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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1 | ▼a 홍순민 ▼0 AUTH(211009)139706 |
245 | 2 0 | ▼a (홍순민의) 한양읽기 / ▼d 홍순민 |
260 | ▼a 서울 : ▼b 눌와, ▼c 2017- | |
300 | ▼a 책 : ▼b 천연색삽화 ; ▼c 23 cm | |
500 | ▼a 도성편은 "한양도성, 서울 육백년을 담다"를 재편집·증보하여 출간함 | |
504 | ▼a 참고문헌 수록 | |
505 | 1 0 | ▼n [1]. ▼t 도성 ▼g (408 p.) -- ▼n [2]. ▼t 궁궐 상 : 왕조국가의 중심, 임금이 사는 곳 ▼g (352 p.) -- ▼n [3]. ▼t 궁궐 하 : 한양의 다섯 궁궐 그 겉을 보다, 속을 읽다 ▼g (580 p.) |
740 | 2 | ▼a 왕조국가의 중심, 임금이 사는 곳 |
740 | 2 | ▼a 한양의 다섯 궁궐 그 겉을 보다, 속을 읽다 |
740 | 2 | ▼a 한양도성, 서울 육백년을 담다 |
945 | ▼a KLPA |
소장정보
No. | 소장처 | 청구기호 | 등록번호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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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1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953.1 2017z1 1 | 등록번호 111781720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No. 2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953.1 2017z1 2 | 등록번호 111781235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No. 3 |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 청구기호 953.1 2017z1 3 | 등록번호 111781233 | 도서상태 대출가능 | 반납예정일 | 예약 | 서비스 |
컨텐츠정보
책소개
조선을 이해하고 서울의 정체성의 기원을 찾기 위해 도성, 궁궐, 종묘로 향하는 '홍순민의 한양읽기', 그 첫 번째 책. 도성(都城)은 조선 태조 이래 오늘날까지 내사산과 한 몸이 되어 옛 한양을 보듬고 있다. 종묘, 궁궐과 더불어 한양을 왕도(王都)이자 수도(首都), 국도(國都)로 만들어주는 표상으로, 다른 도시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도성에는 백성들의 피와 땀, 애증이 땀땀이 배어 있고, 또 백성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도성을 짓는 데 임금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기도 하였고, 도성을 버리고 떠난 임금의 비겁한 행위가 백성들의 마음을 떠나게 하기도 하였다.
왕조가 사라진 뒤 도성은 헐리고 무너진 부분이 생기고, 그 기능은 소멸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상당 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도성은 서울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물이요, 오늘의 서울과 옛 한양을 연결하는 고리요, 한 도시로서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증표이다. 도성을 읽으면 서울이 보인다.
서울에서 가장 거대한 문화유산은 무엇일까. 바로 옛 서울, 한양을 감싼 내사산을 따라 쌓은 도성(都城)이다. 오늘날 “서울 한양도성”이란 이름으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도성은 수많은 성곽 중 하나가 아니었다. 임금과 조정 그리고 그 안의 백성들을 지키는 성곽이자, 왕도 한양의 경계이자 표상인 유일한 존재였다.
서울을, 그리고 조선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도성, 궁궐, 종묘를 차례로 다룰 ‘홍순민의 한양읽기’의 첫 번째 책인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궁궐, 종묘와 더불어 한양을 조선의 왕도이자 수도, 국도로 만든 도성의 역할과 상징성에 주목하고, 그 역사와 가치를 강조한다.
도성이 쌓인 자리와 그 지리를 읽으면 왜 한양이 한 나라의 수도로 선택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도성에는 조선왕조의 역사가, 도성을 쌓은 전국팔도 백성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 도성은 서울의 역사를 증언하는 거대한 기록물이자, 옛날의 한양을 오늘의 서울을 연결하는 고리다. 도성을 읽는 것은 한양, 그리고 서울을 읽는 첫걸음이다.
