.10)
【206】 모리슨 부총리의 발표(1951.4.11)
【207】 맥아더 장군의 해임 소식(1951.4.11)
【208】 14개국 성명계획에 대한 영국의 입장(1951.4.11)
【209】 추가조치위원회 사업계획 검토(1951.4.11)
【210】 대만 국민군의 한국 군사작전 참여 가능성(1951.4.11)
【211】 미 해군 제7함대의 전투(1951.4.11)
【212】 한국 군사작전 상황 보고(1951.4.12)
【213】 트루먼 대통령의 맥아더 장군 해임(1951.4.11)
【214】 맥아더 장군 해임과 증거 문서들(1951.4.11)
【215】 맥아더 장군 해임과 미국의 정책(1951.4.11)
【216】 맥아더 장군 교체에 대한 국무차관보의 설명(1951.4.11)
【217】 국제적십자위원회 회장의 극동 방문(1951.4.11)
【218】 추가조치위원회 사업에 관한 영국의 견해(1951.4.12)
【219】 맥아더 장군의 해임에 대한 소련의 반응(1951.4.12)
【220】 맥아더 장군 해임에 대한 대만의 반응(1951.4.12)
【221】 추가조치위원회 사업계획 승인(1951.4.12)
【222】 맥아더 장군 교체에 대한 버치어 장군의 설명(1951.4.12)
【223】 맥아더 장군 교체에 대한 국무차관보의 설명(1951.4.12)
【224】 맥아더 장군 해임에 대한 미국 국내 반응(1951.4.12)
【225】 경제적 조치를 서두르는 미국(1951.4.13)
【226】 14개국 성명의 시기에 대한 미국의 입장(1951.4.12)
【227】 한국 통일부흥위원단의 제안(1951.4.13)
【228】 맥아더 장군 교체(1951.4.13)
【229】 신의주 상공의 대대적 공중전(1951.4.13)
【230】 찰스 볼렌 씨와의 대담(1951.4.13)
【231】 맥아더 장군 교체에 대한 국무차관보의 설명(1951.4.12)
【232】 한국문제(1951.4.13)
【233】 맥아더 장군의 해임에 대한 캐나다의 반응(1951.4.14)
【234】 유엔군 배치 상황(1951.4.14)
【235】 미 항공기 중공 상공 침범 소식(1951.4.15)
【236】 공산군의 공중전 준비에 대한 정보(1951.4.15)
【237】 중공군의 병력 상황(1951.4.15)
【238】 맥아더 사건에 대한 미 정계의 입장(1951.4.15)
【239】 일본 라디오 방송 보도들(1951.4.16)
【240】 중공 라디오 정보(1951.4.1)
【241】 중공과의 교섭 제안에 대한 영국의 경향(1951.4.17)
【242】 14개국 성명에 대한 미국의 재검토 제안(1951.4.17)
【243】 미 개입 참여 위한 핀란드군 징집활동에 대한 타스통신의 보도(1951.4.17)
【244】 14개국 성명에 대한 미국의 우려 사항(1951.4.17)
【245】 영국의 공동성명계획 실천 가능성(1951.4.5)
【246】 한국의 군사적 상황(1951.4.5)
【247】 북한 정부의 메시지(1951.4.17)
【248】 중공에 대한 경제 제재(1951.4.17)
【249】 ‘조선인민공화국’ 외무상의 메시지(1951.4.18)
【250】 ‘조선인민공화국’ 외무상의 메시지(1951.4.18)
【251】 맥아더 장군에 대한 한국 언론(1951.4.18)
【252】 중국에 대한 경제 제재(1951.4.18)
【253】 맥아더 장군의 해임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입장(1951.4.19)
【254】 추가조치위원회 소위원회 2차 회의(1951.4.19)
【255】 추가조치위원회 소위원회 2차 회의(1951.4.19)
【256】 추가조치위원회 소위원회 2차 회의(1951.4.19)
【257】 맥아더 장군(1951.4.19)
【258】 맥아더 장군(1951.4.19)
【259】 애치슨 국무장관의 연설(1951.4.19)
【260】 맥아더 장군의 의회 연설(1951.4.19)
【261】 한국문제(1951.4.19)
【262】 만주의 중공 병력(1951.4.19)
【263】 맥아더 장군의 의회 연설과 미국 여론(1951.4.19)
【264】 맥아더 장군의 해임에 대한 소련의 입장(1951.4.20)
【265】 추가조치위원회에 대한 미국의 입장(1951.4.20)
【266】 미국의 극동정책에 대한 애치슨 국무장관의 연설(1951.4.20)
【267】 전선의 상황(1951.4.20)
【268】 맥아더 장군의 해임과 중국 여론(1951.4.20)
【268-1】 별첨 1-중국 ?인민일보? 사설
【269】 맥아더 장군(1951.4.19)
【270】 중공정부에 북한 외무상의 메시지 설명 요청(1951.4.21)
【271】 북한 외상 박헌영의 메시지에 대한 의견들(1951.4.21)
【272】 추가조치위원회 소집 계획(1951.4.21)
【273】 맥아더 장군의 의회 연설 중 논쟁이 되는 부분(1951.4.21)
【274】 ?뉴욕타임스?에 공개한 웨이크 섬 회담의 의사록(1951.4.21)
【275】 미 행정부와 맥아더 장군 간의 갈등 확장(1951.4.21)
【276】 4월 22일 중공-북한군의 전격적 공세(1951.4.23)
【277】 북한 메시지에 대한 베이징 정부의 평가(1951.4.24)
【278】 춘계공세 전선의 상황(1951.4.24)
【279】 소련 선전활동의 목적(1951.4.25)
【280】 엔테잠 총회의장과의 회담(1951.4.25)
【281】 한국전쟁 상황(1951.4.25)
【282】 서울의 분위기(1951.4.25)
【283】 한국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미국 인사들(1951.4.25)
【284】 인도 언론과 맥아더 장군의 해임(1951.4.25)
【285】 5월 1일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의 호소문(1951.4.26)
【286】 중국에 대한 금수조치(1951.4.25)
【287】 미 국무부의 입장(1951.4.26)
【288】 4월 22일 중공-북한군의 전격적 공세(1951.4.23)
【289】 동독과 소련에 관한 소문(1951.4.26)
【290】 ?뉴욕타임스? 속보에 대한 해명(1951.4.26)
【291】 중공-북한 공세 이후 피해상황과 적의 전투대형(1951.4.27)
【292】 한국 군사 상황에 관한 미 국방부의 정보(1951.4.27)
【293】 맥아더 장군의 시카고 연설(1951.4.27)
【294】 한국전쟁에 공헌한 뉴욕 주재 대표국가들에 파견된 한국친선사절단(1951.4.27)
【295】 미국 여론과 맥아더 장군(1951.4.27)
【296】 중공에 관한 핀란드 외교관의 기밀정보(1951.4.28)
【297】 한국 전선의 상황(1951.4.29)
【298】 중재위원회에 대한 미 국무부의 통지(1951.5.1)
【299】 한국 전선의 상황(1951.5.1)
【300】 미국의 태도와 영국의 입장(1951.5.3)
【301】 한국 전선의 상황(1951.4.2)
【302】 맥아더 장군 해임에 관한 미 의회청문회 직전 분위기(1951.5.2)
【303】 웨더마이어 장군의 보고서(1951.5.2)
【304】 맥아더 장군의 의회 청문회 전날(1951.5.2)
【305】 맥아더 장군의 의회 청문회 전날(1951.5.2)
【306】 맥아더 사건에 대한 캐나다의 판단(1951.5.2)
【307】 미 유엔대표에 내린 워싱턴의 강경한 지시(1951.5.3)
【308】 맥아더 장군의 의회 청문회 증언(1951.5.2)
【309】 웨이크 섬 회담 보고서(1951.5.3)
【310】 미 대표단이 제안한 결의안(1951.5.4)
【311】 미 정부의 공식입장에 대한 ?뉴욕타임스? 사설 분석(1951.5.4)
【312】 영국의 중국 수출(1951.5.4)
【313】 영국의 중국수출금지 물품 목록 제안(1951.5.5)
【314】 추가조치위원회에서의 미국 발표(1951.5.5)
【315】 추가조치위원회에서의 호주 및 타 국가들의 발표(1951.5.5)
【316】 맥아더 장군의 의회 청문회 증언 분석(1951.5.5)
【317】 맥아더 장군의 의회 청문회 핵심 이슈(1951.5.6)
【318】 영국의 중국에 대한 수출 통제와 홍콩 항구(1951.5.7)
【319】 영국 상무원 총재의 중국 무역 관련 발표(1951.5.8)
【320】 일본의 한국 사절단 성명(1951.5.8)
【321】 맥아더 사건에 관한 영국의 정보(1951.5.8)
【322】 맥아더 장군의 비판에 대한 미 행정부의 대응(1951.5.8)
【323】 추가조치위원회: 중국 제재(1951.5.8)
【324】 프랑스대표단의 입장 정리(1951.5.9)
【325】 한국 전선의 상황(1951.5.9)
【326】 미국과의 관계, 그리고 한국문제에 대한 캐나다의 입장(1951.5.10)
【327】 중공에 대한 영국의 수출 문제(1951.5.10)
【328】 한국 전선의 상황(1951.5.13)
【329】 변영태 한국 외무장관의 워싱턴 방문(1951.5.15)
【330】 브래들리 장군의 청문회(1951.5.15)
【331】 중국 공산당에 대한 정보(1951.5.13)
【332】 중국 경제 제재에 대한 인도의 입장(1951.5.16)
【333】 중공에 대한 영국의 수출(1951.5.17)
【334】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과 중공의 입장 관련 소문(1951.5.18)
【335】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당면 과제(1951.5.18)
【336】 브래들리 장군의 청문회(1951.5.18)
【337】 맥아더 해임에 대한 상원의 조사(1951.5.18)
【338】 적대행위의 중단 권고 결의에 대한 소련의 태도(1951.5.19)
【339】 리지웨이 총사령관과의 회담(1951.5.21)
【340】 한국 전선의 상황(1951.5.23)
【341】 러스크 국무차관보의 태도(1951.5.23)
【342】 유엔군의 반격(1951.5.25)
【343】 콜린스 장군의 증언(1951.5.25)
【344】 유엔 사무총장의 한국문제에 대한 입장(1951.5.26)
【345】 유엔 사무총장의 변화(1951.5.26)
【346】 반덴버그 장군의 증언(1951.5.28)
【347】 유엔 사무총장의 구상(1951.5.30)
【348】 중공 춘계공세 이후 군사 상황 정리(195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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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3]

해제

1951년 6월 1일~12월 30일

【1】 중재위원회의 해체 분위기(1951.6.1)
【2】 중재위원회의 휴전 시도(1951.6.1)
【3】 트리그브 리의 오타와 연설 요약(1951.6.1)
【4】 유엔군의 상황과 소련의 원조 정황(1951.6.2)
【5】 유엔 사무총장 특보 코디어 씨의 도쿄 방문(1951.6.2)
【6】 애치슨 국무장관의 국회 증언(1951.6.2)
【7】 한국전 휴전에 대한 국제 언론의 분위기와 중국의 전쟁기금 모금 운동(1951.6.5)
【8】 휴전성명서에 대한 러스크 차관보와의 대화(1951.6.5)
【9】 38선 정전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반발(1951.6.6)
【10】 38선 정전설에 대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상원 증언(1951.6.6)
【11】 38선 휴전 소문에 대한 한국 지도자들의 반응(1951.6.7)
【12】 애치슨의 상원 증언(1951.6.7)
【13】 중재위원회의 제안에 대한 미 국무부의 반대 표명(1951.6.7)
【14】 프랑스의 집단대책위원회 답변서에 대한 미 국무부의 논평(1951.6.8)
【15】 유엔군 첫 승리의 의미(1951.6.8)
【16】 휴전 성명안 방식에 대한 논의(1951.6.8)
【17】 38선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존슨 상원의원의 결의안(1951.6.8)
【17-1】 별첨 1-존슨 상원의원의 휴전 결의안 프랑스어 번역본
【18】 진군과 휴전 결정에 대한 고려 사항(1951.6.9)
【19】 말리크와 중재위원회 위원 그라프스트룀의 회담(1951.6.12)
【20】 마샬 장군의 도쿄 방문(1951.6.12)
【21】 북한 아동을 위한 모금(1951.6.12)
【22】 한국의 전투 상황(1951.6.13)
【23】 웨더마이어 장군의 국회 증언(1951.6.13)
【24】 휴전 성명안에 대한 러스크 미 국무차관보와의 회담(1951.6.13)
【25】 그로스 미 유엔대사의 추가조치위원회에 제출할 미 대표단 보고서에 대한 정보(1951.6.14)
【26】 남한군의 현실(1951.6.14)
【27】 밴 플리트 장군의 한국 상황 인터뷰(1951.6.14.)
