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경제위기와 맞물려 맑스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는 이때, 현 사태를 맑스경제학적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한국 내 흔치않은 맑스경제학 전공자인 저자는 국가 중심의 대안 모델(장하준)을 부분적으로 비판하면서 ‘시장 대 국가’의 논쟁구도에서 벗어나 ‘자본 대 공공성’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또한 주류경제학의 폐쇄적 태도를 지적하면서도 교조적 맑스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먼저 생각한다’는 어원에서 출발했듯, 경제학은 현실의 문제와 해결책을 ‘먼저 생각하는’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이기를 저자는 희망한다.
심각한 경제위기와 맞물려 맑스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는 이때, 현 사태를 맑스경제학적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한국내 흔치않은 맑스경제학 전공자인 저자는 국가 중심의 대안 모델(장하준)을 부분적으로 비판하면서 ‘시장 대 국가’의 논쟁구도에서 벗어나 ‘자본 대 공공성’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또한 주류경제학의 폐쇄적 태도를 지적하면서도 교조적 맑스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먼저 생각한다’는 어원에서 출발했듯, 경제학은 현실의 문제와 해결책을 ‘먼저 생각하는’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이기를 저자는 희망한다.
맑스경제학적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경제위기
맑스경제학적 프레임은 최근의 경제위기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개념틀을 제공한다. 저자는 현 세계 금융위기는 1980년대 이후 세계경제를 주도해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구축한 ‘만물의 상품화’라는, 즉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치환해버린 과정에 따른 필연적 결과물이라 평가한다(2·3장). 특히 이번 금융위기의 시발점이 된 고위험·고수익 상품인 써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 위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이는 금융의 버블로 이어졌다(10장). 금융버블의 붕괴로 표출된 세계 경제위기는 맑스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기술발전에 따른 자본구성(불변자본/가변자본,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비율)의 고도화가 낳은 이윤율의 변동에 그 근본원인이 있다(7장).
쉽게 생각해서 이윤율은 투하한 자본으로 얼마의 이익을 산출하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투하자본을 구성하는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비율이 바뀌면서 이윤율도 변동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이윤율은 일방적으로 하락하기보다 이를 막는 다른 요인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변동이 발생한다. 공황과 호황을 주기적으로 반복한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이는 쉽게 확인된다. 예컨대 1970년대의 장기불황은 이윤율의 주기적 변동과정에서 지속적 저하가 있던 시점이었다(9장). 당시 자본은 이윤율의 지속적 하락이라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융화와 정보화 같은 전지구적 차원의 새로운 잉여가치의 창출을 시도했고 이것이 현재의 금융위기를 추동한 원인이 됐다(6장). 이처럼 잉여가치율 향상을 위한 시도는 한 국가적 범위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같은 섬세한 통제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4장). 이렇게 새로워진 자본축적 방식에 노동자는 더이상 연대로서 저항하지 않는다.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노동착취의 산물인 저렴한 상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로만 노동자의 정체성이 머물러 있음을 저자는 안타까워한다(8장).
국가의 귀환: ‘시장 대 국가’ → ‘자본 대 공공성’(11장)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국가의 역할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간과한 공익을 국가가 채워주기를 바라는 대중의 관심 속에서 국가는 크게 부각돼왔다. 특히 자유시장이라는 메커니즘이 낳을 수밖에 없는 비효율적 거래비용을 정부가 적절히 개입·통제함으로써 더 효율적인 경제운용이 가능하다는 장하준의 주장은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국가의 역할을 방기한 신자유주의식 한미FTA 체결은 반대하지만, 국가의 적절한 경제개입의 성공사례로서 박정희식 개발 모델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면에서 기존 진보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물론 국가(정부) 중심의 장하준식 대안 모델을 단순히 군사정권 시절의 암울한 기억에만 의존하여 거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시장 대 국가’라는 구도를 ‘자본 대 공공성’의 프레임으로 바꿔놓고 생각하면, 국가 또는 정부개입이 바로 공공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맑스식으로 표현하면, 국가는 무색무취한 중립적 실체가 아니라 그 자체가 계급적 기반을 갖기 때문이다.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지위에 있는 지배세력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의 기득권 재생산을 위한 방향으로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국가의 계급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가의 좋은 면만을 입맛대로 취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박정희체제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장하준식의 ‘시장 대 국가’라는 단순화된 논쟁구도 자체는 수정이 필요함을 저자는 지적한다.
새로운 세대에게 제공하는 또 하나의 시각
현재의 주류경제학은 자신의 타자인 맑스경제학을 무시한 채 자폐증을 앓고 있으며, 경제학 밖에서는 모든 것을 주류경제학적 관점으로 재단해버리는 제국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맑스경제학에 과도한 정치적 기대를 품었던 20세기 국가사회주의는 맑스의 이론을 완벽하게 ‘정리된 지침’으로 생각했고, 이런 ‘정리된’ 맑스경제학은 권력자의 광기에 이론적 자양분을 제공했던 것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임을 저자는 환기한다. 한 사회의 변화방향은 항상 열려 있고 구성원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를 이끌기 위해 협력하거나 대립하는 게 실제 사회의 모습이다. 맑스의 이론은 이런 복잡한 역학관계를 해석하려는 시도의 산물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데올로기, 가치, 화폐, 착취, 기술진보, 비생산적 노동, 자본구성, 국가, 이윤율저하법칙, 전형문제 등에 대한 저자의 균형잡힌 설명은 주류경제학이나 교조적 맑스경제학과는 다른 복잡한 현실의 역학관계를 이해하는 데 나침반 역할을 한다.
치열한 경쟁률을 뚫은 수천명의 경제학 전공자가 매년 배출되는 한국사회. 그 많은 학생들은 왜 경제학을 선택했을까. 어쩌면 현대사회의 핵심인 자본주의경제의 작동원리를 알고자, 즉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명확히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의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관점은 어떤 개념과 분석도구로써 세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이는 현실진단과 변혁의 방향에 대한 판단으로까지 이어진다. 저자는 어려운 수식보다 편안한 칼럼식 문체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친근한 예로, 경제학으로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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