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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한번 안 해본 것처럼 : 박종명시집

사랑 한번 안 해본 것처럼 : 박종명시집

자료유형
단행본
개인저자
박종명 朴鍾明, 1958-
서명 / 저자사항
사랑 한번 안 해본 것처럼 : 박종명시집 / 박종명
발행사항
서울 :   심상,   2011  
형태사항
143 p. ; 22 cm
총서사항
심상시선 ;78
ISBN
9788995593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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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정보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897.17 박종명 사 등록번호 111665629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컨텐츠정보

책소개

지난 해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한 박종명 시인의 첫 시집「사랑 한번 안 해본 것처럼」이 월간 심상사에서 심상시선 78번째로 발간됐다. 「봄비」외 모두 86편의 시로 엮어진 시집에는 일상에서 놓치고 살아가는 수많은 소리 안에 숨어있는 의미체를 형상화한 정제된 작품들이 실려 있다.

평론가 박동규 교수는 시인의 이러한 창조적 시의 방법론이 새로운 한국 서정시의 지평을 열어가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울 예일여중에서 교사로 있는 박 시인은 “객쩍은 그리움을 몰고 시가 내게로 왔다.”며 “시를 만나는 기쁨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면 불면의 고통과 격랑의 세월을 훨훨 지울 수 있겠다.”고 첫 시집의 감회를 털어놓았다.

[시평]

내면의 울림과 삶의 흔적에 어린
따뜻한 인간에 관한 동경
- 박동규(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1. 시가 어떻게 한 시인의 삶속에서 피어나게 되는가 하는 것

할머니 집에 가면 하얀 한지로 방문을 깨끗하게 발라놓았었다. 할머니는 서울서 우리들이 내려올 것을 알게 되면 낡은 문창살에 붙어 있던 한지를 다 뜯어내고 새 한지로 팽팽하게 발라놓았었다. 그렇지만 이 문창살에 발라놓은 팽팽한 한지는 우리 어린 형제들이 할머니 집에 머무는 동안 여러 군데가 구멍이 뚫리거나 찢어지곤 했다. 나는 손가락을 그 구멍에 넣고 조금 넓혀서 눈을 대고 밖을 내다보거나 혹은 마당에 내려앉는 새들을 보곤 했다. 어느 겨울 나는 할머니와 자다가 한 밤에 눈을 떴다. 그 때 밖에서 ‘사르륵 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문창살 구멍 난 곳에 눈을 대고 밖을 보았더니 흰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하얀 눈만이 마당에 가득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르륵 사르륵’하는 소리가 났다. 마치 옷깃을 땅에 끄는 듯한 소리는 하얀 마당을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눈 오는 소리를 처음 들었던 순간이다. 그리고 이 소리는 평생 동안 내 귀에 남아 있어서 지금도 눈이 오는 밤이면 아파트 두툼한 유리 창가에 앉아서 귀를 세우고 눈 오는 소리를 들으려 한다.
이 눈 오는 소리가 지닌 환상의 세계는 내 어린 날의 순결한 마음의 꿈과 연결되어있고 이 소리에 대한 그리움은 나 자신 맑았던 어린 날에 대한 기억으로 이끄는 길이 되어있다.
박종명 시인의 시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인데 그의 시 속에 담겨진 소리에 관한 그의 탁월한 감각에 나는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번에 박 시인의 시집 발문을 부탁받고 나서 나는 그의 백편에 가까운 시를 살펴보았다. 박 시인의 시에는 독특하게 소리에 대한 예민한 기억이 담겨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어린 날의 기억처럼 그가 소리에 매달려있는 몇 편의 시 속에서 박 시인이 바라고 기대하고자 하는 시적 이상으로 향하는 한 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처마 밑을/봄비가 가늘게/빗금 그었다//빗소리는 늘/그 빗금을 타고 /올랐다//난
조심조심/빗소리를 /꼽았다//어느새/양손 가득 빗소리/넘치고//쨍그랑,/빗소리 하
나 떨어져/깨졌다//봄이 그렇게/왔다
-「봄비」전문

마지막이란 말/무심코 툭 던지면/탈탈탈 무성자음이/낯선 것들과 부딪는 소리/
무겁다//막다른 골목에서/발자국 몇 개/집어내려는데//종일 쏟아진 흙비/내가 버
린 무성자음을/다 쓸고 어디론가/흐른다//이제껏 살면서 못다 푼/한 마디가 무
엇일까,/자음과 모음을 자꾸/엮어 보지만//속에서 차오르는/무성음만 헛헛하여/
서걱인다
-「어느 날」전문