【28】 한국전쟁의 목적에 대한 14개국 공동성명의 영국 수정안(1951.6.14)
【29】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트리그브 리가 취하는 입장(1951.6.15)
【30】 유엔사무총장의 ‘평화계획’에 대한 중재위원회 및 각국대표단의 입장(1951.6.15)
【31】 트리그브 리의 심리적 요인(1951.6.15)
【32】 한국 전선의 상황(1951.6.16)
【33】 각국의 대북, 대중국 금수조치 현황(1951.6.20)
【34】 거창사건으로 국무위원 일부 해임(1951.6.20)
【35】 휴전 가능성에 대한 마시글리의 의견(1951.6.21)
【36】 추가 파병을 호소하는 방법에 대한 미국의 견해(1951.6.21)
【37】 미 국무부의 한국 지원군 요청이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된 배경(1951.6.22)
【38】 추가 파병 호소문에 대한 미국의 입장(1951.6.23)
【39】 바 장군과 뉴랜드 의원의 국회 증원(1951.6.23)
【40】 한국에 대한 ?가제트리테레르? 기사 내용(1951.6.24)
【41】 말리크 담화에 대한 미 국무부의 반응(1951.6.24)
【42】 한국전쟁 기념일에 대한 ?보르바?의 기사(1951.6.25)
【43】 말리크 담화에 대한 영국 정부의 대처(1951.6.25)
【44】 말리크 담화의 의도에 대한 분석(1951.6.25)
【45】 소련 휴전협상 제안의 배경 분석(1951.6.25)
【46】 한국전쟁 휴전 및 세계 평화를 위한 트루먼 대통령의 담화(1951.6.25)
【47】 휴전협정에서 예상되는 어려움(1951.6.25)
【48】 말리크 선언에 대한 ?보르바?의 시각(1951.6.26)
【49】 마오쩌둥의 휴전 동의 내용을 실은 ?데일리익스프레스? 기사(1951.6.26)
【50】 중국과의 동맹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프라우다? 기사(1951.6.26)
【51】 휴전안에 대한 ?프라우다? 기사 요약(1951.6.26)
【52】 말리크 담화에 대한 유엔의 분위기(1951.6.26)
【53】 유엔 사무총장의 추가 파병 요구에 대한 노르웨이 여론(1951.6.26)
【54】 추가 파병 요청에 대한 그리스 정부 답변(1951.6.27)
【55】 한국전쟁 1주기를 맞은 중국 ?인민일보?의 논설(1951.6.27)
【56】 말리크 선언에 대한 미 정부의 입장 설명(1951.6.27)
【57】 말리크 선언에 대한 미 국무부의 복잡한 상황(1951.6.27)
【58】 휴전에 대해 소련과 중국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한 각국의 자세(1951.6.28)
【59】 영-미 정부를 비판하는 여론전(1951.6.28)
【60】 말리크와의 불확실한 회담 참여 여부에 대한 각국의 입장(1951.6.28)
【61】 말리크 담화에 대한 중국의 시선 보고(1951.6.28)
【62】 대 중국 중재 및 유엔의 휴전 성명에 대한 트리그브 리의 의견(1951.6.28)
【63】 ‘교전국’이라는 용어의 해석에 대해(1951.6.28)
【64】 휴전안에 대한 유엔 인사들의 입장(1951.6.28)
【65】 말리크 제안에 대한 미 국무부의 태도(1951.6.28)
【66】 한국 전선의 상황(1951.6.28)
【67】 16개 참전국 회의(1951.6.28)
【68】 한국 전선의 상황(1951.6.28)
【69】 애치슨 국무장관의 외무위원회 답변(1951.6.28)
【70】 휴전안에 동의하는 중국의 속내에 대한 보고(1951.6.28)
【71】 휴전안에 대한 남북한의 반응(1951.6.29)
【72】 프랑스 외무부 사무총장과 영-미 대사들의 대담(1951.6.29)
【73】 평화안에 대한 소련의 의도(1951.6.30.)
【74】 말리크 담화에 대한 중국 입장(1951.6.30)
【75】 트리그브 리가 보낸 한국전에 대한 국제기구의 입장문(1951.6.30)
【76】 한국 파병과 북대서양조약에 대한 노르웨이 의회 결정(1951.6.30)
【77】 북한군 사령관에 대한 리지웨이 장군의 회담 제의(1951.6.30)
【78】 평양라디오 방송이 전하는 휴전 조건(1951.6.30)
【79】 리지웨이 장군이 북한군사령관에게 보낼 메시지의 주요 내용(1951.6.30)
【80】 휴전 조건에 대한 남한 정부의 입장(1951.7.1)
【81】 유엔군이 구상하는 새로운 전선(1951.7.1)
【82】 리지웨이 휴전 제안에 대한 공산군의 수락 성명(1951.7.2)
【83】 리지웨이 장군의 예비 휴전회담 제안(1951.7.3)
【84】 휴전에 대한 남한의 입장(1951.7.4)
【85】 한국의 휴전 반대 시위(1951.7.4)
【86】 예비회담 개최에 대해 리지웨이와 공산군 측 사이에 오간 메시지(1951.7.5)
【87】 금수조치안에 대한 프랑스의 입장(1951.7.5)
【87-1】 별첨 1-금수조치 결의안에 대한 프랑스 조치 보고서
【87-2】 별첨 2-프랑스의 금수조치 목록
【88】 휴전회담안에 대한 소련 언론의 분석(1951.7.7)
【89】 휴전협정을 둘러싼 국제관계 역학에 대한 소련의 견해(1951.7.6)
【90】 리지웨이 장군의 3차 메시지에 대한 공산군 측의 답변(1951.7.6)
【91】 예비회담에 대한 리지웨이 장군의 4차 메시지(1951.7.6)
【92】 휴전협정에 대한 중국의 관측(1951.7.6)
【93】 리지웨이의 메시지에 대한 공산군 측 답변(1951.7.7)
【94】 예비회담 유엔 측 대표(1951.7.8)
【95】 1차 정전회담 공산 측 대표(1951.7.7)
【96】 휴전협정에 대한 폴란드 언론의 반응(1951.7.9)
【97】 러스크 국무차관보가 전하는 휴전회담을 둘러싼 분위기(1951.7.9)
【98】 회담을 대하는 소련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샤테뇨 대사의 접견(1951.7.10)
【99】 휴전협정 비준 조건에 대한 미국, 영국, 프랑스 유엔대표들의 의견 교환(1951.7.10)
【100】 휴전협정을 총괄할 유엔 기구 선택에 대한 미국, 영국, 프랑스의 입장(1951.7.10)
【101】 미 정부와 통합사령부가 생각하는 휴전의 조건(1951.7.10)
【102】 휴전회담 직전 리지웨이의 기자회견과 공산 측 대표에 대한 정보(1951.7.10)
【103】 한국 휴전 협정을 바라보는 호주의 분위기(1951.7.10)
【104】 조이 제독의 휴전회담 개회사와 회담 분위기(1951.7.11)
【105】 휴전협정의 영향에 대한 폴란드 언론의 분석(1951.7.11)
【106】 협상을 위한 유엔기구 조직에 대해(1951.7.11)
【107】 소련의 한국 휴전협상정책 분석에 관한 통신문(1951.7.11)
【108】 남일 장군과 덩화 장군의 휴전회담 개회사(1951.7.12)
【109】 휴전회담 보도를 최대한 자제하려는 소련의 분위기(1951.7.12)
【110】 휴전회담 분위기와 한국의 휴전 반대 시위(1951.7.12)
【111】 휴전회담 진행상황(1951.7.12)
【112】 협상지로 개성을 채택한 의미와 개성에 대한 설명(1951.7.12)
【113】 북한 유력인사에 대한 보고(1951.7.12)
【114】 회담 중에도 지속되는 중국의 전쟁 준비 움직임(1951.7.13)
【115】 회담 재개를 촉구하는 리지웨이 장군의 통신문(1951.7.13)
【116】 시로키 외무장관의 김엄기 북한 전권공사 환영사(1951.7.15)
【117】 미국의 휴전협상 중지에 대한 공산 측의 시각(1951.7.16)
【118】 회담구역 조건과 미국의 협상 조건(1951.7.16)
【119】 휴전 협상을 대하는 소련의 분석과 의도(1951.7.17)
【120】 분계선과 외국군 철수에 대한 휴전회담 분위기(1951.7.17)
【121】 개성회담에 관한 러스크 미 국무차관보의 보고 사항(1951.7.17)
【122】 애치슨 국무장관의 선언문(1951.7.17)
【123】 휴전협정의 유엔 비준 문제(1951.7.19)
【124】 개성회담 추이(1951.7.19)
【125】 휴전 협정 승인 절차 문제(1951.7.20)
【126】 개성회담에 대한 중국 여론의 반응(1951.7.21)
【127】 개성회담에 대한 소련 언론의 반응(1951.7.22)
【128】 남북한의 전력(戰力)과 휴전협상 중지(1951.7.22)
【129】 외국군 철수 문제로 중지된 휴전협상에 대한 전망(1951.7.22)
【130】 개성회담 추이(1951.7.24)
【131】 도쿄 최고사령부의 보고 내용(1951.7.26)
【132】 휴전협정에서 합의된 사항(1951.7.27)
【133】 회담 의제에 관한 5가지 합의 사항(1951.7.27)
【134】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치 협상에 관한 보고(1951.7.27)
【135】 개성회담에서 유엔대표단이 거둔 성과(1951.7.28)
【136】 군사분계선 문제로 지체되는 휴전회담(1951.7.30)
【137】 개성회담에 대한 북한 언론의 반응(1951.7.30)
【138】 개성회담에 관한 히커슨 미 국무차관보의 보고 사항(1951.7.30)
【139】 중국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견해차(1951.8.2)
【140】 개성회담의 추이와 예측(1951.8.2)
【141】 소련제 제트기 추락(1951.8.4)
【142】 ‘캔자스라인’에 관하여(1951.8.4)
【143】 제19차 개성회담(1951.8.5)
【144】 유엔군 장군의 성명에 대한 언론 반응((1951.8.5)
【145】 논란에 대한 최고사령부의 해명(1951.8.6)
【146】 개성회담에서 서로 다른 휴전선을 제안함(1951.8.6)
【147】 회담 지연에 대한 베이징 언론 보도(1951.8.7)
【148】 분계선 획정에 대한 유엔군 전략(1951.8.7)
【149】 회담 중단에 대한 언론 반응(1951.8.9)
【150】 소련의 한국전쟁 자금 조달(1951.8.10)
【151】 개성회담 중단 사태 분석(1951.8.10)
【152】 공산군 사령부의 답변(1951.8.10)
【153】 휴전협상에 관한 폴란드 언론 보도(1951.8.10)
【154】 휴전선 획정에 대한 미국의 입장(1951.8.10)
【155】 한국파병국대표회의 내용(1951.8.10)
【156】 난관에 봉착한 개성회담(1951.8.11)
【157】 개성회담에 관한 ?프라우다? 보도(1951.8.13)
【158】 교착 상태에 빠진 개성회담(1951.8.14)
【159】 한국 광복 6주년 기념 논평(1951.8.15)
【160】 분계선 획정을 둘러싼 대립(1951.8.15)
【161】 제21-23차 개성회담에 관한 대표단장 회의(1951.8.5)
【162】 제24-25차 개성회담에 관한 대표단장 회의(1951.8.16)
【163】 북한의 공습 위협(1951.8.19)
【164】 포로 문제(1951.8.19)
【165】 분계선 획정에 관한 언론 보도(1951.8.23)
【166】 미국 측 분계선 제안에 대한 비판 보도(1951.8.23)
【167】 개성회담 경과 예측(1951.8.23)
【168】 세 번째 휴전회담 중단 사태(1951.8.23)
【169】 회담장 폭격에 관한 조이 제독의 보고서(1951.8.23)
【170】 한국파병국대표 임시회의(1951.8.23)
【171】 개성회담 결렬 사태의 성격(1951.8.23)
【172】 사령부 보도 자료(1951.8.23)
【173】 중립지대 공습 사건에 대한 총사령부 공문(1951.8.24)
【174】 공산 측의 개성회담 중단 의도(1951.8.25)
【175】 소위 개성 폭격에 대한 공산군 서신(1951.8.25)
【176】 소위 개성 폭격에 관한 리지웨이 장군의 회신(1951.8.25)
【177】 공산 측 서신 분석(1951.8.25)
【178】 캔자스라인에 관한 제안(1951.8.25)
【179】 미 제10군단 전선 지역의 군사 충돌(1951.8.25)
【180】 개성 폭격 사건 이후 중공군 프로파간다(1951.8.27)
【181】 공산 측 답변과 언론 반응(1951.8.28)
【182】 개성 폭격 재조사 가능성(1951.8.28)
【183】 최근 사건들에 대한 분석(1951.8.28)
【184】 중국의 외교 방식과 행동 전망(1951.8.29)
【185】 미-영 공동 행보(1951.8.29)
