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사회의 긴밀한 관계를 흥미롭게 탐색하고 있는 책이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며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해오고 있는 저자가 지난 10년간 개봉한 한국 대중영화 속에서 우리 사회의 제반 현상과 증후를 명쾌하게 집어낸다. 총 10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영화가 우리의 1980년대를 재현하는 방식, 다시 말해 우리 시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1980년대의 희생자이자, 시대를 건너온 퇴물 또는 그 결과물”인 현서 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봉준호의 「괴물」, 영호라는 인물을 통해 1979년부터 1999년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의인화한 이창동의 「박하사탕」, 1980년 광주의 트라우마를 담은 「꽃잎」등 다수의 영화들이 1980년대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한국영화의 어떤 증후들을 통해 무능력하거나 무책임하며 속물로 전락해버린 우리 자신과 맞닥뜨리게도 된다. 우리는 저항의 1980년대를 제대로 대면하지 않고 회피했으며, 소녀들의 억울한 죽음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가 이미 지나쳐온 영화의 장면들을 복기하면서 ‘영화사회학’이라는 또 다른 시각에서 영화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영화와 세상은 어떻게 만나는가
영화와 사회, 그 불가분의 관계를 탐색하다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가 나빠지는 걸 구경한 다음에는 세상이 나빠지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세속의 산물인 영화가 그것을 낳은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를 다시금 짐작케 하는 말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목격하는 어떤 장면들은 자주 현실에서의 그것과 비슷하게 포개진다. 이번에 출간된 김경욱의 『나쁜 세상의 영화사회학』은 이러한 영화와 사회의 긴밀한 관계를 흥미롭게 탐색하고 있는 책이다. 영화평론가로 글을 쓰며 대학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해오고 있는 저자는 지난 10년간 개봉한 한국 대중영화 속에서 우리 사회의 제반 현상과 증후를 명쾌하게 집어낸다. 저자에 따르면 “대중영화가 흥행이라는 목표를 위해 대중에게 어필하는 영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을 때, 그 시대의 욕망과 무의식, 역사적 트라우마와 사회적 증후는 어떤 형태로든 끌려나오기 마련이다.” 블록버스터 시대를 지나 이제 ‘천만 관객 시대’로 나아간 한국영화는 지금 우리 시대의 진실을 어떻게 재현해내고 있을까.
이 책에서 우리는 한국영화의 어떤 증후들을 통해 무능력하거나 무책임하며 속물로 전락해버린 우리 자신과 맞닥뜨리게도 된다. 우리는 저항의 1980년대를 제대로 대면하지 않고 회피했으며, 소녀들의 억울한 죽음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가 이미 지나쳐온 영화의 장면들을 복기하면서 ‘영화사회학’이라는 또 다른 시각에서 영화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한국 근대 이후의 시간은 기회주의자와 사기꾼이 난무하는 시대이다. 자신의 이익 앞에서 모든 것을 제물로 삼는 자들이 활개치는 불공정한 세상. 한 시대를 휩쓴 조폭영화의 유행은 결코 우연한 영화적 현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17대 대선이 있었던 2007년의 한국영화를 돌아보면, 「디 워」와 「화려한 휴가」가 있었다. 과장과 허세로 범벅된 노이즈 마케팅 영화와 역사적 사건을 스펙터클과 신파로 소비한 영화의 대결. 대선 결과는 「디 워」의 흥행 비결과 가장 근접한 유세를 펼친 후보가 선출되었다.” ―‘책머리에’에서
한국영화에서 1980년대는 어떻게 재현되고 기억되는가?
“역사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개로서 소비되었다”
총 10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영화가 우리의 1980년대를 재현하는 방식, 다시 말해 우리 시대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에 대해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1980년대의 희생자이자, 시대를 건너온 퇴물 또는 그 결과물”인 현서 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봉준호의 「괴물」, 영호라는 인물을 통해 1979년부터 1999년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의인화한 이창동의 「박하사탕」, 1980년 광주의 트라우마를 담은 「꽃잎」, 이 외에도 「화려한 휴가」 「실미도」 등 다수의 영화들이 1980년대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로 인해 역사적 사건은 축소되고 그 진실과 상처는 희석되어버린다.
