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 저자의 신작. 거리에 응집했다 사라지는 예술, 공동체 속의 예술, 평범한 노인의 시, 철거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 타들어 가고 부스러지는 우리의 삶 안에 생생하게 존재하는 ‘그을린 예술’에 대한 사유와 증언.
그을린 예술은 타들어 가고 부스러지는 현대인의 삶, 자본주의의 격렬하고 성마른 불길에 사로잡힌 우리네 삶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꿈, 긍정성의 몸짓, 유토피아적 충동이다. 그러므로 그을린 예술은 언제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것의 얇은 살갗은 뜨거운 불길에 노출돼 있다.
그것은 철거 지역에 그려진 벽화처럼 또다시 철거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을린 예술은 불길의 위협 앞에서 웃고 노래하고 춤춘다. 살기 위해서, 조금 더 잘 살기 위해서, 조금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그을린 예술은 삶을 재창조하려 한다.
삶의 비참을 행복의 빛으로 바꾸는
꿈으로서의 예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용산 참사 이후 4년, 우리는 행복한가
일상의 예술, 범인(凡人)의 예술, 문맹의 예술,
공동체 속의 예술 등을 통해 행복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지지를 받으며,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슬픔이 없는 십오 초』, 『눈앞에 없는 사람』)을 낸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이 첫 연구서이자 산문집인 『그을린 예술』을 ㈜민음사에서 출간하였다. 심보선은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현재 우리 사회가 맞이한, 예술의 위기와 삶의 비참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전망하며, 예술을 행하고 또 삶을 사는 당사자로서 체험하고 관찰하고 느끼고 사유한, 예술과 삶의 관계를 말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거대한 영향 아래 우리 삶은 피폐해졌고, 시장 논리에 잠식당한 예술은 죽었다. 심보선은 우리가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꾸는 꿈으로서의 예술을 꿈꿔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에서 삶, 정치, 일상과 접속하며 우리 삶 속에 위태롭고도 생생하게 존재하는 예술, 자본주의의 격렬하고 성마른 불길 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이러한 예술을 심보선은 ‘그을린 예술’이라고 명명하며, 껍데기 예술 신화에 갇힌 죽은 예술과 구분한다. 예술의 죽음과 새로운 예술의 꿈을 선언하는 『그을린 예술』은 연구실에 갇힌 사회학자의 꿈이 아니다. 심보선은 몇 년간 그을린 예술의 꿈을 탐구했고, 그 꿈이 출몰하는 장소를 방문했고, 그 꿈을 실행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처음 글을 배워 시를 쓰기 시작한 여든 살 넘은 할머니의 시, 철거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 “살고 싶어서, 죽기 싫어서” 함께하는 예술 동호회의 모임 등을 목격했고, 시어를 해체하고 새로 조합하여 새로운 예술이 탄생하는 과정과 결과물을 탐색하는 예술 실험을 동료들과 직접 행하기도 했다.
『그을린 예술』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회학자의 뜨거운 연구서이자, ‘그을린 예술’의 출현과 현장을 포착한 일종의 르포이며, 공동체의 삶과 세계의 행복을 염려하며 저항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인의 진심과 열망이 담긴 산문이다.
■ 우정으로서의 예술, 삶을 함께 나누는 기쁨과 행복으로서의 예술, ‘누구나’의 예술
치열한 경쟁과 낙오의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안정된 지위를 갖추고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이들에게만 가능한 일로 보인다. 나머지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야 하기에 택하는 방법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개인적이고 ‘자기 계발’적인 차원에서 급하게 ‘힐링’을 소비하는 일뿐이다.
하지만 심보선은 보다 나은 존재로 스스로 갱신하고 고양하며 삶의 기쁨을 찾을 수 있는 길은 타인과 삶을 함께 나누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텅 빈 우정’의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여기서 ‘텅 빈 우정’이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흔히 우정이라고 이해하는 관계, 자기 몫을 키우기 위해 맺은 전략적 파트너십과는 다르다. 단지 “함께 살고 함께 존재하고 함께 지각하는 것, 그 자체가 좋고 즐겁기 때문에 맺는 타인과의 관계”를 말한다. 말하자면 영화 「허수아비」(1973)에 나오는 두 패배자 맥스와 라이언의 우정과 같은 것이다. (우연히 만난 이들은 의기투합하여 피츠버그에 세차장을 차리기로 하지만, 라이언이 어떤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의식불명에 빠진다. 그러자 맥스는 라이언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한 후 피츠버그로 떠나는데, 맥스는 신발 뒤축에 숨긴 돈까지 탈탈 털어 기어이 왕복표를 산다. 심보선은 이 우정의 현실성이 실제로 돌아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왕복표를 사기 위해 신발 뒤축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신발 뒤축을 두들기던 그 궁색한 순간에 있다고 말한다.)
심보선은 예술 역시 ‘텅 빈 우정’, 또는 “삶 자체의 함께-나눔”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예술이란 창작(해석)을 통해 고유한 삶의 형태를 빚어내고, 이 삶의 형태는 일종의 우정을 통해 타인과 나눠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속물과 동물 사이에서 가까스로 자신의 길을 확보할 수 있는 경로라고 말한다. “삶의 평범함과 궁색함을 창작과 해석, 친구-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각하고 나눌 때, 인간은 비범하고 위대해진다. 평범한 비범함, 궁색한 위대함이야말로 ‘우정으로서의 예술’이 밝히는 인간적 실존이다.” 평범하고 궁색한 삶을 부정하거나 체념하지 않고, 삶 속에서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타인과 나누는 ‘우정으로서의 예술’을 통해 우리는 인간으로서 고양되며 가까스로 자유를 되찾고 비참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심보선은 이를 ‘6?9 작가선언’에 참여했을 당시의 경험, 두리반 철거 현장에서 자발적, 자립적으로 이루어진 문화 축제의 모습 등을 통해 확인한다.
심보선이 말하는, 삶의 평범함과 궁색함 속에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이러한 행복의 가능성은 예술을 행하는 전문가 집단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예술가 숭배 신화, 스타덤을 둘러싼 경쟁 체계, 승자 독식의 논리 아래에서 예술은 이미 마술적 힘을 잃었다. 예술이 되찾아야 할 마술적 힘은 오히려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예술에서 온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70대까지 문맹이었으나 나중에 글을 배워 시를 쓰기 시작한 여든 살 넘은 할머니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낮에 농사를 짓는 할머니는 밤에 불을 밝히고 시를 쓰며 ‘행복한 피로’로 시간을 보내고, 시상이 자꾸만 떠올라 밭일에 몰두하지 못하기도 한다. 심보선은 이 할머니의 예를 통해 예술이란 “작품의 제작인 동시에 삶의 제작이기도 하다는 것, 그러한 몰두가 자아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사회질서가 자신에게 부과한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모험”이라는 진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프로이든 아마추어이든 예술적 제작 활동을 하는 ‘누구나’ 그 순간 새로운 주체로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고, 삶이 고양된다. 그 순간을 통해 우리는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을 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그 모든 ‘누구나’의 열망과 의지와 몰두는 억압적 세계에 대항하는 투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살고 싶어서, 죽기 싫어서” 행하는 좀 더 생생한 삶을 향한 존재의 드러냄이다. 심보선은 이러한 예술의 꿈, ‘그을린 예술’의 꿈을 그리며, 또한 그을린 예술이 지금 여기에 어떻게 존재하고 작동하는지 이 책을 통해 증언한다.
Information Provided B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