【186】 공산군 사령부에 대한 유엔군 사령부의 답신(1951.8.29)
【187】 한국 전선의 상황(1951.8.30)
【188】 공산군과 소련의 계획(1951.8.30)
【189】 유엔군 총사령관의 군 상황 보고(1951.8.31)
【190】 유엔군의 중립지대 침범에 대한 공산군의 항의(1951.8.31)
【191】 소련 언론 반응의 의미(1951.8.31)
【192】 소련의 의도 추정에 대한 의견서 사본(1951.8.31)
【193】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앞둔 양측 사령부의 태도(1951.9.1)
【194】 개성 중립지대 침범 소식(1951.9.1)
【195】 각국 언론의 반응(1951.9.2)
【196】 ‘미국의 음모’에 관한 소련 신문 기사(1951.9.4)
【197】 한국 전선의 상황(1951.9.5)
【198】 유엔군 사령관의 전언 전문(1951.9.6)
【199】 공습 사건에 관한 소련의 통첩문(1950.9.7)
【200】 한국 전선의 상황(1951.9.7)
【201】 소련 정부의 태도(1951.9.8)
【202】 공산군의 태도 전망(1951.9.9)
【203】 미군 포로들의 전언(1951.9.11)
【204】 중공-북한 대표단 인터뷰 내용(1951.9.11)
【205】 공산군 사령부의 전보(1951.9.11)
【206】 양측 간 통신 및 한국 전선의 상황(1951.9.12)
【207】 베트남 국민대표단의 북한 방문(1951.9.15)
【208】 공산군의 개성협상 재개 제안(1951.9.20)
【209】 의장직 문제와 제6차 회의에 대한 전망(1951.9.21)
【210】 협상 재개를 제안하는 중국의 속내(1951.9.25)
【211】 양측 연락장교들의 회의 전개 상황(1951.9.25)
【212】 연락장교회의 전개에 관한 신화통신의 공식 성명(1951.9.26)
【213】 한국 전선의 상황과 개성 연락장교회의에 관해(1951.9.26)
【214】 개성 연락장교회의 제안과 한국 전선의 상황(1951.9.27)
【215】 휴전협상에 대한 공산군의 전략(1951.9.28)
【216】 미 합창의장의 한국 방문 소식(1951.9.28)
【217】 소련 언론의 반응(1951.9.29)
【218】 한국 전선의 상황(1951.9.29)
【219】 소련 언론이 밝힌 미국의 군사 계획(1951.9.30)
【220】 협상 장소 변경 문제(1951.10.3)
【221】 소련 신문에 실린 일본군 포로의 증언(1951.10.4)
【222】 소련 정부의 반응(1951.10.5)
【223】 한국전쟁의 전반적 문제들(1951.10.5)
【224】 유엔군 사령부와 일본의 입장 추정(1951.10.5)
【225】 양측 총사령관의 서신 왕래(1951.10.5)
【226】 한국전쟁에 대한 총사령관의 의견(1951.10.6)
【227】 한국 전선의 상황(1951.10.6)
【228】 한국 전선의 상황 및 합참의장의 전선 시찰 반응(1951.10.6)
【229】 공산군 사령관들의 내분(1951.10.7)
【230】 연락장교회의에 관한 공산군사령부의 전언(1951.10.8)
【231】 소련에서 커크 대사의 임무(1951.10.4)
【232】 미 대사가 국무부에 제출한 비망록(1951.10.8)
【233】 휴전협상 실패 대비 조치에 대한 영국 정부의 반응(1951.10.8)
【234】 공산군의 전언에 대한 리지웨이 장군의 회신(1951.10.9)
【235】 볼렌 미 국무부 고문의 한국 방문 소감(1951.10.9)
【236】 유엔 제출 통첩을 첨부한 공문(1951.10.9)
【236-1】 별첨 1-참전국 대표들이 유엔에 제출할 통첩
【237】 리지웨이 장군의 전언에 대한 공산군 장군들의 답신(1951.10.10)
【238】 김일성 및 펑더화이 장군의 답신 보도(1951.10.12)
【239】 양측 연락장교회의에 관한 언론 보도(1951.10.12)
【240】 미그기에 대한 미국의 평가(1951.10.12)
【241】 3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논의된 한국 상황(1951.10.12)
【242】 언론의 미 공군 중립지대 침범 소식 보도(1951.10.13)
【243】 히커슨 미 국무부 유엔담당 차관보의 연락장교회의 보고(1951.10.13)
【244】 개성 중립지대 침범 사건에 대한 리지웨이 장군의 입장 발표(1951.10.15)
【245】 한국문제에 관한 소련 언론의 보도(1951.10.16)
【246】 비신스키 소련 외무장관이 미국에 전달한 선언문(1951.10.16)
【247】 체코를 방문한 중국 대표단장의 기자회견 내용 요약(1951.10.16)
【248】 유엔군 측 전 국제적십자 대표의 한국 정보(1951.10.16)
【249】 한국에서 생포된 그리스계 포막인(1951.10.17)
【250】 연락장교회의 미합의 사항(1951.10.17)
【251】 미 국방부 대변인의 전황 개략 보고(1951.10.17)
【252】 양측 대표 회담을 위해 해결해야 할 사항(1951.10.18)
【253】 한국의 포로 문제에 관해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한 서한 내용(1951.10.18)
【254】 헝가리의 한국 원조(1951.10.18)
【255】 연락장교회의에 관한 미 국무부의 정보(1951.10.19)
【256】 10월 중순 전황(1951.10.19)
【257】 북한·소련 수교 3주년 기념 축전(1951.10.20)
【258】 연락장교회의에서 진전 사항(1951.10.20)
【259】 파병국대표회의 내용(1951.10.20)
【260】 개성·문산 중립지대에 관한 진전 사항(1951.10.20)
【261】 미합의 사항의 일부 해결 및 기타 소식(1951.10.21)
【262】 미합의 사항 해결(1951.10.22)
【263】 미합의 사항 해결(1951.10.22)
【264】 맥아더 장군의 복귀에 관한 상원 청문회 보고서(1951.10.22)
【265】 한국분쟁에 대한 소련의 입장(1951.10.26)
【266】 휴전회담에 대한 신화통신 공보(1951.10.26)
【267】 이승만 대통령의 발표(1951.10.26)
【268】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서(1951.10.26)
【269】 한국 외무부장관의 성명서(1951.10.26)
【270】 개성 휴전회담 반대 운동(1951.10.26)
【271】 판문점 휴전회담 상황(1951.10.26)
【272】 중공개입의 자체적 전체 평가(1951.10.27)
【273】 중국 주재 인도대사와의 대화(1951.10.27)
【274】 판문점 휴전회담 상황(1951.10.27)
【275】 공산군의 공군력(1951.10.30)
【276】 중공의 한국 개입 1주년에 대한 체코 외무부장관의 서한(1951.10.30)
【277】 휴전회담 재개(1951.10.30)
【277-1】 별첨 1-휴전회담 구역과 이 구역의 안전을 규명하기 위해 대표단들이 결정한 8가지 합의 사항
【277-2】 별첨 2-유엔군과 공산군 연락장교들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에 대한 5가지 부대 사항
【278】 판문점 휴전회담 상황(1951.10.27)
【279】 소련 언론(1951.11.1)
【280】 한국 휴전협상에 대한 소련 언론의 보도(1951.11.2)
【281】 양측의 휴전선 제안(1951.11.2)
【282】 판문점 휴전회담과 전방의 상황(1951.11.6)
【283】 판문점 휴전회담과 전방의 상황(1951.11.6)
【284】 판문점 휴전회담과 전방의 상황(1951.11.7)
【285】 공산 측의 분계선에 대한 유엔 제안 거부(1951.11.7)
【286】 판문점 휴전회담(1951.11.8)
【287】 한국의 군사적 상황(1951.11.8)
【288】 한국문제에 대한 딘 러스크의 연설(1951.11.8)
【289】 한국 휴전협상에 대한 소련 언론의 보도(1951.11.8)
【290】 판문점 휴전회담과 전방의 상황(1951.11.10)
【291】 한국 휴전협상에 대한 소련 언론의 보도(1951.11.12)
【292】 판문점 휴전회담 상황(1951.11.12)
【293】 판문점 휴전회담과 전방의 상황(1951.11.13)
【294】 프랑스와 소련 외무부장관들의 워싱턴 연설에 대한 평가(1951.11.19)
【295】 소련언론의 보도(1951.11.24)
【296】 판문점 휴전회담과 전방의 상황(1951.11.28)
【297】 신문의 신화통신의 공식 발표 게재(1951.12.1)
【298】 휴전협상의 난항(1951.12.1)
【299】 임시분계선(1951.12.1)
【300】 적군의 공군 활동 보고(1951.12.1)
【301】 북한의 한국에서의 연합국 군대 철수 요구와 휴전협상의 난항(1951.12.1)
【302】 신문들의 신화통신 내용 게재(1951.12.3)
【303】 휴전협상 쌍방 간의 요구와 이의 제기(1951.12.3)
【304】 휴전협정에서 북한 측 대표의 주장(1951.12.4)
【305】 공산군과 유엔군 측의 공군력 비교(1951.12.4)
【306】 공산군 측의 새로운 제안에 대한 연합국 측의 21개 질의(1951.12.4)
【307】 공산주의 측의 태도 변화에 대한 미국의 반응(1951.12.4)
【308】 공산군 측이 제안한 7개 항목 번역문 전달(1951.12.4)
【309】 12월 2일자 신화통신에 실린 공식 발표(1951.12.5)
【310】 유엔군 측의 21개 질의에 대한 공산군 측 답변 번역문(1951.12.5)
【311】 공산군 측의 답변에 대한 유엔군 측의 평가(1951.12.6)
【312】 한국 정부가 유엔에 제기한 3가지 질문(1951.12.6)
【313】 국제적십자위원회 위원장의 서한(1951.12.6)
【314】 12월 6일자 신화통신에 실린 공식 발표(1951.12.7)
【315】 휴전협상의 전개에 따른 남한 정계의 반응(1951.12.7)
【316】 휴전협상 관련 유엔대표단의 수정안(1951.12.7)
【317】 휴전협상 관련 유엔대표단의 수정안과 공산군 측의 반응(1951.12.8)
【318】 동해안과 서해안 북쪽에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는 섬들(1951.12.8)
【319】 휴전협상위원회와 중립적 조사기구(1951.12.8)
【320】 휴전협상 기간 중 군대의 교대나 군수품 및 무기의 이송에 대한 공산군 측의 반대(1951.12.9)
【321】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는 섬들에 대한 공산군 측의 계속된 반환 요구(1951.12.9)
【322】 휴전협상에서 1개 조항의 추가(1951.12.9)
【323】 신화통신에 실린 휴전협상의 상황(1951.12.10)
【324】 양측의 양보를 통한 휴전협상의 실질적 진전(1951.12.10)
【325】 휴전협상 기간 동안 유엔군 공군의 활약(1951.12.10)
【326】 신화통신에 따른 두 가지 공식 발표(1951.12.11)
【327】 삭제된 제5항과 제8항(1951.12.11)
【328】 한국의 판문점 회담에 대한 반응(1951.12.11)
【329】 언론에 실린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과 한국의 입장(1951.12.11)
【330】 전쟁 포로 관련 공산군 측의 지연 태도에 대한 반대 성명(1951.12.11)
【331】 적군의 공군력 증대(1951.12.11)
【332】 워싱턴 정부의 판문점 회담에 대한 견해(1951.12.11)
【333】 휴전협상의 진전과 전쟁 포로 문제 논의 시작(1951.12.12)
【334】 적군과 유엔군의 전투기의 피해 통계와 적군 전투기의 활동 증가(1951.12.12)
【335】 포로교환에 대한 논의와 유엔대표단의 제안들(1951.12.1)
【336】 의제 3항을 위한 공산군 측 대표단의 4개 원칙 제시(1951.12.13)
【337】 판문점 회담에 대한 한국 내에서의 시위 및 국회의장의 서한(1951.12.14)
【338】 포로교환에 있어서의 난관들(1951.12.15)
【339】 대만 외무부장관의 기자 회견 내용(1951.12.19)
【340】 북한의 공군 강화(1951.12.20)
【341】 ?뮌히너일루스트리에르테?에 실린 독일인의 한국 참전 비판 기사(1951.12.21)
