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상세정보

상세정보

말하는 입과 먹는 입 : '종언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사유의 모색 (36회 대출)

자료유형
단행본
개인저자
김항
서명 / 저자사항
말하는 입과 먹는 입 = Das sprechende Mund und das speisende Mund : '종언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사유의 모색 / 김항 지음.
발행사항
서울 :   새물결 ,   2009.  
형태사항
336 p. ; 20 cm.
총서사항
What's up 총서
ISBN
9788955592696 9788955592290(세트)
000 00784camccc200265 k 4500
001 000045579944
005 20100805052213
007 ta
008 100309s2009 ulk 000c kor
020 ▼a 9788955592696 ▼g 94100
020 1 ▼a 9788955592290(세트)
035 ▼a (KERIS)BIB000011574391
040 ▼a 211014 ▼d 211009
082 0 4 ▼a 320.1 ▼2 22
090 ▼a 320.1 ▼b 2009z6
100 1 ▼a 김항 ▼0 AUTH(211009)44040
245 1 0 ▼a 말하는 입과 먹는 입 = ▼x Das sprechende Mund und das speisende Mund : ▼b '종언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사유의 모색 / ▼d 김항 지음.
260 ▼a 서울 : ▼b 새물결 , ▼c 2009.
300 ▼a 336 p. ; ▼c 20 cm.
490 0 0 ▼a What's up 총서
740 ▼a Sprechende mund und das speisende mund
900 1 1 ▼a Kim, Hang
945 ▼a KLPA
949 ▼a 왓츠 업 총서

소장정보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중앙도서관/제2자료실(3층)/ 청구기호 320.1 2009z6 등록번호 111570655 도서상태 대출중 반납예정일 2023-12-18 예약 서비스 M
No. 2 소장처 중앙도서관/제2자료실(3층)/ 청구기호 320.1 2009z6 등록번호 111570656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컨텐츠정보

책소개

저자는 이 책에서 ‘카오스모스’라는 안개에 휩싸인 오늘날의 시대가 요청하는 젊음의 사유, 민족(주의)이 아니라 글로벌한 시각에서 출발하는 폭넓은 사유를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서 제시해보려고 한다.

인문학계는 1900년대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인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처럼 지적 침체와 무기력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이 쉽게 쓰레기가 되며, 호모 사케르, 즉 살아 있되 죽어 있는 자가 부지기수로 양산되고 있다.

이 책은 이처럼 복잡하고 온갖 것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벤야민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 새로이 배치해 앞으로의 사유의 항로를 탐색하려는 진중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과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칼 슈미트가 저자가 호출하는 새로운 성좌들인데, 이러한 이름만으로도 벌써 우리 지식계에서는 논란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자연적이고 본래적인 것을 인위적이고 비본래적인 것으로 전유하는 분할과 결정이라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목소리를 언어로, 생명을 법으로 이끄는 폭력이며, 그렇기에 인간이 스스로(동물/자연)를 부정하고 스스로(인간/작위)가 되려는 운동이기도 하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해주는 이러한 폭력이야말로 ‘정치적인 것(das Politische)’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에 다름 아니고 말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