위의 두 시는 박 시인이 처음 시단에 등단할 때에 발표한 시이다. 이 두 편에서 박 시인이 시의 형상을 위해서 채택한 하나의 표징은 소리이다.
‘봄비’에서는 ‘쨍그랑 빗소리 하나 깨졌다’로 봄이 오는 것을 그리고 ‘어느 날’에서는 ‘속에서 차오르는 무성음만 헛헛하여 서걱인다’를 통해서 삶의 허전함을 소리로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이 예민한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는 사물의 형상은 일상에서 놓치고 살아가는 수많은 소리 안에 숨어있는 의미체를 찾아내어 시로 형상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박 시인의 예민한 감각은 바로 시로 가는 방식의 첫 과제라 할 수 있다. 사물이 주는 인상을 형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그 형상의 내면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이 시에서 내포적 영역을 확대해 가는 방식임을 생각할 때 그가 예민한 감각으로 소리의 뒤편에 감추어져 있는 이야기를 삶과 연결하여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의 독특한 감각이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실용의 현실세계에 안주하여 사물이 주는 의미를 표피적이며 현실적인 관계로 그 의미를 한정화하여 굳어진 고정된 관념으로 살아가게 되지만 박 시인은 이 고정된 관념을 풀어헤쳐 마치 퍼즐을 맞추어 가듯이 삶의 무늬를 입혀 가는 힘이 있는 것이다. 이 점이 그가 시를 쓰고 있는 이유인 동시에 시의 높은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또 한 가지 ‘비’라는 유동의 흐름을 청각적 이미지로 변용하는 그의 시적 재능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다른 세계로 이동시켜 그 사물이 지닌 내면을 보다 선명하고 의미 있게 만드는 시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공명의 파장 속에 박 시인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2. ‘나’라는 주체와 도시적 사물과의 관계

이러한 그의 시적 방법론을 따라가면 먼저 그가 대상으로 하는 사물과 나와의 관계를 만날 수 있다. 이 관계는 ‘나’ 라는 삶의 주체가 사물을 어떻게 만나며 무엇을 해독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길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박시인은 도시적 세계와 마주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삶의 공간이 도시이고 그리고 이 도시는 그가 생명의 둥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공간인 동시에 모든 감각적 상상의 시발로 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와 삶의 주체인 박 시인과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그가 담고 있는 주제의식의 성향을 알 수 있는 한 관점이 될 것이다.

거울을 본다//너무 작은 네가 보여/목이 멘다//세상이/뭉클/남은 시간들을/보채
고//거울 안으로/비껴 박힌/햇살에 환한 너//울다가 웃다가/가만히/너를/두드린

-「나에게」 전문

와락/가라앉던 밤이/환해졌다//누군가 군불을 땠는지/새떼 날갯짓 잦아들고/바
람도 모로 눕는다//깡마른 몸통이/어둠을 밀쳐내며/불침번을 선다//이력에 대한
정밀검사/며칠 지났는데//아직/소소한 통보가 없어서/길 쪽으로 기우뚱/몸을 돌
리고//귀를 열면/밀려날 기미 없는 무적이/저 혼자 느리다
-「가로등」 전문

