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만이 진단하는 우리 시대 사랑에 대한 4개의 변주곡. “이 책의 주인공은 유대 없는 인간이다.” 저자는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20세기형 인간을 특징지었다면 이제 21세기는 ‘유대 없는 인간’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런데 얼핏 이러한 진단은 우리 시대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엉뚱 맞은 소리처럼 들린다.
즉 우리 시대는 온갖 인터넷과 이메일, 트위터, 페이스북 등 온갖 ‘관계망’으로 그물처럼 얽혀 있으며, 게다가 그것은 일국의 국경은 넘어 전 지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따라서 관계의 ‘피곤’이라면 몰라도 관계의 ‘빈곤’은 상황을 영 엉뚱하게 짚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단순한 사상가를 넘어 우리 시대의 ‘구루’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지은이에 따르면 ‘피로를 느낄 정도로 관계가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모든 ‘유대’와 (진정한) 관계가 모두 사막화된 현대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즉 온갖 최첨단 통신망과 (파리에서 유행한) ‘부부 교환’ 등의 온갖 ‘엽기적’ 시도들은 모든 ‘유대’와 ‘연대’ 그리고 ‘관계’가 사라진 ‘유동적 현대’에 고독을 퇴치하기 위한 애처로운 몸부림일 뿐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소멸 이후의 가장 야심찬 이론적 프로젝트,
‘유동적 현대(Liquid Modernity)’의 주창자,
바우만이 진단하는 우리 시대의 새로운 풍경과 곤경에 대한 가장 내밀한 보고서!
보들레르의 ‘벌거벗은 내 마음’에 필적하는 ‘벌거벗은 우리 시대’ 또는 ‘현대의 우울’에 대한 네 편의 팡세.
성21세기의 한없이 유동적인 신세계에서 피어나는 ‘악의 꽃’들에 대한 고급 인문학적 성찰들!
성, 사랑, 가족, 이웃, ‘조직’ 등 모든 ‘관계’와 ‘유대’가 사라진 관계의 사막화의 시대!
현대의 ‘사막’이 낳는 여러 고독과 불안의 풍경들!
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면서도 영원한 관계를 맺는 것은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하는가?
사랑이 영원을 향해 던지는 그물이라면 욕망은 그물을 짜는 성가신 일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다. 본질 그대로 사랑은 욕망을 영속화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욕망은 사랑의 족쇄를 피하고 싶어 한다. ― 본문 1장에서
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오늘날의 고뇌는 소비하는 인간의 고뇌이다. ― 본문 2장에서
삶의 전망은 사전에 정해지고 미리 결정되어 예측 가능한 탄도미사일의 궤도가 아니라 점점 더 너무나 찾기 힘들고, 금방 사라지고, 마구 움직이는 표적을 추적하는 스마트 폭탄처럼 되는 대로 이것저것 복잡하게 조립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 본문 3장에서
지구화 시대에, 휴머니티의 공유라는 대의와 그것을 위한 정치는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거쳐온 수많은 운명적인 단계 중에서도 가장 운명적인 단계에 직면하고 있다. ― 본문 4장에서
“이 책의 주인공은 유대 없는 인간입니다. 이 책을 현대의 불안과 위험에 바칩니다.” ‘유동적 현대’(Liquid Modernity)의 정수를 보여주는 우리 시대 사랑에 대한 4개의 변주곡:
‘특성 없는 남자’에게는 ‘가능성 감각’이나 또는 ‘특성 있는 아버지’가 있다. 하지만 ‘유대 없는’ 인간은 이제 자신을 상품으로, 시장으로, 자본가로 변신시켜야 한다. 21세기의 새로운 인간학에 대한 가장 예리하고도 섬뜩한 통찰을 담고 있는 문제작!
