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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당집림

관당집림 (Loan 9 times)

Material type
단행본
Personal Author
王國維, 1877-1927 하영삼, 역
Title Statement
관당집림 / 왕궈웨이 지음 ; 하영삼 옮김
Publication, Distribution, etc
서울 :   지식을만드는지식 :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Physical Medium
283 p. : 삽화 ; 19 cm
Series Statement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
Varied Title
觀堂集林
ISBN
9788966802777
General Note
부록: 1. 주요 청동 기물 그림, 2. 부모형자 칭위표, 3. 상대 세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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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 ▼a 지만지 천줄읽기

Holdings Information

No. Location Call Number Accession No. Availability Due Date Make a Reservation Service
No. 1 Location Main Library/Monographs(3F)/ Call Number 089.95 2012 Accession No. 111664945 Availability Available Due Date Make a Reservation Service B M

Contents information

Book Introduction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 20세기 최고의 중국학 연구자 왕궈웨이가 자기 글을 골라 엮은 선집으로, 다양한 영역에서의 탁월한 학술적 성과를 반영했으며, 중국 학술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대 사료학, 고대 기물학, 문자학, 음운학 등에 관한 정수가 이 책에 들어 있다. 정밀한 학술 논문만 수록함으로써, 분량은 단출하지만 왕궈웨이의 대표적 저작이자 엄청난 학술적 가치를 가지는 명작이 되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중국학 연구자 왕궈웨이(王國維)가 자기 글을 골라 엮은 선집으로, 다양한 영역에서의 탁월한 학술적 성과를 반영했으며, 중국 학술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대 사료학, 고대 기물학, 문자학, 음운학 등에 관한 정수가 이 책에 들어 있다. 정밀한 학술 논문만 수록함으로써, 분량은 단출하지만 왕궈웨이의 대표적 저작이자 엄청난 학술적 가치를 가지는 명작이 되었다.

≪관당집림≫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어떤 언사로도 표현이 어려울 정도로, 20세기 중국 역사학과 고문자학 분야에서 최고 저술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는 물론 중국에서조차도 아직 왕궈웨이의 학문적 정수를 모은 ≪관당집림≫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왕궈웨이 글의 내용이 전문적이고 경학과 역사학과 언어학과 민족학 등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했으며, 갑골문과 금문을 비롯한 각종 출토 문헌은 물론 전통 경전까지 망라해 인용하고 있어 번역이 까다롭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근대 중국에서 학문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수많은 업적을 쌓았던 왕궈웨이의 대표작 ≪관당집림≫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되는 의미는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왕궈웨이 이전의 학문 연구는 대부분 문헌에 근거해 문헌을, 경전에 근거해 경전을 논의했으며, 여러 경전에 근거해 한 가지 경전을 주해하고 이리저리 주석을 다는 바람에 갈수록 번잡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또 그가 학문 활동을 하던 당시는 오로지 ‘의고(疑古)’만 주장하는 학파들도 있어서 대량의 문헌을 ‘위서(僞書)’로 간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왕궈웨이는 고대 문헌에 익숙해 있었을 뿐더러 대량의 고고 발굴 자료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의 ‘문헌’과 새로 발굴된 ‘고고 자료’를 결합해 연구함으로써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국면을 개척했고, 그 결과 중국 학술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또 왕궈웨이는 근대 이후의 중국학 대가들이 그랬듯 전통 학문과 새로운 학문을 융합함으로써 뛰어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그들은 튼튼한 전통 학문의 뿌리를 갖고 있었기에 높은 감별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전통 학문을 기초로 서양의 지혜를 주체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고, 이로부터 높은 성취도 이룰 수 있었다. 이는 신학문이라 해도 중국 전통 학문의 기초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 주며, 이는 그 어떤 문명보다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이 강한 문명으로 평가받는 중국 문화를 연구할 때 꼭 지켜야 할 금과옥조라 할 만하다.
이 책에서는 갑골문, 금문, 전국시대 문자, ≪설문해자≫, 음운사, 고대 제도사, 고대 지명 고증, 고대 이민족 명칭의 고증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대표적인 글 열다섯 편을 발췌 번역해, 학문적 진수를 맛볼 수 있도록 했다.