위의 두 편의 시는 ‘나에게’와 ‘가로등’이다. 이 시에서 먼저 ‘나에게’는 거울을 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삶의 주체로 자신의 존재를 거울 안에서 파악하고 있다. 거울 안에 들어있는 주체는 ‘비껴 박힌 햇살에 환한 너’로 등장한다. 이 ‘너’는 너무 작게 보여 나를 목메게 하고 살아갈 시간의 속박에 보채게 하고 희비의 혼돈된 모습에 당황하지만 이 거울에 비쳐진 나와 다른 너를 깨뜨려 새로운 나를 만들어내게 하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다. 이와 같이 나는 거울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드러난 나의 또 다른 모습을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그의 주체적 삶의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가로등’은 도시의 가라앉은 밤을 환하게 비추는 형상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가로등은 ‘깡마른 몸통이 어둠을 밀쳐내며 불침번을 서고’ 있지만 ‘귀를 열면 밀려날 기미 없는 무적이 저 혼자 느리게’ 가는 밤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로등이 도시의 밤을 밝히고 있는 한 부분을 보여주지만 밀려나지 않는 어둠의 느린 진행이 이 가로등을 둘러싸고 있는 양상이라고 하겠다. 이에 대하여 시인은 가로등을 ‘이력에 대한 정밀검사 며칠 지났는데 아직 소소한 통보가 없어서 길 쪽으로 기우뚱 몸을 돌리고’있는 형상으로 보고 있다. 이는 시인의 심정 속에 담겨진 그의 삶에 대한 답답함이 마치 통보가 오지 않는 기다림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 자신의 한 자태로 변형되어 가로등에 입혀져 있다. 이와 같이 가로등과 나는 하나의 동질성을 지니고 그 동질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겪는 삶의 고뇌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위의 두 편의 시에서 화자와 자아는 항상 대치적 관계이면서도 이 관계 속에 동질의 삶의 지향을 보여주고 있는 점을 시인은 찾아내고 있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시적 방법에서 조금은 어설퍼 보이면서도 그만의 독특한 사물과 자아와의 관계를 설정하고 이를 통해 독자들의 마음에 정서적 환상의 공간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시작법은 관념의 체계에 따라 사물을 해독하려는 이성적 방식의 메마른 구조와는 달리 시인의 독특한 감각적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동질의 방식은 따뜻한 삶의 온기와 환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3. 다면적 시각과 삶의 총체적 해독

박 시인의 시에 담겨진 또 하나의 관심어는 나와 연결된 가족과 생활의 의미를 내포하는 언어들이다. 그가 일상에서 가장 가까이 부딪치며 살아가는 가족이나 생활에서 얻는 시적 영감을 드러내 보여주는 언어들은 반짝거리는 그의 예지를 통해서 생명과 사물의 조화로운 관계를 빚어내는 시적 구조를 창안해내려는 의도도 담고 있지만 이 의도들은 항상 조금은 밀착되지 않은 대칭적 관계에서 바라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즉 대칭적 관계라는 것은 서로 마주보기보다는 조금은 비켜서서 바라보는 것과 같이 정면이 아닌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에 정면이 이성적, 논리적 구조라면 측면은 감성적, 정서적 구조로 짜여 있음을 의미한다. 시인의 이러한 의도는 논리적 구조가 지닌 사상적 체계의 논리성에 따른 분석적 시각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보다도 사물의 내포와 암시가 지닌 정서적 세계를 서정성 있게 표현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의도가 논리적 체계성을 추구하기보다는 감각적 서정성을 사이에 끼워 놓고 있어서 나와 일상이 항상 감정의 깊은 강물을 건너서 이어져 있는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느낌은 박 시인의 시가 순수한 서정의 연마로 닦여진 농축된 표상어로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가족 관계에서 그 관계가 혈연의 숙명적 연대성에 의해 연결고리를 가지기보다는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기억이라는 회고의 양식을 통하거나 아니면 추억의 어느 순간에 떠오르는 광경에서 얻어낸 의미를 정서적 공간으로 승화시켜내는 점을 들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아버지라고 할 때 아버지의 얼굴보다 아버지가 존재해 있을 때의 그가 지녔던 심정적 고백이 기억의 순서에 관계없이 섞여서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동시적으로 표출되는 것이 한 가지 특징이다.

저녁 9시/아니 저녁 8시 47분/청계천에 나와 앉았습니다//콸콸 물 흐르는 소리
/한 켜 한 켜 제키며 듣는데/그 소리 어디쯤/아버지 목소리 섞여 있습니다//어
쩌면 딱 이만큼 어둑할 때/옛날 청계천변 동네를/다 건사하셨던 아버지/어여어
여/동네사람들 불러내는 소리// 중략
//어느 날/벼락처럼 갑자기 멈춘 심장이/오래 누우신 데서 살아나/두근두근 뛰
고 있나요, 아버지?//겨우내 문창호지 다 늘어져/새로 팽팽하게 펴 바르시던 아
버지/그 때 후후 뿜은 입김이 얼어/하얗게 서렸지요/그 서린 것들이/지금 물안
개로 피어오르나요?
-「아버지」中

그간 어찌 사셨는지/얼굴에 다 있어요//아직도/마음 내키는 대로/훨훨 사는 일
을 꿈 꿔요/하고픈 일 하 많아서//눈이 말해주네요/촉촉이 사는 일 쉽지 않은데
//종이에 사람을 담는 일/어떠세요?//교감이지요/내보이며 또 느껴주며/알콩달콩
/나를 들여다보면/느낌이 와요//이제 비로소/누군가를 들일 틈도/보이고
-「캐리커처」 전문