여기 글로벌한 사유의 새로운 젊음이 있다.
포스트모던과 ‘탈주’를 넘어 새로운 개념들의 성좌들을 통해 지적 무기력증에
빠진 우리에게 던지는 젊은 사유의 과감하고도 지적인 도전장!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젊음의 사유는 ‘바로 여기 오늘날의 로두스 섬에서’, 글로벌하게 그리고 생명을 둘러싼 정치를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카오스모스’라는 안개에 휩싸인 오늘날의 시대가 요청하는 젊음의 사유, 민족(주의)이 아니라 글로벌한 시각에서 출발하는 폭넓은 사유를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서 제시해보려고 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인문학적 담론을 이끌어온 소위 386세대가 아니라 1990년 세대, 즉 광주와 1987년 세대가 아니라 서태지와 IMF 세대인 1990년대 세대를 대표하는 신진 ‘사상가’ 중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는 저자의 신선한 문제의식과 과감한 도전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우리 인문학계의 새로운 풍향을 가늠하는 데 여러 가지 시사점을 준다.
인문학계는 1900년대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인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처럼 지적 침체와 무기력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인문학’이 아니라 ‘인간’이 쉽게 쓰레기가 되며, 호모 사케르, 즉 살아 있되 죽어 있는 자가 부지기수로 양산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자본주의의 새로운 대두에 대해 ‘탈주’ 등의 대안이 제시되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본이 노동(력)을 체제 바깥으로 ‘탈주’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지식계 일각에 공고히 자리 잡고 있는 민족주의 흐름도 자본주의의 ‘제국’화와 동요 앞에서는 비판적 예각을 잃어가고 있다.
이 책은 이처럼 복잡하고 온갖 것이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벤야민의 용어를 빌리자면) 새로운 사유의 성좌들 속에 새로이 배치해 앞으로의 사유의 항로를 탐색하려는 진중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과 조르조 아감벤 그리고 칼 슈미트가 저자가 호출하는 새로운 성좌들인데, 이러한 이름만으로도 벌써 우리 지식계에서는 논란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저자에게 벤야민은 ‘비평가’가 아니라 ‘정치 이론가’이며, 슈미트 역시 ‘나치즘’을 탈색한 정치이론가일 뿐이다. 저자는 이들 모두를 정치철학적으로 새로 독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2000년도까지 한국 지식계의 주요 참조항이었던 마르크스나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을 모두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도전임과 동시에 새로운 논쟁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입장일 것이다. 실제로 말년의 푸코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일찍 알았더라면’이라고 회고한 바 있듯이 저자의 이 책은 프랑스 철학의 숨은 배후였던 1920~1930년대 독일 사상가들을 배경으로 우리 시대를 새로이 독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동시에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몰두해 있던 우리 사상계에 새로운 좌표축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말하는 입에서 먹는 입으로

이 책은 자연적이고 본래적인 것을 인위적이고 비본래적인 것으로 전유하는 분할과 결정이라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목소리를 언어로, 생명을 법으로 이끄는 폭력이며, 그렇기에 인간이 스스로(동물/자연)를 부정하고 스스로(인간/작위)가 되려는 운동이기도 하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해주는 이러한 폭력이야말로 ‘정치적인 것(das Politische)’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에 다름 아니고 말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한국에서 1980년대가 이데올로기의 시대이고 1990년대가 문화의 시대였다면 오늘날처럼 일상에서 정치와 경제 또는 그와 관련된 용어들이 거리낌 없이 쓰인 적도 드물 것이다. ‘전 지구적 테러’에 맞선 테러와의 전쟁 또한 우리를 공항 검색대에서, 선진국의 도심에서 심심찮게 가로막는다. 이전의 안보 위기와 달리 경제 상황에 따른 ‘국가 위기’ 또는 그에 대응하기 위한 갖가지 조치들이 일상의 평화를 혼돈 속으로 몰고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오늘날의 사상과 철학들에서는 그와 관련한 시원한 해답을 찾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우리가 ‘정치적’이라고 알고 있던 것들은 이제 의미를 거의 상실한 듯 보이기까지 한다. 이런 상황은 ‘경제’에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경제’가 크나큰 화두였던 지난 대선이후 바로 ‘경제’는 장밋빛 꿈에서 악몽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경제는 달콤한 과일에서 생계와 ‘일자리’ 문제로 줄어든 지 오래이며, 이 생계 문제는 용산 철거 현장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서처럼 폭력과 함께 도심 한복판에서 아찔하게 펼쳐진다. 이제 문화나 이데올로기는 정작 종말을 고하고 모든 것이 정치화되고, 모든 사람이 ‘정치적 동물’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경제 또한 ‘일상의 풍요’를 위한 달콤한 과일에서 글로벌 경제 위기와 함께 생계 혹은 생존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공포의 대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제 경제는 갈수록 초라해지고 정치화는 점점 일상적으로 첨예화되는 시대가 우리가 사는 새로운 시대의 초라한 초상이지 않을까? 이처럼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의 새로운 위상은 자본과 국가 그리고 정치와 관련해 어떠한 모습을 그려나갈까?