도성, 궁궐, 종묘로 향하는 ‘홍순민의 한양읽기’, 그 첫 번째 책
조선의 왕도 한양(漢陽)으로 500여 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로 70년을 넘기고 있는 서울. 무엇이 서울을 서울로 만들었는가? ‘수도’라는 뜻의 순우리말이기도 한 ‘서울’이라는 이름의 이 도시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나라의 중심으로 만든 세 건조물은 종묘(宗廟), 궁궐(宮闕), 도성(都城)이었다. 이제 막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에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올린 글에는 “이들은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바입니다”라고 하여 그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셋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알아보면서, 지금 서울의 밑바탕을 이루는 옛 서울 한양의 이면과 내면을 찾는 것이 ‘한양읽기’를 하는 뜻이다. 그리고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그 출발점이다.
도성은 임금과 나라의 표상이었다
흔히 도성을 “한양도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사적 제10호로 지정된 정식 명칭도 “서울 한양도성”이다. 하지만 한양을 도읍으로 삼은 조선의 도성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는 “도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도성은 “엄내외(嚴內外). 고방국(固邦國)”하기 위해 세워졌다. “안팎을 엄히 가르고, 나라를 공고히 한다”라는 뜻이다. 안팎을 엄히 가른다 함은 곧 한양의 경계를 가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오늘날의 ‘국가’와는 다른 개념으로, 임금과 조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성 역시 단순히 수도를 두른 성곽이 아닌, 임금과 나라의 권위를 보여주는 표상이었다.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도성을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을 돌아보며, 주변에 다른 문화재나 유적도 함께 돌아보면 그만인 답사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상징성과 역사에 주목한다.
도성은 한양의 내사산을 따라 쌓은 성곽이다
이 한 문장에 도성의 자연적, 지리적 위치가 담겨 있다. 한양이란 말은 그 자체로 ‘산의 남쪽, 물의 북쪽’, 즉 백두산에서부터 내려온 백두대간의 한 끝자락인 북한산, 바닷길과 강길을 이어주는 한강, 그 둘 사이에 있는 자리를 가리킨다. 북한산에서 마저 내려와 한양을 감싼 산줄기인 내사산, 즉 백악(북악산), 인왕산, 타락산(낙산), 목멱산(남산)의 능선. 도성은 그 위에 서 있다. 이러한 한양의 지리를 읽고, 내사산 중에서도 주산(主山)인 백악에서부터 타락산, 목멱산, 인왕산 그리고 다시 백악의 기슭인 창의문까지 지금의 도성을 한 바퀴 휘 돌아보는 것은 도성을 만나기 위한 첫걸음이다. 내사산을 따라, 자연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쌓은 도성의 모습은 조선시대에 많은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고, 특히 한양 인근의 명소를 즐겨 그린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의 그림에는 단골손님이었다.
도성에는 조선의 건국과 수난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도성의 역사를 읽는 것은 곧 조선의 역사를 읽는 것이다.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도성의 역사를 따라가며, 시대의 변화와 임금들의 치세를 읽어본다. 태조는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고르고 불과 두 해 겨울 만에 도성을 완성하였다. 도성을 쌓기 전에 그 자리를 직접 돌아보기도 하였고, 완공된 후에도 타락산에 오르는 등 합쳐서 세 차례에 걸쳐 도성을 돌아보았다. 조선을 건국한 창업군주로서의 과단성과 무장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다만 태조 대에 쌓은 도성은 흙으로 된 부분도 일부 있었는데, 세종 대에는 이를 석성으로 완비하였다. 실제로 수축을 주도한 것은 당시 태상왕이었던 태종인데, 백성들의 고통을 감수하고도 전국팔도에서 32만여 명을 동원하여 공사를 강행하였다. 태종은 비정하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는 스스로 나서 악역을 자처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세종은 수축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는 못했으나, 고된 노동과 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이런저런 조처를 취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도성의 역사를 보면 조선의 변화해가는 사회와 정치가 보인다
도성은 왜란, 이괄의 난 그리고 뒤이어 두 차례의 호란 때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버려져 황폐화되었다. 나라가 다시 안정을 찾은 뒤, 버려졌던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다시 세운 것은 숙종이었다. 하지만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던 개인사와 마찬가지로, 숙종은 도성의 수축에 있어서도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번복하거나, 유사시의 도피처로 북한산성을 짓는 등 도성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영조는 대대적인 공사는 벌이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정국을 주도하는 탕평 정치를 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성을 왕권 강화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영조는 목숨을 바치더라도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은 〈어제수성윤음〉을 내려 도성의 위상을 다시 세우고,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는 도성 방위 체제를 마련하고 그 중심에 자신을 두었다. 그렇기에 영조는 도성에 더욱 큰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도성은 그 몸에 수많은 기록들, 각자들이 새겨져 있다
도성 곳곳에는 300개가 넘는 각자가 성돌에 새겨져 있다. 주로 도성의 축성과 보수와 관련한 정보를 담고 있는 이 각자들은 도성을 도는 답사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료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태조 대의 각자들은 백악 정상을 기점으로 97개의 천자문 자호로 나뉘었던 도성의 각 구간을 알려준다. 세종 대의 각자들은 해당 구간을 쌓은 군현의 이름이 있어 일종의 군현 단위의 실명제를 했던 증거가 된다, 실제로 성벽이 무너졌을 때, 그 구간을 맡았던 고을의 관원들이 불려와 다시 보수를 한 기록도 남아 있다. 숙종 대 이후의 각자는 군현명이 아닌, 당시 도성의 수축을 맡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명칭과 담당자들의 이름, 공사를 한 일시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 조선 초기와는 달라진 도성 관리 체제, 더 나아가 조선의 사회의 변동을 짐작케 한다.