“이 책의 주인공은 유대 없는 인간이다.” 이어 저자는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20세기형 인간을 특징지었다면 이제 21세기는 ‘유대 없는 인간’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런데 얼핏 이러한 진단은 우리 시대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엉뚱 맞은 소리처럼 들린다. 즉 우리 시대는 온갖 인터넷과 이메일, 트위터, 페이스북 등 온갖 ‘관계망’으로 그물처럼 얽혀 있으며, 게다가 그것은 일국의 국경은 넘어 전 지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따라서 관계의 ‘피곤’이라면 몰라도 관계의 ‘빈곤’은 상황을 영 엉뚱하게 짚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단순한 사상가를 넘어 우리 시대의 ‘구루’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지은이에 따르면 ‘피로를 느낄 정도로 관계가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모든 ‘유대’와 (진정한) 관계가 모두 사막화된 현대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즉 온갖 최첨단 통신망과 (파리에서 유행한) ‘부부 교환’ 등의 온갖 ‘엽기적’ 시도들은 모든 ‘유대’와 ‘연대’ 그리고 ‘관계’가 사라진 ‘유동적 현대’에 고독을 퇴치하기 위한 애처로운 몸부림일 뿐이라는 것이다. 한때 ‘삐삐’가 등장했을 때 ‘제발 누가 삐삐 좀 쳐 줘요!’라는 농담이 유행했듯이 관계의 촉매제가 관계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첨단 제품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물신주의는 종종 현실의 처참한 빈곤을 가리는 화려한 분장술에 가까운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메일의 속 내용은 사실은 ‘스팸’, 즉 쓰레기이지 않은가?
바우만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적막하기만’ 한 사상계에 ‘유동적 현대’라는 큰 시대적 화두를 던져 저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크게 주목받는 것은 그처럼 ‘큰 이야기(grand narrative)’의 적실성이 이 책의 주제인 사랑과 같은 ‘미시사’와 관련해서도 여실히 입증되기 때문이다. 아니 바우만이 보기에 이 두 흐름은 21세기에 와서는 하나이면서 둘이지 내부/외부, 환경/주체 같은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에서 바우만이 펼쳐 보이는 논의는 ‘지구화’라는 다소 추상적 개념이 ‘사랑’이라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감정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지구화’와 철저한 ‘개체화’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현대인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바우만이 보기에 인간이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양상, 즉 신 앞에선 인간이 사라진 근대에 들어와 ‘너와 나’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방식은 네 가지가 있다. 즉 양성, 즉 남녀로서 관계를 맺는 성적인 관계, 그리고 이웃으로서 관계를 맺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관계, 그리고 낯선 곳에서 온 이방인들과 맺는 ‘환대/적대’의 관계, 그리고 ‘나-우리’를 축으로 구성되는 ‘연대’ 또는 ‘함께함’의 관계가 있다. 그런데 보통 이러한 ‘인간적 관계’는 아무리 이념과 외부의 사회 현실이 바뀌더라도 극히 보수적으로 가장 느리게, 그리고 완만하게 바뀌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바우만의 진단에 따르면 그와 반대로 ‘지구화’와 함께 이러한 ‘생활세계’가 가장 참혹하고 급격한 방식으로 변화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린다. 예를 들어 푸코는 근대에 들어와 성은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역할을 한다고 프로이트의 명제를 비틀었지만 바우만에 따르면 이제 성은 천애고아가 되어 억압의 대상도 또 생산의 주체도 아니게 된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결혼률과 출산율의 급감에 의해 입증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대중물에서는 ‘우리 결혼했어요’나 ‘짝’ 과 같은 프로그램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끊임없이 ‘영원한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지속적인 관계로부터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계속 ‘간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과연 꿩도 먹고 알도 먹으려는 ‘배부른’ 짓일까 아니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처로운 난국일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이처럼 우리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든 일과 관련해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들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역으로 ‘힐링 열풍’과 ‘관계의 우울’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의 맨 얼굴을 읽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오직 소비! ‘생산, 지옥! 소비, 천국!’ 성적 욕망도, 인간적 관계도, 정치적 연대도, 생산적 자치도 모두 소비하라. 그것도 하루 밤 만에, 순식간에, 인스턴트 식으로!
21세기의 한없이 유동적인 신세계에서 피어나는 ‘악의 꽃’들에 대한 고급 인문학적 성찰들!
파리 외곽의 빈민가에서는 분노한 이민자 청소년들이 상점을 약탈했다. 하지만 런던에서는 상류층 청소년들이 호화로운 상점을 공격한다. 하지만 바우만에 따르면 이 두 사건은 ‘유동적 현대’의 동전의 양면 같은 쌍둥이 사건이다.