Information Provided By: : Aladin

Author Introduction

왕궈웨이(지은이)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자는 정안(靜安), 정암(靜庵), 백우(伯隅) 등이고 호는 예당(禮堂)이며, 만년에는 영관당(永觀堂)이라고 했다가 관당(觀堂), 영관(永觀)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는 철학, 미학, 문학, 희곡사, 갑골문, 금문(金文), 고대 기물, 은주(殷周) 역사, 한대와 진대(晉代)의 목간(木簡), 한위(漢魏)의 비각(碑刻), 둔황(敦煌) 문헌, 서북지리(西北地理), 몽고사 등을 연구해 각 영역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왕궈웨이는 1877년(청 광서 3년) 12월 3일(음력 10월 29일) 진시(辰時)에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지금의 하이닝시(海寧市) 옌관진(鹽官鎭)] 솽렌항(雙仁巷)에서 태어났다. 1892년(광서 18년, 만 15세) 7월에 주학(州學)에 들어가 하이닝주(海寧州)의 세시(歲試)에 참가해서 21등으로 합격해 수재(秀才)가 된다. 이때 왕궈웨이는 그 고을에서 이름을 떨쳐 천소우첸(陳守謙), 예이춘(葉宜春), 주자요우(褚嘉猷) 등과 함께 “하이닝의 네 재주꾼(海寧四才子)”으로 불렸다. 1898년 2월에 왕궈웨이는 상하이로 가서 일을 찾던 중 친구의 주선으로 시무보관(時務報館)에 취직한다. ≪시무보≫는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왕캉녠(汪康年)이 주필을 맡고 있던 유명 시사 잡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기와 교정 일을 보았다. 3월 22일에 뤄전위(羅振玉)가 세운 동문학사(東文學社)가 개학하자 왕궈웨이는 왕캉녠의 동의를 받아 이곳에서 매일 오후 몇 시간 동안 영어와 일어,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습득했는데, 주로 화학, 물리, 수학, 지리 등의 자연과학이었다. 동문학사에서 왕궈웨이는 평생의 후원자인 뤄전위를 만난다. 1901년, 봄에 왕궈웨이는 친구 판빙칭(樊炳淸)과 함께 뤄전위의 요청으로 우창(武昌)의 후베이농무학당(湖北農務學堂)으로 가서 농업 관련 서적과 사건들을 번역하게 된다. 이해 5월에 뤄전위는 상하이에서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를 창간해 왕궈웨이에게 주필을 맡겼다. 왕궈웨이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글과 번역문을 많이 발표하게 되는데, 나중에 여기에 수록된 글의 일부를 모아 ≪정암 문집≫을 출간한다. 1902년 2월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왕궈웨이는 일본에서 스승 후지타의 권유로 이과 공부를 하게 되는데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도쿄 물리학교에 가서 수학을 공부했다. 왕궈웨이의 일본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도쿄에 머문 지 4, 5개월 만에 각기병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뤄전위의 동의를 얻어 결국 여름에 귀국하고 말았다. 1903년 3월 왕궈웨이는 퉁저우사범학당(通州師範學堂)에 부임했고 1904년 말에는 장쑤사범학당에서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이때 후지타 선생 역시 이 학교에 있었으므로 왕궈웨이는 틈나는 대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6년(광서 32년, 만 29세) 봄에 청 정부는 학부(學部)를 신설한다. 이때 뤄전위는 돤팡의 추천으로 학부에서 일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식으로 참사관(參事官)이 되었다. 이에 왕궈웨이 역시 뤄전위를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집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교육 세계≫의 원고를 집필했다. 1907년 봄에는 뤄전위의 추천을 받아 학부총무사행주(學部總務司行走)가 되었고, 학부 도서관에서 편집과 교과서 등을 편역하고 심의하는 일을 맡는다. 베이징에 온 이후 대략 이 시기부터 왕궈웨이는 철학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는데, 대략 2, 3년 전, 즉 1904년경부터 이미 철학에 대해 번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형이상학적 염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체계가 자기 자신의 견식 있는 직관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철학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가 지속된 결과 1907년경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다. 1907년은 왕궈웨이가 철학에 대한 사상적 번민을 거친 뒤 문학을 통해 ‘직접적 위로’를 얻기 위해 사와 희곡 연구로 학술 방향을 전환한 시기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해 12월에 왕궈웨이는 뤄전위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1911년 이후부터 뤄전위가 왕궈웨이의 학문에 끼친 영향은 특별하다. 뤄전위는 회의주의와 서양 관념의 영향으로 청조가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줄곧 인정하고 지원했던 왕궈웨이와 같은 사람이 학자적 의무로서 국학을 하기를 희망했다. 뤄전위는 왕궈웨이에게 국학 연구에 최선을 다해 보자고 권유했고 왕궈웨이는 이때부터 “이전의 학문을 다 버리고 오로지 경학과 역사학을 연구했다”. 1916년 1월 2일 왕궈웨이는 4년 동안 머물던 일본을 떠나 상하이로 돌아왔다. 1916년 초에 하둔이 새로 만든 잡지 ≪학술 총편(學術總編)≫의 편집인으로 고용되어 학술 잡지를 편집하면서 교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술 연구에 매진했다. 그 후 1918년부터 창성밍즈대학(倉聖明智大學) 교수를 겸임했다. 왕궈웨이는 상하이에서 약 7, 8년간을 머물렀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학술상의 업적은 풍요로웠으니 그의 유명한 논저는 모두 이 시기에 쓰였고, 명성도 점점 높아만 갔다. 1923년 음력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양종시(楊鍾羲), 징팡창(景方昶), 원쑤(溫肅), 왕궈웨이를 모두 남서방 행주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직무는 학문 강론, 서적 조사, 시 낭송, 그림 그리기, 골동품 감상 등으로 청반(淸班), 즉 소위 문학(文學) 시종지신(侍從之臣)에 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신임을 얻어 초안 작성을 돕거나 정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서방 행주라는 직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의 국민군이 베이징을 침략해 새로운 내각을 만들고 푸이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황제가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한 뒤 왕궈웨이는 후쓰의 추천을 받아들여 1925년부터 칭화대(淸華大) 국학연구원의 교수가 되었다. 칭화대학에서 왕궈웨이의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연구소에서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둘러싸였으며 그들은 모두 그를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해 주었다. 왕궈웨이는 이곳에서 그 자신의 지적 흥미를 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후에 그는 초기 몽골 시기의 역사와 지리 연구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왕궈웨이는 또한 국가적 사업으로 서북 변경 지리(西北邊疆地理)와 요(遼), 금(金), 원(元)의 역사를 연구했다. 당시 그는 학계의 거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 되었는데, 거의 쉰이 다 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와 고대 소수 민족 문자에 정통한 소장학자 뤄쥔추(羅君楚, 당시 20여 세)와 천인커(陳寅恪, 당시 30여 세)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할 정도로 학문에 정열을 쏟았다. 청화원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던 그는 1926년 말엽 일련의 심각한 사건을 겪으면서 우울해졌다. 1926년에 그의 장남이 사망한 데다 장례 문제로 그의 아내와 며느리(뤄전위의 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오랜 후원자인 뤄전위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게 된다. 게다가 1927년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시대의 불안감은 극대화되었고 그는 나라의 미래와 황제의 안전에 대해 낙담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이었고 자살하기 바로 전날인 1927년 6월 1일에 삶의 허무와 체념을 드러낸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오전 이허위안(頤和園) 쿤밍호(昆明湖)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몸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 세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니, 옳음으로 다시는 욕되지 않으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왕궈웨이에게 “충각(忠悫)”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하영삼(옮긴이)