【342】 공산군 측이 제출한 전쟁포로 명단의 오류 지적(1951.12.22)
【343】 휴전협상의 교착상태와 전쟁포로 문제(1951.12.25)
【344】 휴전협상 상황 보고(1951.12.26)
【345】 전쟁포로 관련한 신화통신의 공식 발표 내용(1951.12.27)
【346】 유엔대표단 측의 새로운 수정 제안(195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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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4]

해제

1952년 1월 1일~6월 30일

【1】 휴전협정을 지연시키는 양측의 조건들(1952.1.1)
【2】 한국 휴전협정과 극동 분위기에 대한 미국 내, 열강 내 다양한 시각(1952.1.1)
【3】 비행장 건설과 포로문제 협의에 대한 공산 측 입장(1952.1.2)
【4】 휴전협상 진전 상황(1952.1.2)
【5】 포로 및 민간인 교환에 대한 유엔의 제안(1952.1.3)
【6】 김일성, 펑더화이, 마오쩌둥의 신년사(1952.1.4)
【7】 설비 및 포로교환에 대한 공산 측 입장(1952.1.4)
【8】 포로교환에 대한 협정 전개 사항과 이승만의 휴전협정 반대(1952.1.4)
【9】 공산 측, 설비 및 포로교환에 대한 유엔의 입장 비판(1952.1.5)
【10】 휴전협상 진행 상황(1952.1.5)
【11】 미국이 제안한 공동성명안에 프랑스가 동의한 배경(1952.1.5)
【12】 한국에 증대된 중공군 병력(1952.1.6)
【13】 휴전협정 진행 상황(1952.1.6)
【14】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의도 분석(1952.1.8)
【15】 휴전협상 진행 상황에 대한 신화통신 통신문(1952.1.8)
【16】 정전 협상 진행 상황(1952.1.8)
【17】 휴전협상에 대한 공산 측 입장 통신문(1952.1.9)
【18】 포로교환에 관한 수정안과 양측 입장(1952.1.9)
【19】 유엔 측의 포로교환에 대한 수정안(1952.1.9)
【20】 판문점 협상에 대한 장 쇼벨의 인터뷰(1952.1.9)
【21】 미 공습을 비판하는 공산 측 언론(1952.1.10)
【22】 미 공습에 대한 공산군 측 비판 기사(1952.1.10)
【23】 협정 조항에 대한 양측의 이견(1952.1.10)
【24】 유엔 측이 보는 휴전협정 교착 상태에 대한 분석(1952.1.11)
【25】 공산군 공군력과 병력 추정(1952.1.11)
【26】 정전협상 조항에 대한 공산 측의 입장 보도문(1952.1.12)
【27】 중립국감독기구에 대한 공산 측 주장 전문(1952.1.12)
【28】 휴전협상 지연에 대한 공산 측 주장 기사문(1952.1.13)
【29】 휴전협상에 임하는 공산군의 입장에 대한 밴 플리트 장군의 보고(1952.1.14)
【30】 정전협상 이견에 대한 공산 측 주장 보도문(1952.1.15)
【31】 유엔 측 제안에 반박하는 공산 측 입장 보도문(1952.1.17)
【32】 유엔 측 제안에 반박하는 공산 측 입장 보도문(1952.1.18)
【33】 미군의 포로수용소 폭격에 대한 공산 측 주장과 조사단 파견(1952.1.18)
【34】 미국조치에 대한 영국의 입장(1952.1.19)
【35】 국제적십자위원회 방문을 허가하라는 인도의 중재(1952.1.19)
【36】 협상 지연과 공산군 대표단에 대한 발포사건(1952.1.20)
【37】 협정 지연과 유엔군의 군사력 선전(1952.1.21)
【38】 협상 지연과 적십자위원회의 접촉(1952.1.22)
【39】 휴전협상 및 성명안에 대한 분분한 의견(1952.1.22)
【40】 공산군의 전투기 주둔 위치 변경(1952.1.22)
【41】 중국 공산군 전력 분석(1952.1.24)
【42】 휴전협상 및 대표단 상황(1952.1.24)
【43】 공산군 대표단을 향한 발포사건 진상조사와 그에 대한 기사문(1952.1.26)
【44】 유엔 측의 협상 수정안 제시(1952.1.26)
【45】 미군이 추정하는 공산군의 증대된 전략자산(1952.1.26)
【46】 공산군 지역의 지도를 지니고 있던 미 포로군에 대한 보도(1952.1.27)
【47】 휴전협정 수정안 주요 내용과 유엔 측 주장(1952.1.28)
【48】 포로교환에 대한 수정안 제시(1952.1.29)
【49】 전쟁포로 수정 명단 제출(1952.1.29)
【50】 포로교환 협상 전개에 대한 공산 측 보도(1952.1.30)
【51】 휴전협정 진행 상황(1952.1.30)
【52】 미국의 야욕에 대한 공산 측 기사(1952.1.31)
【53】 휴전협정 전개 상황(1952.2.2)
【54】 한국에 보유 중인 유엔 군사 자원에 대한 미 국방부의 보고(1952.2.2)
【55】 포로 송환 논의 전개 상황에 대한 공산 측 보도(1952.2.3)
【56】 조속한 협상 체결을 원하는 영국의 입장(1952.2.5)
【57】 휴전협정 진행 상황(1952.2.5)
【58】 휴전협상 진행 상황(1952.2.7)
【59】 휴전협상 분위기와 이승만 기자회견(1952.2.8)
【60】 전황과 휴전협상 진행 상황에 대한 히커슨의 보고(1952.2.8)
【61】 휴전협상 진행 상황에 대한 신화통신 보도문(1952.2.9)
【62】 종군기자들의 은밀한 거래에 대한 위험성(1952.2.9)
【63】 휴전협정에 한국정치 문제를 제외하는 데 동의한다는 조이 제독의 답변(1952.2.10)
【64】 제6차 유엔총회와 한국문제(1952.2.11)
【65】 휴전협정을 지체시키는 문제들과 소련의 입장(1952.2.17)
【66】 종전을 위한 프랑스 포로들의 호소(1952.2.19)
【67】 중립국 지정 문제에 대한 이견(1952.2.20)
【68】 중립국 후보지 문제와 포로 및 민간인 문제를 대하는 미국에 대한 규탄 보도(1952.2.24)
【69】 거제도 학살 사건으로 미군을 비난하는 공산 측 기사(1952.2.25)
【70】 중립국 선정, 출입항 수, 포로교환에 대한 협의 진행 상황(1952.2.26)
【71】 미국의 세균전을 규탄하는 저우언라이 성명(1952.2.27)
【72】 협상 상황, 전쟁 피해규모, 중공의 전력 강화(1952.2.27)
【73】 증대된 공산군 공군 활동(1952.2.28)
【74】 중립국 지정, 출입항 수, 부대 교대, 포로 송환에 대한 협의 진척 상황(1952.2.29.)
【75】 노동당 정부의 한국 정책에 대한 애틀리의 성명(1952.2.29)
【76】 미군의 세균전에 대한 언론 보도(1952.3.2)
【77】 포로교환에 대한 합의를 거부하는 공산 측(1952.3.2)
【78】 한국에서 소련의 중립성에 대해(1952.3.3.)
【79】 미국 세균전에 대한 ?프라우다? 보도(1952.3.6)
【80】 휴전협상과 세균전에 대해 미군을 비난하는 소련 언론(1952.3.6)
【81】 휴전협상 진행 과정(1952.3.6)
【82】 휴전협상과 래드포드 장군의 동향(1952.3.7)
【83】 이승만을 비하하는 언론 기사 보고(1952.3.7)
【84】 미국 정책에 대한 존슨의 담화(1952.3.7)
【85】 포로교환과 세균전에 대한 양측의 입장(1952.3.9)
【86】 미군의 세균전을 비난하는 소련 언론 기사(1952.3.10)
【87】 전선과 휴전협정 상황 및 공산권 언론보도(1952.3.10)
【88】 세균전 대책을 위한 소련권의 의학 원조에 대한 기사(1952.3.11)
【89】 미 공격 규탄 여론을 담은 ?프라우다?(1952.3.11)
【90】 미군의 세균무기 이용에 대한 증거들(1952.3.12)
【91】 세균전 비난 작전에 대한 연합군의 입장(1952.3.12)
【92】 세균전에 대한 저우언라이의 성명(1952.3.12)
【92-1】 별첨 1-세균전에 대한 저우언라이의 성명 번역문
【93】 미국을 규탄하는 루마니아 언론들(1952.3.15)
【94】 평화수호소련위원회의 결의문(1952.3.15)
【95】 세균전을 규탄하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호소문(1952.3.15)
【96】 세균전을 진행하는 미국에 대한 반대운동과 소련의 의도에 대한 보고(1952.3.16)
【97】 미국의 휴전협상 자세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1952.3.16)
【98】 휴전협상, 포로수용소 사태, 미 범죄 규탄에 대한 상황들(1952.3.16)
【99】 세균전과 임상실험을 진행하는 미군을 규탄하는 소련 기사(1952.3.17)
【100】 미국을 규탄하는 중국에 대한 인도의 입장(1952.3.18)
【101】 휴전협정 진행 상황과 세균전에 대한 공산 측 반응(1952.3.18)
【102】 세균전에 대한 폴란드 신문 기사(1952.3.18)
【103】 휴전협정 상황과 세균전 비난에 대한 히커슨의 언론 보고(1952.3.18)
【104】 국제적십자위원회 위원장의 전보 발신(1952.3.18)
【104-1】 별첨 1-세균전 조사위원회 발족에 관한 적십자위원회 위원장 폴 뤼에게의 전보
【105】 휴전협상 전개에 대한 기사(1952.3.20)
【106】 휴전협상 진행 상황에 대한 기사(1952.3.21)
【107】 세균전에 대한 러시아정교 총주교의 항의문(1952.3.21)
【108】 휴전협상과 세균전 등 현 상황에 대한 보고(1952.3.21)
【109】 소련의 세균전 보도 상황(1952.3.23)
【110】 소련의 세균전 보도 상황(1952.3.23)
【111】 세균전을 규탄하는 논설 요약(1952.3.24)
【112】 휴전협상 상황과 휴전협정 이후의 분위기 전망(1952.3.24)
【113】 세균전 조사 분위기와 언론의 분위기(1952.3.25)
【114】 민주법률가협회 조사위원회의 증언 보도(1952.3.25)
【115】 미국과 국제적십자위원회의 공모관계를 분석한 기사(1952.3.25)
【116】 휴전협상을 지연시키는 미국의 의도에 대한 기사(1952.3.27)
【117】 세균무기 사용 조사에 대한 기사(1952.3.28)
【118】 미국에 이어 영국에게도 향하는 세균전에 대한 비난 기사(1952.3.29)
【119】 한국에서의 세균무기 사용에 대한 기사(1952.3.30)
【120】 세균전에 대한 신문 게재 내용(1952.4.4)
【121】 한국전의 전쟁 범죄에 대한 국제민주법률가협회 보고서(1952.4.11)
【122】 신화통신 기사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 트리그브 리」 요약(1952.4.11)
【123】 세균전에 대한 베이징 주재 각국 대사들의 입장에 관한 편지(1952.4.11)
【124】 휴전협상 상황(1952.4.15)
【125】 유엔에 세계보건기구 원조를 요청하는 미국대사의 편지(1952.3.25)
【126】 미 의견서를 프랑스 정부에 전달한다는 유엔 사무국의 편지(1952.3.28)
【126-1】 별첨 1-세균전에 대한 미 국무장관의 성명
【126-2】 별첨 2-국제적십자위원회 의장에게 보내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메시지
【126-3】 별첨 3-세균전 조사에 관한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발표
【126-4】 별첨 4-국제적십자위원회에 보내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답변
【127】 공산 측의 분위기에 대한 분석(1952.4.18)
【128】 휴전협상 진행 상황(1952.4.21)
【129】 포로협상에 대한 히커슨의 보고(1952.4.23)
【130】 포로교환 협의과정 보고(1952.4.25)
【131】 포로협상 진행 상황(1952.4.26)
【132】 국제적십자위원회를 비판하는 기사(1951.4.30)
【133】 휴전협상에 대한 히커슨의 국무회의 보고(1952.4.30)
【134】 리지웨이의 제안에 대한 프랑스 외무부의 분석과 답변 지시(1952.5.2)
【135】 휴전협상에 대한 미 국무회의 보고(1952.5.3)
【136】 세균전 방법을 폭로하는 기사(1952.5.5)
【137】 막연한 휴전협상과 이에 따른 한국의 불만(1952.5.7)
【138】 트루먼 대통령 성명서 내용 보고(1952.5.8)
【139】 휴전협상 성명에 대한 미 지도층과 여론의 반응(1952.5.8.)