땡/땡땡땡/아이들에게 퍼붓던/썰을 접고/드르륵/시간을 연다//태풍 ‘뎬무’가 몰
고 온/빗방울 하나가/내 어깨의 반쪽을/툭/친다//왜?/예고 없이 오는 거잖아//
강풍에 맞서서/가슴 쓸려도/기분 좋게/자빠지던 경험//그래,/예고 없이/아찔하게
오는 거/맞잖아//사랑은
- 「예고 없이 오는 거잖아」 전문

위의 시편들은 그가 안고 있는 생명의 연대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아버지에 관한 기억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기억은 캐리커처라는 정제된 아버지의 모습에서 단서를 찾아내고 있다. 이 단서는 늘어진 문창호지를 팽팽하게 새로 바르시던 정갈한 아버지의 성격과 그리고 그 긴장과 팽팽함의 성격위에 감추어진 물안개처럼 평온한 안락의 하얀 입김의 따뜻함이 교차하는 관계를 교묘하게 대비시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캐리커처에서 숨겨진 얼굴이 드러나게 되고 그 알콩달콩 살아왔던 굴곡이 정제된 선 위로 피어나는 모습을 보게 되며 오히려 캐리커처를 통해서 여유 있게 아버지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찾아보아야 할 점은 얼핏얼핏 지나가는 구름처럼 마음에 담겨진 저 깊은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서로 다른 색깔로 채색되어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살아온 삶의 길이 총체적으로 드러나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항상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면도 보는 다각적 시각을 통해서 인간의 깊은 내면을 이해하고 이를 사랑하고 그리고 인간의 겉과 속을 모두 해독하려는 의지를 시적형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시에서 다양한 시각이 주제의 혼돈성이나 아니면 구조의 단순성을 저해할 수 있지만 박 시인에게 있어서는 다각적 시각의 관찰이 오히려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가져오는 하나의 시적 방식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한 인간의 삶에 대한 해석에 편협성을 벗어나 따뜻한 이해의 서정적 총체를 이끌어 내는 효과를 보고 있다.
박 시인은 사랑에 관한 자신의 심정적 세계를 보여주는 ‘예고 없이 오는 거잖아’에서 마치 난데없이 찾아온 태풍에 쓰러지는 모습을 통하여 그가 지닌 사랑의 한 순간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주목해 볼 점은 태풍이 몰고 온 비와 강풍은 분명하게 예측하지 않았던 순간이지만 그 순간을 바라고 있었던 듯이 사랑에 빠져버리는 모습을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분명하게 태풍은 예측을 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가 마치 태풍에 쓰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맞이하는 것은 역설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랑이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임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지만 타의적인 것과 자의적인 것의 관계가 분명하게 하나의 조화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사랑의 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바로 아버지에서 찾을 수 있었던 삶의 굴곡을 통한 이해처럼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간에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는 순행적 진행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시인이 사랑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느냐 하는 고백적 표현은 바로 단면보다는 다면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4. 위장된 고백의 진실에 관하여

박 시인의 작품들은 나를 화자로 하는 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나라는 존재의 내면에 그려진 세상의 그림을 드러내 보여주고 싶어하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욕망은 사물과의 만남을 통하여 사물이 지닌 다양한 의미층을 정제하여 서정적 세계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서정적 세계로의 변환은 바로 그가 사물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물의 본질에 가까이 가려는 의도가 앞서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이 의도는 때로는 그가 살고 있는 도시라는 공간이 너무나 짜여져 있는 조직적 형태를 가진 것이기에 그의 가슴으로 부딪쳐 얻는 상처가 클 수 있다. 그러나 박시인은 부딪쳐 생기는 상처의 아픔보다는 공간이 지닌 다양한 의미체계를 해독함으로써 하나의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재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재주는 역설적으로 위장된 고백의 형태를 가진다. 이 위장은 시의 창조적 상상을 통해서 만들어낸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우리가 너무 서러우면 ‘허허허’하고 헛웃음을 웃듯이 이 위장된 웃음의 뒤에 더 큰 슬픔이 담겨있을 수 있다. 그는 시의 표현에 겸허한 그만의 창작적 형태를 고안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그의 마음속에는 사물의 단면이 아니라 총체를 보려는 의도가 숨어있음을 말해준다.