하지만 바우만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또 어떤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다른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도 아니다. 조금 ‘쿨’하게 말하자면, 이게 바로 자본주의고, 이제 자본주의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즉 그가 말하는 유동적 현대는 포스토모더니즘이나 포스트-자본주의가 아니라 어찌 보면 자본주의 그 자체인데, 이미 마르크스도 ‘고정되어 있던 모든 것이 대기 중으로 증발되어 사라진다’는 말로 자본주의의 이러한 본질을 간파한 바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초기에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그리고 자본주의 후기에는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대립 때문에 이러한 본질의 발현이 억압되었다가 이제 계급 대립과 이념 대립마저 ‘유동적인 것’이 되어 대기 중으로 휘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국내의 경우 21세기 초까지의 이념의 시대를 넘어 고정된 모든 것의 휘발을 가장 상징적이고 전형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마 ‘나꼼수 현상’일 것이다. 거기서는 정치와 ‘음모’가 뒤섞이고, 진보와 ‘마초’주의가 아무런 경계선도 없이 하나로 흘러 다니지 않는가. 하지만 그처럼 모든 것을 자본주의의 본질로 환원시키면 바우만의 예리한 시선이 무뎌질 수밖에 없는데, 당연히 바우만은 이 ‘휘발’과 ‘유동’의 사회학을 전혀 다른 지평 위에서 구성한다. 물론 바우만의 출발점은 역설적이고 단순하다. 즉 자본주의는 이제 ‘생산적이고’ ‘지속적’이고 ‘관계적’인 모든 것은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한때 유행했던 광고 문구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는 실제로는 자본의 모토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계급과 이념 그리고 국경은 진즉에 넘어선 채 이제 사랑, 성, 유대, 연대/함께함의 영역에까지 도도하게 흘러들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바우만은 21세기 인간은 생산자/소비자라는 패러다임을 벗어나 인간 자체가 상품이 되었다는 진단을 내린다. 즉 생산한 다음 부차적으로 삶의 재생산을 위해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이제 상품으로서 자신을 부단히 재생산하지 않으면 생산의 회로에 진입할 수 없는 황당하고 역설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자본은 강제로, 억압적으로 어떤 사람을 노동자로 만들어 ‘착취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혹적인 상품이 되라고 부추기고, 유혹하고, 꼬득이는 것이다(최근의 대학은 바로 이러한 역할을 떠맡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상품은 더 새롭고, 더 자주 바뀌고, 더 자주 자리를 바꾸지 않으면 언제라도 시장에서, 체제로부터 퇴출당할 위험에 노출된다. 아마 ‘스팩’ 쌓기와 ‘공무원 시험’이라는 청년층의 이상 열기는 자본의 이러한 요구에 대한 두 가지 정반대 대응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전자는 그처럼 신속한 변화와 변신에 대한 ‘증명’이며 후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어떤 ‘영원함’으로의 도피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올인[다 걸기]’할 수 있는 것은 이 둘 뿐이기 때문이다).
생산자 사회의 소비자 사회로의 변동의 이러한 충격을 가장 심하게 받는 것은 당연히 성, 사랑, 유대, 연대/함께함 등의 ‘인간성의 보루들’이다. 즉 자본주의 초기만 해도 이 영역은 소비의 예외 지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이제 이것은 소비재로 바뀌기 위해 가장 급격하고 가장 철저하게 환골탈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된다. 그리고 하여 ‘가정은 성(城)이다’라는 영국 속담과 달리 이제 성은 맹렬한 공격 대상이 되며, 성과 사랑도 이제는 ‘우리 결혼했어요’나 ‘짝’과 같은 상품이 되어야 한다.
보들레르가 ‘악의 꽃’, 즉 매혹적인 지옥으로 변해버린 19세기 파리를 ‘파리의 우울’이라는 에세이에 담아냈듯이 바우만은 이 ‘현대의 우울에 대한 빼어난 에세이에서 인간 그리고 인간- 됨에 대해 저 깊은 심연에서부터 길어 올린 새로운 통찰을 펼쳐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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