【140】 한국전 포로교환에 대한 호주 정부의 의회 답변(1952.5.9)
【141】 세균실험 연구자의 증언 기사(1952.5.2)
【142】 한국전쟁에 대한 언론 보도(1952.5.13)
【143】 거제 포로수용소 수용소장 감금 사건에 대한 미 국무부 분위기(1952.5.13)
【144】 세균전에 대한 엔디코트 박사의 성명과 그에 대한 반응(1952.5.13)
【145】 미 측 휴전협상 자세를 비판하는 공산 측 주장에 대한 기사(1952.5.14)
【146】 포로수용소 폭동사건 및 포로문제 해결에 대한 여러 의견(1952.5.14)
【147】 포로수용소 폭동사건과 포로협상에 대한 기사 요약(1952.5.15)
【148】 포로교환 명단의 수치 변화에 대한 보고(1952.5.2)
【149】 포로수용소 폭동 사건과 휴전협상(1952.5.15)
【150】 도드 장군 억류와 석방 조건에 대한 유엔군의 입장(1952.5.15)
【151】 미 비행기의 중립구역 침범에 대한 공동 조사(1952.5.16)
【152】 거제도사건에 대한 미국 측 입장과 휴전협상 상황(1952.5.16)
【153】 공산 측의 협상 태도를 비난하는 러베트 미 국방장관 기자회견(1952.5.16)
【154】 포로 협정과 미군 행태에 대한 ?프라우다?의 보도(1952.5.17)
【155】 포로수용소 사태에 대한 양측의 태도(1952.5.18)
【156】 한국 휴전협정 과정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태국(1952.5.19)
【157】 한국전 상황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다룬 ?프라우다?의 기사(1952.5.19)
【158】 미국의 휴전협상 태도를 비난하는 ?프라우다?의 기사(1952.5.19)
【159】 미국의 포로 대우를 비난하는 ?프라우다?의 기사(1952.5.19)
【160】 미국의 공산 측에 대한 응수와 포로수용소 대책(1952.5.19)
【161】 미 대통령 특사 마이어의 한국 방문(1952.5.20)
【162】 유엔 휴전협상 대표단의 인사 이동(1952.5.21)
【163】 포로수용소 사태 및 도드 장군 납치 사건 조사 과정(1952.5.21)
【164】 거제도 사건으로 미군을 비난하는 ?프라우다?의 기사(1952.5.22)
【165】 도드 장군 석방의 배경(1952.5.22)
【166】 한국에서의 ‘머시룸 작전’에 대한 보고(1952.5.22)
【167】 포로송환에 대한 남일 장군의 발언(1952.5.23)
【168】 포로협상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비난하는 기사(1952.5.23)
【169】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 및 한국 분위기(1952.5.23)
【170】 포로 문제에 대한 미군의 대응(1952.5.23)
【171】 미국의 휴전협상 제안에 찬성하는 인도 총리(1952.5.23)
【172】 북한 구호활동에 대해 국제적십자위원회가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보내는 서신(1952.5.23)
【172-1】 별첨 1-적십자위원회의 구호물품 사용에 대한 통첩
【172-2】 별첨 2-주한 프랑스인 상황을 포함한 최근 한국 상황을 조사하겠다는 의견서
【173】 한국 휴전협상에 대한 터키의 입장(1952.5.27)
【174】 한국전황에 대한 리지웨이 장군의 미 상원군사위원회 내용(1952.5.28)
【175】 한국문제와 방한 계획에 대한 영국 수상과 국방장관의 국회 성명(1952.5.29)
【176】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계엄을 선포한 이승만의 책략(1952.5.29)
【177】 한국 포로문제 건에 대한 영국 하원 대정부질문 분위기(1952.5.2)
【178】 판문점협정에 관한 태국의 공식 견해(1952.5.29)
【179】 모스크바 노동자집회 담화문과 그에 대한 언론 보도(1952.5.30)
【180】 휴전협상과 포로수용소 상황(1952.5.30)
【181】 이승만의 계엄선포 배경 설명을 요구하는 유엔(1952.5.30)
【182】 한국전에서 적군의 공군력 변화(1952.5.30)
【183】 국제법률가위원회의 한국 현장 조사를 다룬 ?니다그? 기사(1952.5.31)
【184】 잇따라 일어나는 포로수용소 폭력 사건(1952.5.31)
【185】 남일 장군 성명을 요약한 기사(1952.6.2)
【186】 한국의 계엄선포에 대한 캐나다 견해서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1952.6.3)
【187】 유엔 휴전안에 반대하는 한국 지도층 분위기(1953.6.3)
【188】 영국 국방장관 알렉산더 방한의 목적(1952.6.4)
【189】 이승만의 국회 해산 시도에 대한 미국의 대처(1952.6.4)
【190】 영국 특사단의 극동 방문에 대해(1952.6.7)
【191】 한국 전황과 국내 상황에 대한 클라크 장군의 태도(1952.6.8)
【192】 적의 전후방 배치와 포로수용소 반란 징후(1952.6.8)
【193】 부산 정치 파동 상황(1952.6.9)
【194】 유엔위원단에 보낸 이승만의 답신과 한국 국내 상황(1952.6.9)
【195】 휴전협상에서 미국의 태도를 비난하는 기사(1952.6.10)
【196】 휴전협상을 속행할 방법에 대한 제안(1952.6.10)
【197】 김일성, 펑더화이가 클라크 장군에게 포로협상 재개를 촉구하며 보낸 편지(1952.6.10)
【198】 한국 상황에 대한 이든 외무장관의 국회 답변(1952.6.12)
【199】 포로문제 진행 상황(1952.6.12)
【200】 거제포로수용소 사태 해결과 알렉산더 방한을 대하는 미 정계(1952.6.12)
【201】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국회 간의 투쟁에 대한 분석(1952.6.12)
【202】 한국 국내 상황에 대한 뉴질랜드 정부의 입장(1952.6.13)
【203】 휴델슨 장군의 성명에 대한 여러 반응(1952.6.13)
【204】 한국전쟁 심리전에 대한 보고(1952.6.13)
【205】 북한에 대한 물자지원을 약속한 동독 총리 담화(1952.6.14)
【206】 휴전협상에서의 미국 태도를 비난하는 소련 언론(1952.6.14)
【207】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국회 문제와 미국의 대응(1952.6.14)
【208】 휴전협상과 남한 정치 상황에 대한 기사(1952.6.15)
【209】 이승만 대통령의 행위에 대한 유엔위원회 서한과 국회를 향한 이 대통령의 담화(1952.6.15)
【210】 포로문제를 다룰 위원회 구성에 대한 프랑스 외무부의 예상(1952.6.15)
【211】 미군의 한국사건 처리에 불만을 나타내는 캐나다 의견서(1952.6.16)
【212】 합동위원회 구성에 대한 프랑스의 생각(1952.6.17)
【213】 세균전 문제를 안보리에 제기한 소련의 의도에 대한 미국의 대응(1952.6.17)
【214】 세균전 조사에 대한 안보리 입장(1952.6.17)
【215】 휴전협상에 영국대표가 참여하는 것에 대한 입장들(1952.6.18)
【216】 수정안에 대한 미-영-프-소의 입장(1952.6.19)
【217】 제네바의정서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1952.6.19)
【218】 소련 결의안에 대한 3개국 열강 회의(1952.6.19)
【219】 한국 상황에 대한 견해서를 제출한 기구에 보내는 이승만의 답신(1952.6.19)
【220】 한국사태 해결에 대한 영국의 입장(1952.6.20)
【221】 중공-북한 대표단 단장의 인터뷰(1952.6.23)
【222】 세균전 조사 주체에 대한 유엔 각국의 입장 차이(1952.6.23)
【223】 한국 국내 정치 상황(1952.6.23)
【224】 네루 총리의 역할에 관심을 기울이는 영국(1952.6.24)
【225】 한국 반정부 음모 사건에 대한 재판(1952.6.24)
【226】 대학의 반정부 시위(1952.6.24)
【227】 주한 유엔군의 발전소 공격에 대한 영국 하원 대정부 질문(1952.6.25)
【228】 반정부 집회를 공권력과 폭력으로 막고 있음(1952.6.25)
【229】 포로송환 및 고지전 현황 보고(1952.6.25)
【230】 한국전쟁 2주년 기념 미국을 비난하고 한국을 응원하는 소련 언론(1952.6.26)
【231】 안보리 회의에 공산 측 대표를 참여시키는 것에 대한 입장(1952.6.26)
【232】 한국 상황과 그에 대한 미, 영, 인도의 태도에 대한 견해서(미상)
【232-1】 별첨 1-군사행동 확대에 대한 프랑스의 입장
【233】 휴전협상에 대한 남일과 인도 공산당 서기장의 성명을 다룬 언론 기사(1952.6.27)
【234】 한국 및 아시아 문제에 대한 런던 3국 회담 건(1952.6.27)
【234-1】 별첨 1-한국문제에 대한 런던 회담 보고서
【235】 압록강 폭격에 대한 덴마크 언론 보도(1952.6.28)
【236】 미국의 압록강 폭격과 휴전협상 자세를 비난하는 언론 보도(1952.6.28)
【237】 휴전협상과 공습 상황(1952.6.28)
【238】 압록강 폭격과 영국 외교 영향력에 대해 다룬 스웨덴 언론(1952.6.28)
【239】 압록강 폭격과 영국 외교에 대해 다룬 소련 기사(1952.6.30)
【240】 개헌 투표에 이르게 된 상황(1952.6.30)
【241】 한국 국내 상황에 대한 미-프 관계자 회담(195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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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5]

해제

1952년 7월 1일~12월 31일

【1】 신화통신의 미국 ‘도발’ 언급(1952.7.1)
【2】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1952.7.1)
【3】 외국대표단 통역에 대한 한국 정부의 의심(1952.7.1)
【4】 프·미·영 3국의 한국정책 협조(1952.7.1)
【5】 파니카 전 주중 인도대사와의 대담(1952.7.2)
【6】 네루 인도총리의 한국전쟁포로문제 타협 추구(1952.7.2)
【7】 안전보장이사회 회의(1952.7.2)
【8】 압록강 발전소 폭격(1952.7.3)
【9】 중공-북한군을 위한 중국 공산당 캠페인(1952.7.3)
【10】 영국 정부의 한국 상황 보고(1952.7.3)
【11】 안전보장이사회 회의(1952.7.3)
【12】 휴전협상 진행 상황(1952.7.3)
【13】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 메시지(1952.7.3)
【14】 압록강 폭격에 대한 영국 노동당의 비난 및 미 여론(1952.7.3)
【15】 남일 장군의 서한 내용에 대한 언론의 보도(1952.7.4)
【16】 세계평화평의회의 다섯 가지 목표(1952.7.4)
【17】 유엔위원단의 비공식 회의(1952.7.4)
【18】 압록강 발전소 폭격과 국무회의 보고(1952.7.4)
【19】 휴전협상의 공산 측 제안(1952.7.5)
【20】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의 정치파동(1952.7.6)
【21】 압록강 폭격(1952.7.7)
【22】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파동(1952.7.9)
【23】 휴전협정 진행에 대한 공산 측의 보도(1952.7.10)
【24】 국무회의 휴전협상 보고(1952.7.11)
【25】 휴전협정 진행에 대한 공산 측의 보도(1952.7.12)
【26】 평양 및 북의 주요기지 폭격(1952.7.14)
【27】 국무회의 휴전협상 보고(1952.7.15)
【28】 판문점회담의 현황(1952.7.15)
【29】 미 육군참모총장의 한국 및 일본 기자회견(1952.7.16)
【30】 엔디코트 박사의 비난에 대한 캐나다 학자들의 답변(1952.7.16)
【31】 중국의 입장 분석(1952.7.17)
【32】 미 육군참모총장의 발언 내용에 대한 국무부의 평가(1952.7.17)
【33】 포로문제에 관한 국무부의 입장(1952.7.17)
【34】 안전보장이사회 회의(1952.7.19)
【35】 버튼 박사와 한국 세균전(1952.7.18)
【36】 판문점과 전선의 상황(1952.7.19)
【37】 포로문제에 관한 국무부의 입장(1952.7.19)
【38】 소련 언론의 미국 비난(1952.7.20)
【39】 소련 언론(1952.7.21)
【40】 포로문제에 관한 미 국무부의 입장(1952.7.21)
【41】 한국의 정치적 상황(1952.7.23)
【42】 한국전쟁(1952.7.23)
【43】 한국의 사령부 산하 정치자문기구 설립에 대한 영국 외무부의 판단(1952.7.24)
【44】 한국의 휴전협정과 전쟁포로 문제(1952.7.24)
【45】 연합군 총사령관의 판문점 협상 상황 설명(1952.7.24)
【46】 한국 및 극동의 군사적 상황(1952.7.24)
【47】 소련 언론의 미국 비난(1952.7.31)
【48】 한국 대선의 대통령과 부대통령 후보(1952.7.31)
【49】 적의 전방 병력 줄이기(1952.7.31)
【50】 신화통신의 한국 휴전회담 상황 보도(1952.8.3)
【51】 신화통신의 한국 휴전회담 상황 보도(1952.8.5)
【52】 공산 측 의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미 국무부(1952.8.5)
【53】 휴전회담과 전선의 상황(1952.8.6)
【54】 한국의 정치적 상황(1952.8.8)
【55】 이승만 정부에 대한 유엔위원단의 관점(1952.8.8)
【56】 한국의 정치 상황(1952.8.8)
【57】 베이징라디오 보도와 공중전 상황(1952.8.10)
【58】 한국 상황에 대한 소련 언론의 반응(1952.8.11)
【59】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과 유엔 총사령관의 축하 메시지(1952.8.10)
【60】 조선중앙통신사의 미국 폭격 비난(1952.8.12)
【61】 판문점 회담 및 한국전쟁 상황(1952.8.12)
【62】 소련-북한 조선해방 7주년 기념 메시지(1952.8.15)
【63】 미 국무부의 동맹국 행동조치 계획안(1952.8.16)
【64】 미국의 행동 계획서에 대한 유엔 프랑스대사의 견해(1952.8.21)
【65】 한국 휴전회담에 관한 소련 언론의 보도(1952.8.23)
【66】 미국 계획에 대한 유엔 사무총장의 견해(1952.8.28)
【67】 미 국무부의 동맹국 행동조치 계획안(1952.8.28)
【68】 한국문제와 한국 휴전협정 이후 총회의 결의안(1952.8.27)
【69】 휴전회담과 포로수용소 폭동(1952.8.28)
【70】 공산 측 의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미 국무부(1952.8.29)
【71】 한국의 대통령·부대통령 선거 결과(1952.8.29)
【72】 한국 휴전회담에 관한 소련 언론의 보도(1952.8.30)
【73】 해리슨 연합군 수석대표의 성명(1952.9.6)
【74】 대만 외교부장관의 입장(1952.9.6)
【75】 한국문제의 유엔총회 언급에 대한 캐나다 외무장관의 입장(1952.9.10)
【76】 한국 휴전회담에 관한 소련 언론의 보도(1952.9.11)
【77】 유엔총회의 한국문제 검토에 대한 미 국무부의 의향(1952.9.11)
【78】 한국문제에 관한 멕시코의 제안(1952.9.13)