일상의 문제에서 거대하지 않은 담론으로 ― 정치적인 것이 일상의 핵심으로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말하는 입과 먹는 입 어느 쪽과도 일치할 수 없으며”,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분할, 혹은 결정하는 것은 원래부터 정치 고유의 활동이었다. 그 분할과 결정이라는 ‘정치적인 것’을 구성하는 최소단위의 다른 이름이 폭력이고 말이다. 폴리스(도시 국가)의 성립과 함께 정치는 폴리스 바깥의 인간과 폴리스 안의 인간, 그러니까 먹는 입과 말하는 입을 끊임없이 분할하려 했다. 먹는 입은 폴리스의 탄생과 함께 폴리스 밖으로 떨어져 나갔으며, 폴리스는 이 먹는 입을 배제함으로써 폴리스 내부의 존재인 말하는 입과 함께 폴리스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는 입이 폴리스의 성립과 함께 만들어진 이상 이 분할은 불가능한 시도이다. 폴리스 자체에 이미 이 먹는 입이 탄생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폴리스는 애초에 나누어질 수 없는 두 요소를 ‘분할’이라는 과정을 통해 나누며 자신의 존재를 존립시켜왔던 것이다. 이런 불가능한 분할의 시도, 소위 ‘법-권리와 몸-생명, 달리 말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반복해서 분할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정치라는 것의 불가능하면서도 유일한 실천’이다. 그러나 이 둘은 둘로 분할할 수도 없거니와, 이 분할을 멈추기 위해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는 일은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정치와 폭력은 쌍둥이로 태어났기에, 그리고 정치가 시도하는 분할과 결정이라는 폭력은 종종 실제의 폭력으로 드러나기에 말이다. 저자는 그 예를 독일의 나치즘과 한국의 광주에서 찾아낸다.

순수하고 고귀한 혈통과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로 정치의 대상을 ‘결정’한 나치즘은 강제수용소를 통해 특정한 혈통과 육체를 말살했다. 따라서 법-권리와 몸-생명의, 즉 법적 주체의 가면을 벗겨 발가벗게 된 생명체가 폴리스의 주체와 대상이 되었던 것이고, 그 결과는 야수들의 올림픽이었다.
- 본문 중에서

그 순간 광주는 한국 지도에서 사라졌다. - 본문 중에서

저자에 의하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정’이 아니며 지금까지 그래왔듯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분할하려는 끝없는 시도를 반복하는 일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분할과 결정을 불러오는 존재 자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으로 ‘분화된 인간’ 자체를 없애는 일이다. 기묘한 전도를 거쳐 모순적이게도 ‘분할로서 정의된 인간’을 없애야 한다. ‘가면과 속살을 송두리째 없애야 하고’, ‘이미 분할된 두 가지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를 없애야 한다.’

인간은 먹는 입과 말하는 입 어느 쪽과도 일치할 수 없다. 법-국가 안에서는 말이다. 그는 이미 죄짓고 속죄 받은 존재이며, 말하면서 먹는 존재일 뿐이다. 이를 분할하려는 불가능한 반복된 시도에 붙여진 이름이 폴리스이며 주권자이며 정치이고, 그 시도의 대상에 붙여진 이름이 `인간`, `주체`, 혹은 `자아`일 것이다. 이 `인간`을 없앴을 때, 즉 인간을 `면죄`했을 때 들뢰즈-가타리의 입, 즉 내재성으로 충만한 기계가 풀려나오는 것 아닐까? -본문 중에서

물론 이런 시도는 말 그대로 극한의 상상일 뿐이고 가능하지도 않다. 그 시도의 끝에 우리가 보게 될 것은 이미 ‘인간’이라는 주체가 불필요해진 사유의 한 단편일 뿐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저자는 인간에게 존재했던 근대의 시간, 그 시간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검토해나간다. 그리고 이 관찰과 검토의 과정은 말 그대로 전세계의 사유를 넘나드는 과감하고 스펙터클한 여정이다.