경남 의령 출생으로, 경성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인문한국플러스(HK+)사업단 단장, 세계한자학회(WACCS) 상임이사로 있다. 부산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100개 한자로 읽는 중국문화>, <한자와 에크리튀르>, <부수한자>, <뿌리한자>, <연상한자>, <한자의 세계: 기원에서 미래까지>, <제오유의정리와연구(第五游整理與硏究)>, <한국한문자전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 시대>(장광직), <허신과 설문해자>(요효수), <갑골학 일백 년>(왕우신등), <한어문자학사>(황덕관), <한자 왕국>(세실리아링퀴비스트, 공역), <언어와 문화>(나상배), <언어지리유형학>(하시모토만타로), <고문자학첫걸음>),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최술,공역), <석명(釋名)>(유희,선역), <관당집림(觀堂集林)>(왕국유,선역)등이 있으며, “한국역대자전총서”(16책) 등을 공동 주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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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of Contents

목차 
해설 = 7 
지은이에 대해 = 25 
'생패'와 '사패'에 대한 고찰(生覇死覇考) = 29 
'굉'에 대한 설명(說◆U89E5◆) = 45 
'화'에 대한 설명(說◆U76C9◆) = 55 
사주편소증 서(史◆U7C40◆篇疏證序) = 60 
모공정고석 서(毛公鼎考釋序) = 73 
송대금문저록표 서(宋代金文著錄表序) = 77 
전국시대 진나라에서는 '주문'을 썼고 육국에서는 '고문'을 썼다는 설(戰國時期秦用◆U7C40◆文六國用古文說) = 81 
"지금 소전체를 먼저 배열하고 고문과 주문을 뒤에 덧붙였다"는《설문해자》의 체제에 대해(說文今◆U6558◆篆文合以古◆U7C52◆說) = 85 
주대금석문운독 서(周代金石文韻讀序) = 89 
은 복사에 보이는 '선공ㆍ선왕'에 대한 고찰[殷卜辭所見先公先王考] = 93 
은 복사에 보이는 '선공ㆍ선왕'에 대한 고찰의 속편(殷卜辭所見先公先王續考) = 148 
은주 제도론(殷周制度論) = 167 
'상'에 대한 설명(說商) = 221 
'박'에 대한 설명(說◆U4EB3◆) = 226 
귀방ㆍ곤이ㆍ험윤에 대한 고찰(鬼方昆夷◆U7381◆◆U72C1◆考) = 234 
부록 
 주요 청동 기물 그림 = 277 
 부모형자 칭위표 = 280 
 상대 세계표 = 282 
옮긴이에 대해 = 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