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김영민 교수의 '동무론' 3부작 완결판. 이번 책은 동무 관계를 맺고 이어가는 구체적인 활동으로서 ‘비평’을 새롭게 정의하고, 동무들이 꾸려가는 모임(동무공동체)의 정신과 메커니즘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모색한다.
김영민이 보기에 철학은, 앎은, 인문이란 함께 사유하고, 대화하고, 생활하며, 새로운 것을 희망할 때 비로소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가 오랫동안 ‘동무’라는 관계에 관심을 기울여온 까닭은, 인문을 깨우치는 일이 필연적으로 타자와 함께여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울림의 공부, 공부가 된 생활, 생활이 된 공부라 그가 부르는 동무들의 활동, 즉 ‘비평’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비평’은 무엇인가. 비평은 ‘~비평가/이론가’들이 문자와 이론을 해석하고 재배치하는 작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인식의 노동’이라기 보다는 ‘체계의 노동’이나 ‘정서의 노동’에 방점을 두고, 허영과 질투와 나르시시즘을 거슬러, 앎이 머리보다는 몸에 잘 배인 동무들끼리 서로를 응대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결국 비평은 이론이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다.
동무론 3부작의 완결편
철학자 김영민이 오랫동안 조형해온 ‘동무’론의 완결편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를 출간한다. 앞서 펴낸 <동무와 연인>(2008, 한겨레출판)과 <동무론>(2008, 한겨레출판)이, 각각 동서양 사유의 대가들 사이의 지적 교우 관계를 매개 삼아 (친구도 동지도 연인도 아닌) ‘동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실마리를 던지거나 ‘동무’라는 관계를 철학적으로 정교화한 작업이었다면, 이번 책은 동무 관계를 맺고 이어가는 구체적인 활동으로서 ‘비평’을 새롭게 정의하고, 동무들이 꾸려가는 모임(동무공동체)의 정신과 메커니즘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모색한다.
비평은? 비평의 숲은? 동무공동체는?
김영민이 보기에 철학은, 앎은, 인문(人文 혹은 人紋)을 깨우치는 일은 개인으로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사유하고, 대화하고, 생활하며, 새로운 것을 희망할 때 비로소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이다. 그가 오랫동안 ‘동무’라는 관계에 관심을 기울여온 까닭은, 인문을 깨우치는 일이 필연적으로 타자와 함께여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울림의 공부’, ‘공부가 된 생활’, ‘생활이 된 공부’라 그가 부르는 동무들의 활동, 즉 ‘비평’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김영민이 말하는 ‘비평’은 ‘~비평가/이론가’들이 문자와 이론을 해석하고 재배치하는 작업(특히 제도권 학제의 바탕인 “대학원에서 행해지는 부정적 비판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인식의 노동(슬기)’보다는 ‘체계의 노동(근기)’이나 ‘정서의 노동(온기)’에 방점을 두고, 허영과 질투와 나르시시즘을 거슬러, 앎이 머리보다는 몸에 잘 배인 동무들끼리 서로를 응대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결국 비평은 이론이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러한 비평의 활동이 이루어지는 물리적·정서적인 공간이자 동무들 간의 네트워크가 ‘비평의 숲’인 것이다.
인문학(적 교양)의 죽음과 그 적들
김영민은 ‘비평인문학 서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인문학적 교양과 그 적들」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이 지향하는 ‘비평의 숲’을 산책하는 동무공동체의 모습을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그는 인문학과 인문학적 교양이 엄연히 다른 것임을, 현재의 자본제적 삶에 얹혀 있는 교양이란 필연적으로 본래의 인문학이 결별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특유의 ‘아닌 것’을 잡아내는 작업을 통해 ‘그러한 것’의 윤곽을 그려내는 김영민식 글쓰기를 보이고 있는 이 글에서 그가 인문학적 교양의 적이라 칭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다. 우선 제도인문학의 안팎에서 어슬렁거리는 두 부류의 속물들이 있다. 안짝에 있는 이들이 소위 ‘전문가’들로, 이들은 “스스로의 생각을 생성시키지 못한 채 수입한 이론들을 회집, 분배, 거래하는” ‘삯꾼’ 노릇을 한다. 제도인문학 바깥에 있는 이들은 ‘딜레탕트’라 부르는데, 그들은 “제도권 인문학에 등을 돌린 대중들의 키치화된 교양에 대한 욕구를 재생산하거나” 소비를 부추긴다. 두 번째 인문학적 교양의 적들은 ‘건달’이다. 그들은 ‘교양’의 내용은 거부한 채, 티내기 차원에서 자신의 사회적 자본을 뻥튀긴다. 세 번째 적은 자신들이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진리(그것이 신이든, 돈이든)에 파묻혀 교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신자(信者)’들이다. 마지막 적으로 꼽는 것이 ‘소비자’라는 이름의 구경꾼들인데 그들은 “교양을 살 수 있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실제로 구매하(려)는 이들”로서 자본제적 체제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한편, 김영민이 가장 공들여 ‘동무로의 길’을 권면하는 부류이다.
“소비하는 개인이 되어 여러 강좌들을 구경하지만 말고, 개입하고 동참하고 더불어 나누고 고민하면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톺아내는 노동 속에 이드거니 연대하시기 바랍니다. 동무의 씨앗이 상처받고 걷는 일이라면, 그 꽃은 현명한 개입의 속도랍니다.”
여기에서 김영민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교양의 적들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습성, 즉 허영(속물)이나 몰염치(건달), 맹목(신자), 그리고 무지(소비자)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러한 습성을 걷어낸(혹은 걷어내려 노력하는) “‘몸이 좋은 사람’들인 동무들이 타자와 사물을 향해 걸어가는, 함께 살아가고 어울리는, 나누는, 그리고 그 주변을 변화시키는 그 전부가 비평”인 것이며, 그것이 비록 아직 “전례가 없는 꿈”이지만, “지며리 몸을 끄-을-고” 가야할 길임을 밝힌다.
상처를 무릅쓰고 다시 산책에 나서다
김영민은 이 책을 펴내면서, 지난 2001년 <보행> 출간을 시작으로 그간 다듬어온 자신의 2기 철학이 매듭된다고 말한다. 그 10년의 세월 동안 대학교수와 야인 생활을 오가며, 그가 애써 벼려온 ‘동무’와 ‘동무공동체’의 중심이었던 <장미와 주판>(1992~2009)이 해체되는 상처를 겪기도 했다(그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동무공동체를 꾸려가는 핵심적인 활동이 인식의 경쟁이나 인정 투쟁이 아니라 삶의 낮은 자리에서의 비평과 개입임을 밝혀 놓은 결과물이 이 책일 것이다). 애초부터 동무에 이르는 길은 어긋남과 어울림의 길항 사이에 놓여 있는 긴 여정이며, 그에 수반하는 상처와 슬픔은 ‘사람이라는 존재의 무늬[人紋]’의 결을 이루는 불가피한 요소라는 사실은 그 자신이 누누이 강조한 바이다.
제도(대학 혹은 자본제적 체제)의 안팎에서 그것들과 생산적으로 불화하며, ‘자생적 사유’, ‘산책’, ‘어울림의 공부’, 그리고 ‘동무’라는 새로운 길을 터온 철학자 김영민, 이제 그의 다음 산책은 어떤 길 위에 겹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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