「친구」 「해적」 「써니」에서 80년대는 소독차, 롤러스케이트장, 연탄아궁이, 바가지 머리 등 향수의 대상들이 전시되는 시간일 뿐이다. 영화는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어지는 참혹한 시대를 기억하지 않고, ‘기분 좋은’ 향수만을 재현하려 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한국영화의 흥행 강박증에서 찾는다. 영화가 대중과의 소통만을 목표로 할 때, 역사적 사건은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각색되며 영화의 소재로 전락해 소비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악으로 서술되는 80년대를 거절하고, 영웅의 시대로 기록되는 80년대를 부정한다. 대신 그 자리를 갚아야 할 부채가 없는 80년대, 부끄러울 필요가 없는 80년대, 우스꽝스러운 80년대가 차지한다. 동시에 더 이상 성장하기를 거절하는 유아성과 역사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는 퇴행성, 세상의 무게를 회피하려는 도피주의가 잡동사니로 뒤섞이면서 두려움과 바꿔치기된다. 1980년대의 역사적 무게는 증발하고, 코미디와 판타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해적」 「품행제로」 「몽정기」). 한국 현대사에서 1980년대를 ‘옛날이었지만 좋았던oldies but goodies’ 시절로 추억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기억의 방식인데, 이것이 십대와 이십대에게는 낯선 것들과 촌스러움으로 웃음을 안겨주고, 386 이상의 세대에게는 순수의 시대를 뒤돌아보는 위안을 선사한다. 이것이 21세기 한국영화가 1980년대를 소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47~48쪽
남북관계의 환상과 실재, 그리고 반복되는 소녀의 죽음
그렇다면 남북관계를 둘러싼 문제는 어떨까. 같은 시기에 개봉한 「의형제」와 「경계도시 2」의 환상과 실재 가운데 어느 쪽이 우리를 즐겁게 할까. 2010년 흥행에 크게 성공한 「의형제」는 전직 국정원 직원과 남파 간첩 간의 우정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2008년 이후 급속히 냉각되어가던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던 상황에서 그들의 의형제 관계는 불가능한 현실이었으나, 영화는 ‘환상’을 통해 그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냈다.
「경계도시 2」는 재독 철학자 송두율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에서 귀국했다가 다시 출국하기까지의 수난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당초 ‘철학자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의 초상’을 담고자 했던 영화는 강하게 휘몰아친 레드 콤플렉스의 광풍 속에서 ‘남북을 동시에 끌어안고자 했던 철학자를 한국 사회가 어떻게 다루었는가’로 선회하게 된다. 「의형제」에서 환상을 통해 지우려 했던 ‘실재’가 「경계도시 2」에서 송두율이라는 실존 인물의 박해 과정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다. 남북관계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비추어낸 두 영화 가운데 관객의 열렬한 호응을 얻은 것은 「의형제」이며, 이는 우리가 남북관계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그러나 저자는 관객들이 국가보안법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의 완벽한 해피엔딩에서 지나친 과잉의 불편함을, 그러니까 「경계도시 2」의 얼룩을 발견해내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현상은 ‘반복되는 소녀의 죽음’이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그리고 이창동의 「시」에서 희생자는 모두 평범한 중고생 소녀들이다. 이 무고한 소녀들의 죽음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는 그 죽음들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희생”이라는 점이다. 영화 속 가해자는 결코 잡히지 않거나 애초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존재들이며, 거기에 국가의 무능력, 무책임한 어른들의 사회적 공모가 더해지면서 ‘반복’의 고리는 더욱 견고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소녀들은 “거듭 유령으로 돌아와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폭영화의 시대
“「괴물」 「실미도」 「JSA」 「웰컴 투 동막골」 「화려한 휴가」 같은 영화들의 대대적인 흥행 성공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대와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이 영화들의 흥행 성공 뒤에 조폭영화와 그 형제들이 두텁게 진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권위주의 정권 시대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소재의 영화들에 환호하면서 동시에 그 시대의 잔재를 소비한 것이다.”―268쪽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2001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영화의 흥행을 주도했던 ‘조폭영화’의 기원과 변화 과정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그 출발점에 있는 영화가 바로 곽경택의 「친구」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태극기 휘날리며」 등 여타의 영화들이 흥행 기록을 갱신하면서도 자기만의 ‘장르’를 만들어내지 못한 데 반해, 「친구」는 조폭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게임의 법칙」이나 「초록물고기」 등 이전 영화들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게임의 법칙」과 「초록물고기」가 “꿈을 이루려다 실패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한국 사회의 성공 신화가 1990년대에는 불가능해졌음을” 보여주는 등 당시 한국 사회의 그림자를 투영해내고 있는 것과 달리, 「친구」는 “향수를 자극하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끄집어낼 뿐” 당시의 실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친구」의 변화를 통해 조폭영화는 「조폭마누라」로 대표되는 ‘조폭코미디 영화’와 「달콤한 인생」 「비열한 거리」 등 ‘갱스터 장르의 비극성을 답습하는 영화’의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조폭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으로 조폭 두목이 기업의 CEO처럼 변해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에서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이기도 하다. 실제로 ‘과거의 오야붕’들은 이제 주식투자가, 벤처 기업인, 골프장을 낀 건설업자 등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조폭영화는 지난 10년간 다른 장르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해왔다. 저자는 이 변화를 따라가며 각각의 영화들이 비춰내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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