【79】 공산군 군사 활동 증가에 대한 미 국방부의 분석(1952.9.13)
【80】 한국 공중전에 대한 ?U.S.뉴스&월드리포트?의 기사(1952.9.12)
【81】 멕시코 당국이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낸 편지 전달(1952.9.13)
【81-1】 별첨 1-멕시코 당국이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낸 편지
【82】 미 국무장관 메시지(1952.9.14)
【83】 한국 휴전회담에 관한 소련 언론의 보도(1952.9.15)
【84】 미국의 행동 계획서에 대한 유엔 프랑스대사의 견해(1952.9.15)
【85】 중공-북한 측의 미국에 대한 항의(1952.9.17)
【86】 한국문제와 미국 선거운동(1952.9.18)
【87】 차기 유엔총회 한국문제 토론에 관한 미 정부의 입장(1952.9.18)
【88】 남한 민간인 포로의 석방(1952.9.20)
【89】 한국문제와 멕시코의 제안(1952.9.20)
【90】 미 국무부 법률 고문의 편지(1952.9.19)
【91】 프랑스 외교대표단의 주한 프랑스 대대 방문(1952.9.23)
【92】 미국의 결의안(1952.9.24)
【93】 프랑스 외교대표단의 주한 프랑스 대대 방문 2(1952.9.23)
【94】 휴전협정 가능성(1952.9.24)
【95】 한국의 정치: 주일 프랑스대사의 이승만 대통령과의 회담(1952.9.26)
【96】 판문점 연합군 측 수석대표의 새로운 대안 3가지(1952.9.27)
【97】 한국 해상의 ‘해상 방위 구역’ 창설(1952.10.1)
【98】 전방의 상황(1952.10.2)
【99】 판문점 휴전회담에 대한 미 국무부의 보고(1952.10.1)
【100】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계획(1952.10.6)
【101】 한국의 정치 상황(1952.10.6)
【102】 한국 전방의 상황(1952.10.8)
【103】 한국 전방 상황에 대한 미 국무부의 보고(1952.10.9)
【104】 신화통신의 한국 휴전회담 상황 보도(1952.10.10)
【105】 한국 전방의 상황(1952.10.10)
【106】 한국 전방의 상황(1952.10.10)
【107】 미국 선거와 한국 상황(1952.10.10)
【108】 공화당, 그리고 한국군으로 주한 미군 대체(1952.10.10)
【109】 적이 백마고지를 장악하려는 이유(1952.10.14)
【110】 해리슨 장군에게 보낸 남일 장군의 답장(1952.10.14)
【111】 미국의 휴전회담 ‘방해공작’에 대한 공산 측의 분석(1952.10.15)
【112】 판문점 연합군 측 수석대표의 새로운 대안 3가지(1952.10.17)
【113】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편지(1952.10.17)
【114】 중공-북한군 사령부의 ‘정치적 망명자’ 개념(1952.10.18)
【115】 연합군 군사훈련(1952.10.17)
【116】 공산 측과 연합군 측의 서신 교환(1952.10.17)
【117】 공산 측 총사령관들의 편지에 관한 미 국무부의 견해(1952.10.18)
【118】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편지에 대한 베이징라디오 보도(1952.10.18)
【119】 장면 씨의 방문과 한국의 정치 상황(1952.10.18)
【120】 일본인 후루이치 사건(1952.10.18)
【121】 한국 전선의 상황(1952.10.18)
【122】 공산 측 편지에 대한 클라크 장군의 답장(1952.10.21)
【123】 한국에 관한 미국의 새 결의계획안(1952.10.22)
【124】 공산 측 제안과 미국 제안의 비교(1952.10.21)
【125】 공산 측 총사령관들의 편지 분석(1952.10.22)
【126】 한국 국회의 특별총회(1952.10.21)
【127】 아이젠하워 장군의 미군 철수 주장(1952.10.21)
【128】 제1위원회의 한국문제 토론(1952.10.24)
【129】 미 국무장관의 한국에 대한 성명(1952.10.25)
【130】 공산 측의 전쟁포로 분류 개념(1952.10.24)
【131】 한국문제에 관한 미 국무부의 계획(1952.10.26)
【132】 한국전쟁의 제한에 대한 국무부장관의 발표(1952.10.28)
【133】 한국 전방의 상황(1952.10.28)
【134】 중국인민지원군 전쟁참여 2주년 행사 및 거제도 포로수용소 사건(1952.10.29)
【135】 어업수역 문제로 인한 한일관계 악화(1952.10.30)
【136】 미국 결의안에 대한 영국의 입장(1952.10.29)
【137】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의 계획(1952.10.30)
【138】 유엔 제1위원회에서의 한국문제 관련 프랑스대사의 발언(1952.10.30)
【139】 한국문제에 대한 영국의 견해(1952.10.31)
【140】 한국문제에 대한 영국의 견해 2(1952.10.31)
【141】 타 신문사 속보를 보도한 ?뉴욕타임스?(1952.10.31)
【142】 미 대통령 선거와 한국문제(1952.10.31)
【143】 남한 군대의 발전에 대한 밴 플리트 장군의 편지(1952.10.31)
【144】 한국 외무부장관의 유엔총회 발언과 각국의 논쟁들(1952.11.4)
【145】 멕시코 대표의 유엔총회 연설(1952.11.4)
【146】 포로송환에 대한 유엔총회의 결정 사안들(1952.11.4)
【147】 포로 송환에 대한 의견 교환(1952.11.4)
【148】 유네스코 회담 대표로 임명된 백낙준(1952.11.6)
【149】 두 단계의 휴전협상 제안(1952.11.7)
【150】 휴전협상의 두 단계와 관련하여(1952.11.7)
【151】 비신스키 장관의 새로운 위원회 설립 제안에 대해(1952.11.10)
【152】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행보에 대한 예상(1952.11.11)
【153】 적군의 포병 부대 관련 미 국방부의 소련에 대한 의구심(1952.11.12)
【154】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 방문(1952.11.14)
【155】 유엔총회에서 이스라엘, 쿠바 및 여러 국가 대표단의 입장(1952.11.17)
【156】 멕시코 대표의 연설(1952.11.17)
【157】 전쟁포로 관련한 인도 대표의 11월 18일자 제출 해결안(1952.11.17)
【158】 인도의 결의안에 대한 애치슨의 비판(1952.11.18)
【159】 인도의 결의안에 대한 찬성 분위기의 반전(1952.11.18)
【160】 인도의 결의안에 대한 평을 실은 ?타임스?의 사설(1952.11.19)
【161】 미국 신문들의 인도의 결의안에 대한 반응(1952.11.19)
【162】 극동 담당 국무차관의 인도 결의안에 대한 견해(1952.11.20)
【163】 인도의 결의안 관련한 수정 논의(1952.11.20)
【164】 인도의 결의안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수정문(1952.11.20)
【165】 인도의 결의안 제14항에 대한 미국의 수정문(1952.11.20)
【166】 주유엔 남한 대표(양유찬)의 인도 결의안에 대한 반대 의견(1952.11.20)
【167】 소련 기자의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태도 비판(1952.11.21)
【168】 영국 수상의 인도 결의안에 대한 찬성 의사 표명(1952.11.22)
【169】 인도의 결의안에 대한 호주 대표의 견해(1952.11.22)
【170】 미국 정부의 수정안 제출(1952.11.22)
【171】 인도의 결의안을 수정하면서 마무리해야 할 대상 목록(1952.11.22)
【172】 정부의 서울로의 이전 검토(1952.11.22)
【173】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보낸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들(1952.11.22)
【174】 영국 언론에 실린 영국과 미국의 의견 불일치(1952.11.24)
【175】 21개국 위원회의 인도의 결의안(案) 우선권 인정(1952.11.25)
【176】 인도의 결의안에 대한 소련의 반론과 각국의 견해(1952.11.26)
【177】 소련에 의한 한국 관련 인도의 결의안 수정안(1952.11.26)
【178】 한국 관련 인도의 결의안에 대한 이라크의 수정안(1952.11.26)
【179】 아이젠하워 장군의 한국 방문과 관련한 소문들(1952.11.26)
【180】 베이징 정부의 인도의 안에 대한 입장(1952.11.27)
【181】 인도 관료에게 프랑스의 의견 전달(1952.11.28)
【182】 소련 언론의 선전(1952.11.29)
【183】 비신스키 장관의 인도결의안에 대한 비판(1952.11.29)
【184】 위원회 투표를 통한 소련 결의안 기각(1952.12.1)
【185】 유엔에서의 소련의 전략 실패(1952.12.3)
【186】 소련의 고립에 대한 인도 대표의 난처한 입장(1952.12.3)
【187】 인도결의안 채택과 남은 문제들(1952.12.4)
【188】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대만 군대의 사용 가능성(1952.12.5)
【189】 총회에서의 인도 결의안 승인(1952.12.5)
【190】 아이젠하워 장군의 한국 방문에서 키리노 대통령과 장제스 총통과의 접촉(1952.12.5)
【191】 유엔 전사자들 관련한 프랑스의 결의안 채택(1952.12.5)
【192】 아이젠하워의 한국 방문과 일정(1952.12.6)
【193】 장제스 총통의 부재에 대한 궁금증(1952.12.8)
【194】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체이스 장군의 접촉(1952.12.8)
【195】 호주의 여론(1952.12.9)
【196】 공산군과 남한군의 군대 상황(1952.12.9)
【197】 총회의 논의와 아이젠하워 장군의 한국 방문 이후 한국 상황(1952.12.10)
【198】 유엔총회의 의장의 공문에 대한 저우언라이의 답변(1952.12.15)
【199】 중국 정부의 인도결의안 거부에 대한 네루 수상의 반응(1952.12.16)
【200】 중국 정부의 인도결의안 거부에 대한 네루 수상의 반응(1952.12.16)
【201】 소련 논설위원의 미국에 대한 비판(1952.12.17)
【202】 포로수용소 사건 관련 남일 장군의 반박(1952.12.17)
【203】 한국의 수용소 사건을 다룬 소련 신문(1952.12.18)
【204】 미 국방부가 전한 한국 상황에 대한 정보(1952.12.19)
【205】 남한 국방부장관의 한국군 병력 증대 계획 발표(1952.12.21)
【206】 저우언라이와 박헌영의 답변 및 주장(1952.12.22)
【207】 소련의 결의안에 대한 기각(1952.12.22)
【208】 한국 전선의 상황(1952.12.23)
【209】 인도의 결의안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거부와 이에 대한 인도의 반응(1952.12.23)
【210】 캐나다에서 떠도는 한국의 국지전 예상에 대한 소문(1952.12.30)
【211】 전쟁포로 관련한 남일 장군의 항의 서한(1952.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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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6]

해제

1953년 1월 6일~7월 31일

【1】 한국전쟁과 마주한 중국과 미국(1953.1.6)
【2】 아이젠하워 정권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예상(1953.1.7)
【3】 한국전쟁에 대한 케이시 장관의 성명(1953.1.9)
【3-1】 별첨 1-케이시 장관의 성명서
【4】 도쿄 회담에 대한 러시아 언론의 반응(1953.1.10)
【5】 이승만 대통령의 도쿄 초청 방문(1953.1.10)
【6】 공산주의자들의 판문점 호송 안전 보장에 대한 미국 정부의 결정(1953.1.13)
【7】 이든 장관의 중국과 한국에 대한 발표(1953.1.23)
【8】 극동 미군 주요 지휘관들의 견해(1953.1.25)
【9】 미 공화당 정부와 한국(1953.1.29)
【10】 공산군의 동향(1953.1.31)
【11】 중국 국민당 군사력의 사용 결정(1953.2.4)
【12】 미 행정부의 전체적 구상(1953.2.6)
【13】 미 행정부의 입장(1953.2.11)
【14】 호주대표단의 정보(1953.2.13)
【15】 중공-북한군 증원에 관한 미 참모부의 판단(1953.2.14)
【16】 미 행정부의 입장(1953.2.11)
【17】 떠나는 밴 플리트 장군의 메시지(1953.2.15)
【18】 아랍 및 아시아대표단 회의(1953.2.16)
【19】 미 행정부의 입장(1953.2.17)
【20】 한국 군사 지원 국가들의 차기 총회를 대비한 회의(1953.2.19)
【21】 한국에 관한 영국 국방부장관의 견해(1953.2.19)
【22】 전쟁에 대한 각 열강들의 입장(1953.2.19)
【23】 남일 장군이 유엔연합군사령관에게 보낸 편지(1953.2.24)
【24】 조선통신사의 북한 폭격 상황 결산 배포(1953.2.24)
【25】 미국이 부담하는 한국전쟁 비용(1953.2.25)
【26】 호주 대표단의 정보(1953.2.26)
【27】 미군에 대한 한-미 재정 협의(1953.2.27)
【28】 전쟁포로 재판에 대한 미국의 계획(1953.3.3)
【29】 미 합참의장의 연설(1953.3.3)
【30】 중공-북한 전쟁포로 재판(1953.3.4)
【31】 영국 상·하원에서 다룬 한국문제(1953.3.4)
【32】 영국 국방부장관의 한국분쟁에 대한 발표(1953.3.4)
【33】 주베이징 스웨덴대사의 정보(1953.3.5)
【34】 한국문제에 관한 회의 보고(1953.3.5)
【35】 중공-북한 전쟁포로 재판에 관한 프랑스 정부의 입장(1953.3.5)
【36】 남한 정부의 서울 이전(1953.3.5)
【37】 한국전쟁에 대한 밴 플리트 장군의 의회 증언(1953.3.5)
【38】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1953.3.6)
【39】 한국 포로수용소 폭동(1953.3.9)
【40】 정책위원회의 한국문제 논쟁(1953.3.10)
【41】 인도차이나 문제에 대한 한국 지도자들의 반응(1953.3.11)
【42】 한국 재건에 관한 결의안 투표(1953.3.12)
【43】 밴 플리트 장군의 샌프란시스코 방문(1953.3.12)
【44】 유엔군 전쟁포로(1953.3.13)
【45】 한국정부 서울 이전(1953.3.15)
【46】 소련-북한 협약 체결 4주년에 대한 소련 언론의 반응(1953.3.17)
【47】 클라크 장군과의 대담(1953.3.17)
【48】 중공-북한 포로 재판(1953.3.18)
【49】 중국과 한국(1953.3.18)
【50】 클라크 장군에게 보낸 김일성과 펑더화이의 메시지(1953.3.29)
【51】 중공-북한의 새로운 제안에 대한 영국언론의 반응(1953.3.31)
【52】 중공-북한의 새로운 제안에 대한 영국 외무부의 입장(1953.3.31)
【53】 포로송환 합의와 저우언라이의 변화(1953.3.31)
【54】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되는 세계평화회의의 주제(1953.4.1.)