도성에는 백성들의 피와 땀, 그리고 삶이 배어 있다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흔히 외면당하곤 하는 백성들의 눈높이에서 도성을 바라본다. 도성을 쌓을 때 직접 돌을 뜨고, 쪼고, 나른 이들은 백성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기도 하였다. 시대에 따라 달리 다듬어진 성돌들의 모양, 각자에서 찾을 수 있는 지금은 낯설기도 한 지역명과 안이토리(安二土里) 같은 어쩐지 친숙한 이름들은 500년 긴 세월에 걸쳐 고된 성역(城役)에 동원되었던 이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도성의 존재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이도 백성들이었다. 도성문의 문루에 달린 종소리에 맞춰 일어나고 잠에 들었으며, 문이 열리고 닫힘에 따라 도성의 안팎을 왕래하였다. 도성은 임금과 나라의 권위를 보여주는 표상들 중 가장 백성들에게 친숙하고 가까운 것이었다.
높은 문 도성문. 하지만 “사대문, 사소문”은 없었다
도성이 수많은 성곽들 중 하나가 아니었듯, 도성의 문들 역시 단순히 사람과 물자가 오가기 위한 통로에 그치지 않았다. 도성문은 국문(國門), 곧 나라의 문이었다. 도성문 밖으로 쫓겨나는 것은 공식적인 처벌은 아니지만 문외출송이라 하여 중앙정계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각 성문에는 위계가 있어 임금은 대부분의 경우 숭례문으로 출입하였다. 사신들 역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에 따라 출입하는 문이 달랐다. 장례에도 그런 위계가 적용되어, 대부분의 장례 행렬은 광희문이나 소의문으로 나갔으나, 임금의 장례 행렬은 숭례문으로 나갔고, 다른 왕족들의 장례 행렬은 흥인문이나 돈의문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다만 도성문들 간에 위계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흔히 말하는 “사대문, 사소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북대문”이라고 일컫는 숙정문은 대문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돈의문 역시 “서대문”이란 이름으로 불린 적은 적어도 조선 말기 이전까지는 거의 없었다.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도성문의 이름과 별칭에 대한 막연한 통설을 받아들이는 대신, 당대의 기록에 근거하여 시대에 따라 달라진 대문-소문, 정문-간문의 개념을 확인해본다.
도성은 지금도 살아 있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종묘, 궁궐, 도성. 이 셋 중 가장 먼저 파괴와 왜곡의 대상이 된 것은 도성이었다. 근대화와 도시의 확장으로 도성은 본래의 기능을 잃고 훼손될 수밖에 없었겠으나, 나라가 망하기 전부터 시작된 도성의 훼철은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의 결과가 아니었다. 1907년에는 숭례문 좌우의 성벽이 후일 다이쇼 천황이 되는 요시히토 친왕의 방문에 맞추어 헐렸으며,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도성은 곳곳이 끊기고 소의문, 돈의문, 혜화문이 차례로 헐렸다. 해방 이후에도 도성은 관심을 받지 못해 목멱산 구간 도성의 성돌은 자유센터의 축대로 쓰이는 등 수난을 면치 못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국방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복원이 시작되었으나, 면밀한 고증과 연구 없이 성급하게 이루어져 도리어 그 가치를 훼손하기도 하였다. 지난 2008년에는 숭례문이 어이없이 방화로 불타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도성은 지금도 살아 있다. 조선신궁, 동대문운동장 등에 깔려 사라졌던 성벽의 발굴조사와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도성을 찾고 있다. 600년 동안 자리를 지킨 도성은 그만큼 길고 굴곡 많았던 서울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도성을 보면 서울이 보인다.