비가/내린다//입 안에서만 맴돌던 말/싹 씻어서 흐른다//몰래 열어둔 창문에/사
정 없이 달려드는 비//주르륵 흐르며/누구를 사랑하려다/그만 들킨다/사랑 한번
안 해본 것처럼
-「사랑 한번 안 해본 것처럼」 전문

오랜만입니다//산목련 휜 자리/왔다 간 흔적마다/허리 꺾어 입을 맞추는 그림자
//그대, 산그늘에 기대어 서서/하얗게 웃어주던 날이 짧았지요//그날처럼/산바람
한 줄기 가벼이/일면//그대에게 못다 한 말을/가만히/건넵니다
-「산목련」 전문

‘사랑한번 안 해본 것처럼’이라는 표제의 시는 사랑을 고백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미리 열어놓은 창문으로 밀려드는 비처럼 어쩔 수 없이 흘러가야 하는 당위적 사랑인데 마치 사랑 한번 안 해본 사람처럼 당황해 하는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 보여준다. 왜 그는 ‘사랑 한번 안 해본 사람처럼’ 이라는 단서를 첨가하여 그가 가야할 사랑의 길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역설적으로 사랑을 바라고 있었던 것의 절실함이 마치 사랑을 해본 사람처럼 익숙하게 만들어진 것에 대한 변명일까? 아니면 사랑이란 것이 지닌 순수한 의미를 스스로 겁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한 사족일까? 우리는 여러 가지의 상상을 가질 수 있다. 이 상상은 바로 박 시인이 가지고 있는 위장된 고백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에게는 너무나 세상살이에 익숙하여 스쳐지나가는 것들로 가득 차 있어 새로운 사물의 세계를 깨닫는다는 것이 마치 다 아는 친숙한 세계를 걷는 것 같은 착각을 자아내게 하고 이 착각이 새로운 깨달음을 훼손시키는 과정을 벗어나 참다운 진실에 다가서려는 방식이라 하겠다.
‘산목련’은 짧게 산에 피었다가 가버리는 산목련의 하얀 미소처럼 어느 날 못 다한 말을 산바람 한줄기 불어오면 가만히 고백하는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이 시는 산목련이 지닌 짧은 생애의 애달픔을 승화하여 그 아름다움처럼 못 다한 고백을 풀어놓으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 의도는 ‘그림자’, ‘하얗게 웃어주던 날들’, ‘산바람’ 이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못 다한 마음의 전달을 환상으로 엮어보는 시적 기교를 통해 치밀하게 완성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이 치밀함 속에는 ‘가만히 건넵니다’와 같이 숨겨진 부끄러운 추억의 순간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세월의 여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여과는 바로 왜곡된 고백의 또 다른 형식으로 자리 잡음으로 그가 독특한 시적 발전을 가져올 발판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시인의 이러한 창조적 시의 방법론이 의도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새로운 한국 서정시의 지평을 열어가는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되리라 기대 된다. 박시인은 분명 새로운 서정시를 만들어 내는 시인으로 앞장서고자 하는 열정에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정보제공 : Aladin

목차

봄비
어느 날
카모마일
나에게

소금강 계곡에서
종 울리는 어머니
다락방
손톱달
갱식이
길상사
산목련
가로등
오팔 년 개디
멈출 수 없다
메아리
분꽃
굴비를 바르다
그림자
붕어빵 장수
연습은 없다
깻잎
잠자리
예고 없이 오는 거잖아
신동엽
금낭화
꽃집 아줌마
이력서
전환점
아버지
인사동
동피랑
참성단
무궁화
오소리
존재
눈잣나무
겨울산행
어머니
사랑 한번 안 해본 것처럼
비빔밥
실패
사과나무
해토머리
장기이식병동
어둠 속의 대화
낮잠
단추
소리
만월
라디오와 미싱
황금 연못
집에만 있는 이유
화석정에서 율곡 선생의 발소리를 듣다
풀잎
환절기

선물
백두산 사나이
이개 해변
둘째 오빠

출근길
동행
오디
입춘
밤안개
오후 7시
캐리커처
웃다가 죽을지도 몰라
시월
소크라테스
속초 밤바다
가을
단풍
눈 오는 날
세한도
친구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새 옷 갈아입고
백사실
사내
능동자갈마당
철의 차페
빚 - 故 이청준 선생님 전 -
깨워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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