【55】 소련과 중국의 모스크바 회담에서 데탕트의 입장 표명(1953.4.1)
【56】 병들고 다친 포로송환 문제에 대한 클라크 장군과 저우언라이의 서신 교환(1953.4.1)
【57】 저우언라이의 선언문(1953.3.30)
【58】 저우언라이의 스위스대사 접견(1953.4.2)
【59】 중국 정부의 태도에 대한 외무부의 신중한 접근(1953.4.2)
【60】 한국문제에 대한 몰로토프의 담화문(1953.4.2)
【61】 한국문제에 대한 몰로토프의 담화문(1953.4.2)
【62】 클라크 장군의 서한에 대한 중국·북한의 답변(1953.4.3)
【63】 몰로토프 씨의 발표에 나타난 소련의 입장 해석(1953.4.3)
【64】 클라크 장군의 서한에 대한 중국·북한 군 사령관의 답변(1953.4.3)
【65】 공산진영의 제안에 대한 미국의 여론과 워싱턴 관가의 반응(1953.4.4)
【66】 저우언라이의 메시지에 대한 일본의 반응(1953.4.4)
【67】 판문점 협상의 상황 총정리(1953.4.9)
【68】 대(對) 유엔군 세균전 고발 관련하여(1953.4.8)
【69】 소련 대표 비신스키 장관의 발언(1953.4.10)
【70】 남일 장군의 답변서 관련하여(1953.4.10)
【71】 폴란드의 제안문에 대한 논쟁(1953.4.11)
【72】 포로 협상 관련한 한국 외무부장관의 발언(1953.4.11)
【73】 유엔포로수용소에서 공산군 포로들의 전투태세(1953.4.12)
【74】 미국의 신중치 못한 언론에의 공개에 대한 비판(1953.4.13)
【75】 저우언라이의 메시지에 대한 프랑스·영국과 미국 간의 의견 차이(1953.4.14)
【76】 브라질의 해결안(1953.4.14)
【77】 중국·북한의 제안에 대한 유엔군사령부의 답변 준비(1953.4.14)
【78】 한국의 통일에 대한 계획(1953.4.14)
【79】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프랑스의 의견서(1953.4.14.)
【80】 중국의 제안에 대한 세계의 환영(1953.4.15)
【81】 만장일치로 브라질 안 채택(1953.4.16)
【82】 미국 수정문의 중국·북한으로의 전달(1953.4.16)
【83】 일본과 한국 휴전협상의 전망(1953.4.16)
【84】 한국 국회와 학생 시위(1953.4.25)
【85】 남일 장군의 6개 항목 제안(1953.4.28)
【86】 공산진영의 제안에 대한 회의적 견해(1953.4.28)
【87】 휴전협상에서 스위스 감독관들의 중립적 행동 강조(1953.4.28)
【88】 영국 언론의 휴전협상에 대한 관점들(1953.4.29)
【89】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들(1953.4.29)
【90】 미 국무부의 휴전협상 상황 요약(1953.4.29)
【91】 영국 신문들의 미 국무부의 조치에 대한 비판적 견해(1953.5.1)
【92】 비자발적 포로 보호를 맡을 중립국 선택에 대한 해리슨 장군의 발언들(1953.5.1)
【93】 유엔 측의 병들고 부상당한 포로들의 송환 이행 촉구(1953.5.2)
【94】 판문점 협상에 대한 영국 관가의 긍정적 견해(1953.5.4)
【95】 파키스탄 대사의 중립국 관련 제안(1953.5.4)
【96】 휴전조약 성사에 대한 긍정적 전망(1953.5.5)
【97】 미 국무부의 문제시되는 발언들(1953.5.5)
【98】 소련 관료의 한국 종전과 아시아 상황에 대한 견해(1953.5.6)
【99】 남일 장군의 8개 항목 제안(1953.5.7)
【100】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의 이송에 대한 영국의 견해(1953.5.8)
【101】 판문점 대표단이 발표한 8개 항목의 제안서(1953.5.8)
【102】 공산군 측의 제안에 대한 분석(1953.5.9)
【103】 공산군 측의 제안에 대한 분석(1953.5.9)
【104】 유엔군 측이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남일 장군의 답변(1953.5.11)
【105】 유엔총회의 이전 해결안의 폐기에 대한 견해(1953.5.12)
【106】 미국 비행기의 중국 영토 침입에 대한 저우언라의 항의(1953.5.12)
【107】 유엔군사령부 측의 반대안 제출(1953.5.12)
【107-1】 별첨 1-중국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취한 억류 조치의 잠재적 철회
【108】 공산군 측의 제안에 대한 미국의 반대안 준비(1953.5.13)
【109】 한국 휴전협상에 대한 미국 여론 조사(1953.5.13)
【110】 미국의 반대안에 대한 프랑스 당국의 견해 전달(1953.5.12)
【111】 미국의 반대안에 대한 영국과 캐나다, 일본의 견해(1953.5.13)
【112】 유엔군사령부 측의 반대안 제출(1953.5.13)
【113】 미국 신문에 게재된 미국의 제안서 내용(1953.5.14)
【114】 인도의 안과 미국의 반대안과의 차이에 대해(1953.5.15)
【115】 미국 신문에 게재된 미국의 제안서 내용(1953.5.15)
【116】 중공, 인도, 캐나다, 미국 정부의 입장(1953.5.16)
【117】 중화민국의 항의(1953.5.16)
【118】 판문점 회담에서의 양측의 입장차(1953.5.16)
【119】 판문점 회담 보고서(1953.5.16)
【120】 포로송환에 관한 프랑스 외무부의 입장(1953.5.16)
【121】 인도 정부의 입장(1953.5.16)
【122】 캐나다 정부의 우려 전달(1953.5.17)
【123】 포로 송환 문제 협상 경과(1953.5.17)
【124】 미 국무부의 성명(1953.5.미상)
【125】 인도 정부의 입장(1953.5.17)
【126】 포로 문제에 대한 영국 외무부의 입장(1953.5.18)
【127】 프랑스 외무부의 우려(1953.5.18)
【128】 미 정부의 입장에 관한 ?데일리헤럴드? 기사(1953.5.19)
【129】 중화민국의 대미 항의 통첩(1953.5.19)
【130】 포로 송환에 관한 남한 외무장관의 성명(1953.5.19)
【131】 미 극동 담당 국무차관보와의 면담(1953.5.19)
【132】 인도 결의안 수락에 관해(1953.5.20)
【133】 휴전안에 대한 미 정부의 입장(1953.5.20)
【134】 유엔군 사령부의 입장(1953.5.20)
【135】 유엔군 사령관의 입장(1953.5.20)
【136】 주한 프랑스대사의 보고 내용(1953.5.20)
【137】 미 극동 담당 국무부차관보와의 면담(1953.5.20)
【138】 전쟁포로 송환에 관한 유엔의 수정안(미상)
【139】 판문점 협상(미상)
【140】 연합국 간 사전 협의에 관한 영국 외무부의 입장(1953.5.22)
【141】 영국 외무부의 반응(1953.5.22)
【142】 영국 총리의 입장(1953.5.22)
【143】 프랑스 외무부의 입장(1953.5.22)
【144】 미국의 수정안(1953.5.23)
【145】 한국전 및 휴전 협상 상황(1953.5.26)
【146】 미 정부의 타협안(1953.5.27)
【147】 미 유엔 담당 국무차관보의 보고(1953.5.26)
【148】 미 대통령의 성명(1953.5.28)
【149】 아랍 및 아시아 국가 대표단들의 입장(1953.5.29)
【150】 한국 전선의 상황(1953.5.30)
【151】 영미 간 마찰(1953.5.31)
【152】 남한 측 입장(1953.5.31)
【153】 한국 협상과 인도차이나반도 협상 연계
【154】 남한 측 입장(1953.6.1)
【155】 남한 정부의 태도에 대한 미 정부의 반응(1953.6.1)
【156】 휴전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 재표명(1953.6.3)
【157】 휴전에 대한 남한 정부의 입장(1953.6.3)
【158】 남한에 대한 미국의 원조 계획(1953.6.4)
【159】 공산군 측 수정안 내용(1953.6.4)
【160】 공산군 측의 수용 사항(1953.6.5)
【161】 말리크 주영 소련대사의 견해(1953.6.6)
【162】 주미 영국대사관이 얻은 정보(1953.6.6)
【163】 휴전협정에 관한 소련 언론의 보도(1953.6.6)
【164】 포로 송환 문제 관련 협의(1953.6.6)
【165】 휴전협정에 관한 언론 보도(1953.6.7)
【166】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1953.6.7)
【167】 남한의 태도 변화(1953.6.7)
【168】 남한의 휴전협정 수용설로 인한 동요(1953.6.7)
【169】 미 대통령 친서에 대한 남한의 반응(1953.6.7)
【170】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에 대한 AFP통신의 보도(1953.6.7)
【171】 휴전회담에 관한 ?프라우다?의 보도(1953.6.8)
【172】 전쟁포로 처리에 관한 협정 조인(1953.6.8)
【173】 전쟁포로 처리에 관한 협정 내용(1953.6.8)
【174】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에 관한 미 언론 반응(1953.6.8)
【175】 포로교환협정 체결에 관한 남한의 반응(1953.6.9)
【176】 남한 정부의 휴전 동의 소식 부인(1953.6.9)
【177】 군사분계선 조정 협의 시작(1953.6.9)
【178】 미 국무부에 대한 프랑스 외무부의 요청(1953.6.9)
【179】 스위스 정부 발표가 불러온 혼란(1953.6.10)
【180】 휴전계획에 대한 한국의 반발(1953.6.16)
【181】 한국 전선의 상황과 미 전쟁포로 송환 계획(1953.6.16)
【182】 분계선 획정에 관한 합의(1953.6.16)
【183】 한국 전선의 상황과 공산군의 의도(1953.6.16)
【184】 휴전계획에 대한 한국의 반발(1953.6.11)
【185】 반공포로 석방(1953.6.18)
【186】 유엔 군사정전위원회와 반공포로 석방(1953.6.18)
【187】 반공포로 석방에 관한 미군 측 보고(1953.6.18)
【188】 프랑스의 수정에 대한 에티오피아의 부정적 반응(1953.6.19)
【189】 포로 탈주에 대한 의견 교환(1953.6.19)
【190】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우려(1953.6.19)
【191】 남한의 상황에 대한 미국 정부의 단호한 대처(1953.6.19)
【192】 15개국 한국 참전국들의 결의안 공표 계획(1953.6.19)
【193】 미 국무장관의 현 상황 발표(1953.6.19)
【194】 파리 발신 공문(1953.6.19)
【195】 한국 휴전협정의 결과들(1953.6.19)
【196】 북한포로 석방 사태에 대한 여러 언론의 관점(1953.6.20)
【197】 북한포로 석방에 대한 미국의 입장(1953.6.20)
【198】 북한포로들의 탈출에 관해(1953.6.20)
【199】 수용소 포로들에 대한 사령부의 조치(1953.6.20)
【200】 중국·북한 최고사령관의 서한문(1953.6.20)
【201】 반공포로 석방 사태로 인한 미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관계(1953.6.21)
【202】 최근의 포로 탈주에 대한 견해(1953.6.21)
【203】 정치회담을 바라보는 네덜란드의 관점(1953.6.22)
【204】 반공포로 관련 클라크 장군의 발표(1953.6.22)
【205】 한국 전선의 상황(1953.6.22)
【206】 남한 당국에 대한 미국의 의중(1953.6.22)
【207】 한국 정부에 보내는 영국의 외교각서(1953.6.23)
【208】 한국에 외교각서를 전달한 영국 의회의 상황(1953.6.23)
【209】 영국 수상의 암시적 표현 방식(1953.6.23)