정보제공 :

저자소개
홍순민(지은이)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조선 후기 국가경영의 실상을 밝혀보려 공부하고 있다. 정치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꼴, 곧 문화로 탐구의 대상을 넓혀가고 있다. 도성과 궁궐에 대한 책을 쓴 데 이어 종묘, 그리고 조선시대 서울을 쓸 궁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조, 임금이 되기까지》, 《홍순민의 한양읽기: 도성》, 《한양도성, 서울 육백년을 담다》, 《조선시대사 1》(공저), 《서울 풍광》, 《우리 궁궐 이야기》등이 있다. 2017년 현재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에서 문화자원을 가르치고 있다.

목차
[上] 머리말 제1장 우리 땅 우리 서울 1 “백두산 뻗어나려 반도 삼천리” 산분수합, 산자분수령 반도 삼천리의 배꼽, 서울 2 왕도 서울 서울을 왕도로 만든 세 가지 왕도의 예복, 도성 서울 바닥 종묘사직, 다섯 궁궐 제2장 임금이 사는 곳, 궁궐 1 궁궐이란 무엇인가 궁궐, 그 낱말의 뜻 궁궐은 아닌, ‘궁’들 2 궁궐의 짜임새 오문삼조? 궁궐의 여섯 공간 3 건물 읽기 전통건축의 구조 건물의 신분 제3장 궁궐의 역사 1 첫 번째 양궐체제 궁궐 이해의 열쇠, 양궐체제 영원한 법궁, 경복궁 창덕궁과 창경궁의 탄생 임진왜란, 궁궐을 삼키다 정릉동행궁 2 두 번째 양궐체제 광해군의 무리수 둘이면서 하나인 궁궐, 동궐 서궐 경희궁 3 세 번째 양궐체제 법궁 경복궁 중건 고종의 이어, 이어, 이어 4 경운궁 단궐체제 경운궁 시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궁궐의 끝, 국망 부록 - 궁궐을 보는 눈 궁궐의 주제, 궁중문화 문화의 영역들 공간, 시간, 인간 속으로 문화유산 만나기 전통문화의 기본 관념 참고 문헌 / 주석 도판 출처 / 고서화, 고지도 [下] 제1장 경복궁 1 경복궁 예궐 광화문앞길 광화문 2 외전 조정 근정전 3 내전 편전 사정전 대전 강녕전 중궁전 교태전 경회루 4 동궁 자선당, 비현각, 계조당 5 궐내각사 수정전 궐내각사 6 생활기거공간 자경전 그 외의 영역들 7 후원 향원정, 건청궁, 집옥재 신무문과 후원 제2장 창덕궁 1 창덕궁 예궐 돈화문로 돈화문 2 외전 금천교 인정전 3 궐내각사 관청 궁궐 인정전 서편 인정전 동편 4 내전 편전 선정전 대전 희정당 중궁전 대조전 성정각 5 동궁과 그 너머 중희당 낙선재 일곽 6 후원 주합루 일원 의두합과 애련정 연경당 존덕정 옥류천 제3장 창경궁 1 돌아온 창경궁 창경궁 약사 창경궁 바로 보기 2 창경궁 답사 외전 내전 생활기거공간 후원 궐내각사 동궁 제4장 경희궁 1 경희궁을 위한 애도 서궐 경희궁 경희궁의 최후 2 경희궁을 찾아서 답사는 시간여행 ‘복원’된 곳들 자취 추적 제5장 경운궁 1 대한제국의 궁궐 ‘경운궁’의 소생 근대사의 일번지, 정동 원구단, 황궁우 2 경운궁 돌아보기 사라진 문, 옮겨진 문 외전 내전 서양식 건물들 맺음말 참고 문헌 / 주석 도판 출처 / 고서화, 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