다루는 대상에 ‘국적’은 없다. …… 국적-국가-국민이 정치적인 것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되었던 사정, 바로 그 근대적 분식의 계보를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권국가가 최소단위가 된 지도를 과감하게 폐기처분하고, 땅과 바다 위에서 존재했고 존재하는 사물 및 생명과,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자유롭게 오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우리’와 만날 수 있다면 과감하게 마주할 것이고 말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결코 도착할 수 없는 열차를 타고 떠나며 지나치는 차창 밖의 풍경들을 보기 위해, 종착지가 없을 이런 여정을 떠나며 작가는 차분한 관찰과 검토를 시도한다. 이 검토는 아렌트, 푸코, 칼 슈미트, 발터 벤야민, 들뢰즈-가타리를 위시하여, 자크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마루야마 마사오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상가들이 반짝이고 있는 성좌를 확인해나가는 일종의 ‘탐험’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저자는 벤야민과 슈미트의 기묘한 만남, 그리고 이 두 걸출한 사상가가 공유하고 있는 1848년의 보편적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성급한 ‘역사의 종말’을 지나, 푸코, 데리다, 들뢰즈를 거쳐 조르조 아감벤의 ‘역사의 종말’을 향한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사이사이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걸음을 멈추게 하는 유혹적인 성좌들을 지나는 이 여정이 유럽으로, 미국으로, 가까운 일본으로,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 우리는 정치가 일상에 숨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뒤편에서, ‘정치적인 것’이 일상의 핵심으로 진입하고 있는 진정한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논리와 역사가 아무리 완벽하게 스스로를 과시하더라도, 역사가 남길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완전히 말소해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에티카는 이 남은 것, 즉 곰의 외침에서밖에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마 인간이 되고자 한 저 곰은 동굴에서 아직 탈출하지 않았으리라. 그렇다고 포기한 것은 아니다. 저 곰은 동굴로부터의 탈출을 되풀이 할 뿐이다. 이 반복이야말로 광주의 에티카이며, 역사적 기억에서 결코 국가가 완전하게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적”인 셈이다. - 본문 중에서


정보제공 : Aladin

저자소개

김항(지은이)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도쿄대학교에서 수학했고, 표상문화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된 관심은 문화이론 및 한일 근현대 지성사이며 지은 책으로는 『말하는 입과 먹는 입』(2009), 『제국일본의 사상』(2015), 『종말론 사무소』(2016)이 있고, 옮긴 책으로 『예외상태』(2009), 『정치신학』(2010) 등이 있다.

정보제공 : Aladin

목차

What's up 총서를 발행하며 = 5
감사의 말 = 11
서론 = 13
01 새로운 성좌를 찾아서 
  말하는 입과 먹는 입 = 23
02 새로운 성좌의 좌표들 
  독재와 우울, '최후의 인간'을 위한 결정 혹은 각성 = 45
  국가, 전쟁, 노마드 = 95
  댄디와 주권 = 133
  탈관계의 관계, 관계의 탈정립 = 157
03 몇 가지 성좌의 배치들 
  정치 없는 국가, 국가 없는 역사 = 195
  홀로, 다시 또 다시, 나-서기 = 237
  아직 사람을 먹지 않은 아이를 구하라! = 271
  국가의 적이란 무엇인가 = 295
주 = 316


관련분야 신착자료

Berger, Stefan (2023)
박장호 (2022)
김성민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