【210】 포로탈출 사건 관련 미국의 대처에 대한 프랑스의 견해(1953.6.23)
【211】 미국 기자의 최덕신 장군과의 인터뷰(1953.6.23)
【212】 이승만 대통령과 클라크 장군의 회담(1953.6.23)
【213】 이승만 대통령과 클라크 장군의 회담에서 도출된 외교각서(1953.6.23)
【214】 미 국무부의 한국 관련 회의 내용(1953.6.23)
【215】 덜레스 씨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1953.6.23)
【216】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사령부에 제시한 원칙들(1953.6.24)
【217】 이승만과 장제스, 이승만과 미국의 공모에 대한 기사(1953.7.01)
【218】 한국사건을 다루는 소련 언론의 태도(1953.7.1)
【219】 한국정부에 각국의 견해서 전달(1953.7.1)
【220】 유엔한국민사지원처 개편 건(1953.7.1)
【221】 한국 휴전을 위한 국제회의에 대한 프랑스 측 견해(1953.7.2)
【222】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케이시 외무장관의 메시지에 대한 보고(1953.7.2)
【223】 한국 관련 정치회담에 대한 견해서(1953.7.2)
【224】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의 진행 상황(1953.7.3)
【225】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입장(1953.7.4)
【226】 미-한 회담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1953.7.4)
【227】 이승만 메시지를 다루는 미 언론의 태도(1953.7.4)
【228】 유엔총회 소집 시기에 대한 미-영-프의 입장(1953.7.4)
【229】 한국 관련 정치회담에 대한 견해(1953.7.6)
【230】 한국 휴전협정 관련 문제에 대한 견해서(미상)
【231】 한국 관련 정치회담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입장(1953.7.7)
【232】 이승만을 비판하는 소련 언론(1953.7.7)
【233】 특별총회 소집에 관한 피어슨 유엔총회 의장의 입장(1953.7.7)
【234】 미-한 회담에서 이승만의 요구(1953.7.7)
【235】 미-한 협상에 대해 존슨 차관보의 국무회의 내용 보고(1953.7.7)
【236】 미국의 미-한 회담 의도를 비판하는 소련 언론(1953.7.8)
【237】 정전회담에 대한 각 측의 입장(1953.7.9)
【238】 필리핀의 유보적 입장(1953.7.10)
【239】 정치회담 참여를 원하는 터키 정부(1953.7.10)
【240】 미-한 회담 내용과 미국 측 입장(1953.7.10)
【241】 미-한 회담과 판문점회담에 대한 미 국무부 보고(1953.7.10)
【242】 성명서 추가 조항 작성 건에 대한 프랑스와 미국의 입장(1953.7.11)
【243】 미-한 회담 결과에 대해 부정적인 영국 언론보도(1953.7.13)
【244】 미-한 회담을 대하는 미국 측의 입장 분석(1953.7.13)
【245】 추측하기 어려운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협상에 대한 입장(1953.7.13)
【246】 이승만-로버트슨의 성명(1953.7.13)
【247】 한국 상황에 대한 미 국무부의 정보 제공(1953.7.14)
【248】 한국과 인도차이나 관련 영국·미국 정부에 보내는 프랑스 정부의 견해서(1953.7.14)
【249】 총회소집에 대한 네루 수상의 서한과 유엔 사무총장의 입장(1953.7.15)
【250】 네루 수상의 서한과 총회 의장의 입장(1953.7.16)
【251】 총회 소집에 대한 피어슨 의장의 입장(1953.7.16)
【252】 한국에 대한 대만의 태도(1953.7.17)
【253】 공동성명에 대한 주요 열강의 입장(1953.7.17)
【254】 미 국무부의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에 대한 공개 설명(1953.7.19)
【255】 공동성명 내용과 공개에 대한 캐나다 정부의 입장(1953.7.20)
【256】 정치회담 참여국가 구성에 대한 캐나다 로닝 국장과의 회견(1953.7.20)
【257】 주미 한국대사의 도발적 담화에 대한 주의 촉구(1953.7.20)
【258】 공동성명 발표 및 추가 조항에 대한 미 국무부의 활동(1953.7.20)
【259】 로버트슨이 주재한 16개국 회담(1953.7.21)
【260】 휴전협정 과정과 논의사항에 대한 미 국무부의 15개국 대상 설명회(1953.7.21)
【261】 이승만 태도에 대한 로버트슨 특사의 속내(1953.7.22)
【262】 판문점 회담 연기의 의미(1953.7.22)
【263】 휴전협정과 정치회담에 대한 덜레스 장관 성명 보도(1953.7.22)
【264】 휴전문제 합의내용에 대한 이승만과 미 국무부 각각의 성명(1953.7.22)
【265】 정치회담 시기와 장소에 대한 논의(1953.7.24)
【266】 특별총회와 정치회담에 대한 캐나다 관련 부서의 의견 요약(1953.7.24)
【267】 판문점 협정에 다한 공산 측과 미국의 입장(1953.7.24)
【268】 한국 지원비(원조)에 대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발의(1953.7.24)
【269】 휴전을 알리는 네덜란드 언론(1953.7.27)
【270】 정치회담 속행 조건으로 미 국무부가 이승만에게 해준 약속의 부당성에 대한 보도(1953.7.27)
【271】 휴전에 대한 스웨덴 언론의 반응(1953.7.27)
【272】 휴전협상에 대한 변영태 외무장관의 발언(1953.7.27)


장관실문서(1950년 6월 25일~12월 10일)

【273】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소식(1950.6.25)
【274】 1950년 6월 25일 이후 한국 사태와 유엔(1950.7.12)
【274-1】 별첨 1-대한민국 침략 고발에 관한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274-2】 별첨 2-유엔 한국위원회의 군사적 상황 보고
【274-3】 별첨 3-트루먼 대통령의 6월 27일 성명
【274-4】 별첨 4-미국 정부의 각서
【274-5】 별첨 5-1950년 6월 27일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
【274-6】 별첨 6-미국 각서에 대한 소련의 답변
【275】 한국 사태(1950.7.12)
【275-1】 별첨 1-1950년 6월 27일 안보리 결의안에 따른 사무총장의 서한에 대한 유엔 회원국들의 답신
【276】 한국전쟁에 대한 유엔의 협력(1950.7.20)
【277】 한국에 대한 군사 원조(1950.7.27)
【278】 소련의 의도(1950.7.27)
【279】 38선 돌파(1950.10.5)
【280】 대한민국(1950.10.16)
【281】 맥아더 장군의 공산주의자들과의 발전소에 대한 협상(1950.11.7)
【282】 만주 중국 후방에 대한 미 공군의 개입 문제(1950.11.13)
【283】 긴급 월경 추적권(1950.11.14)
【284】 중국 전투기 추적에 관하여(1950.11.15)
【285】 동북아시아 사무국장 존슨 씨와 회담(1950.11.16)
【286】 주미 영국대사에게 보낸 영국 외상의 친서(1950.11.16)
【287】 한국 사태(캐나다 대사관이 외무성에 제출한 외교 의견서)(1950.12.19)
【288】 총회: 제1위원회 전 중국의 한국 개입(1951.1.9)
【289】 네루 총리의 전언(1951.1.20)
【290】 1951년 1월 26일 미국 대사관이 프랑스 외무부에 전달한 각서(1951.1.29)
【291】 유엔총회: 제1위원회에서 중국의 한국 개입 논의(1951.1.30)
【291-1】 별첨 1-베이징주재 인도대사가 중국 외무장관에게 제기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답변
【292】 한국 사태(조정과 제재)(1951.2.22)
【293】 한국 사태(군사적 문제)(1951.2.22)
【294】 미 극동 담당 국무차관보의 발표(1951.4.3)
【295】 중국공산군에 관한 정보(1951.4.3)
【296】 영국이 프랑스에 전달한 각서(1951.4.3)
【297】 영국 각서의 번역문 전달(1951.4.3)
【298】 한국전쟁의 새로운 방어선(1951.4.3)
【299】 한국 사태: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 성명 계획안(1951.6.19)
【299-1】 별첨 1-프랑스 정부의 성명발표 계획안
【300】 프랑스의 한국 원조 참여(1951.6.26)
【301】 한국 사태(1951.7.2)
【301-1】 별첨 1-말리크 씨의 선언부터 리지웨이 장군이 북한 사령부에 전달한 서한까지의 보고서
【301-2】 별첨 2-리지웨이 장군에게 내려진 지시에서 검토된 휴전의 조건
【302】 휴전협정에 대한 전망(1951.7.15)
【303】 뉴욕에서 본 한국 사태(1951.7.17)
【304】 1950년 7월 20일자 쇼벨 씨의 개인 편지 발췌
【305】 개성 휴전회담에 관한 보고서(1951.7.30)
【306】 한국 사태(1951.8.24)
【306-1】 별첨 1-개성 회담에서 제안된 휴전선에 대한 의견서
【307】 1951년 9월 14일 미 국무부에서 개최된 7차 회의 보고서
【308】 헤이터 씨가 외무부에 제출한 비공식 통지(1951.10.8)
【309】 한국 참전용사들의 파리 체류
【310】 유엔 한국 참전용사 단체의 파리 체류(1951.11.29)
【311】 참전 용사들을 위한 연설 계획안
【312】 한국 원조(1951.12.29)
【313】 3개국 회담과 한국휴전협정(1952.1.28)
【314】 휴전협정(1952.1.30)
【315】 한국의 휴전협정 보고서(1952.3.25)
【315-1】 별첨 1-한국의 휴전협정 보고서
【316】 상대 병력 수 조사(1952.5.16)
【317】 한국 상황(1952.5.24)
【317-1】 별첨 1-한국 상황에 관한 보고서
【318】 한국의 상황(1952.6.14)
【319】 한국에 억류된 프랑스 포로수용자(1952.6.24)
【319-1】 별첨 1-한국의 프랑스인 억류자
【319-2】 별첨 2-한국의 프랑스 전투부대
【320】 한국문제(1952.6.25)
【320-1】 별첨 1-보충자료(압록강 이북 군사작전 확대에 대한 프랑스의 입장)
【321】 한국에서의 3국 정책 공조(1952.7.1)
【322】 압록강 폭격(1952.7.1)
【323】 판문점 회담의 현 상황 보고(1952.7.19)
【324】 제1위원회에서의 오프노 프랑스대사의 연설문(1952.10.30)
【325】 슈만 단장과 변 남한대표의 회담 보고서(1952.11.14)
【326】 한국에 관한 소련의 제안(1952.11.28)
【326-1】 별첨 1-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결의 계획안
【326-2】 별첨 2-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소련 대표단의 결의 계획안 추기(追記)
【327】 한국문제: 인도 결의안에 제1위원회의 투표(1952.12.2)
【327-1】 별첨 1-인도결의안
【328】 총회 토론 이후 한국문제와 아이젠하워 장군의 방문(195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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