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우수출판기획안 공모전 당선작.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에 매진해 온 김덕진 교수가 쓴 책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던 중 조선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 만큼 심각했던 대기근을 발견한 것이 이 책의 시작이었다. 저자는 그 아비규환의 풍경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이 책은 1670년(경술년, 현종 11)과 1671년(신해년, 현종 12) 두 해에 걸친 경신대기근에 주목한다. 무려 1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 우리 역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된 경신대기근은 조선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대기근은 손쓸 틈도 없이 전염병의 창궐로 이어졌으며, 민생은 파탄 지경에 이르고 사회는 깊은 불안의 늪에 빠졌다.
저자가 대기근에 유독 주목한 것은 단순히 놀라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술에 그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잘 다뤄지지 않던 기후 분야를 통해 또 다른 관점에서 조선의 역사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짙다. 17세기 조선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창으로 ‘기후사’에 접근하는 셈이다. 극히 제한된 주제에만 관심을 두는 우리 학문 풍토에서 이러한 저자의 시도는 신선하다.
이 책은 17세기 대기근의 현황과 극복 과정, 그리고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을 쉽고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대기근을 몰고 온 당시 이상 기후의 실태가 어떠하였고, 그것이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쳤는 지 알 수 있다. 또 대기근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조치들을 취하고 사회에 정착시켰는지 이해할 수 기회가 될 것이다.
1670년 대기근,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가다
기근으로 살펴본 17세기 조선
지난번에 비가 조금 내리자 농민들이 늦었지만 파종을 하고 이앙을 하였습니다. 참혹한 가뭄이 지금 20여 일에 이르러 앞날이 가망 없을 것 같아 답답할 따름입니다. 40년 동안 살면서 금년 같은 가뭄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실로 국운이 걸려 있어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 중 1670년 5월 4일 평양 감사 민유중의 편지
우리는 현재 지구 온난화와 이상기후로 인해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묵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자연재해다. 자연재해로 발생하는 피해는 당장 우리의 식량자원을 위협하기에 더욱 심각하다. 그러기에 전 지구적으로 대책 세우기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요즘이다. 이런 재앙과 같은 자연재해로 약 300년 전 조선이 큰 혼란에 빠졌다면 그 풍경은 어땠을까?
그 아비규환의 풍경이 한 권의 책―≪대기근, 조선을 뒤덮다≫에 고스란히 옮겨졌다. 저자는 조선 후기 경제사 연구에 매진해 온 김덕진 교수로, ≪조선왕조실록≫을 읽던 중 조선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 만큼 심각했던 대기근을 발견한 것이 이 책의 시작이었다.
이 책은 1670년(경술년, 현종 11)과 1671년(신해년, 현종 12) 두 해에 걸친 경신대기근에 주목한다. 무려 1백만의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 우리 역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된 경신대기근은 조선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대기근은 손쓸 틈도 없이 전염병의 창궐로 이어졌으며, 민생은 파탄 지경에 이르고 사회는 깊은 불안의 늪에 빠졌다.
대기근은 기후 변화가 불러온 대재앙이었다. 저자는 조선이 맞닥뜨린 대재앙의 원인을 17세기 ‘소빙기’ 현상에 동반한 기후 변화라고 추정한다. 즉 조선의 기후를 세계적 소빙기 현상과 연계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대기근에 유독 주목한 것은 단순히 놀라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술에 그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잘 다뤄지지 않던 기후 분야를 통해 또 다른 관점에서 조선의 역사를 재조명하려는 의도가 짙다. 17세기 조선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창으로 ‘기후사’에 접근하는 셈이다. 극히 제한된 주제에만 관심을 두는 우리 학문 풍토에서 이러한 저자의 시도는 신선하다.
기후 변화가 현재 인류의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은 기후 변화가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쳐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결과적으로 기후가 역사를 만든다는 점을 반증할 것이다. 질병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기후사나 질병사 등 환경사에 관심을 넓혀 우리 역사에 대한 인식의 폭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 본문 중에서
‘경신대기근’이라는 현미경―최초로 시도된 조선 기후사
17세기 조선을 바라보는 학계의 일반적인 인식은 전혀 다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 중 가장 연구가 미진하고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는 시기가 바로 17세기다. 17세기에 대한 무관심은 근본적으로 연구자들의 역사관에서 비롯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보통 17세기를 16세기 사림 시대 혹은 18세기 중흥 시대의 과도기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이 시기 관련 연구는 ‘붕당 혹은 정쟁’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와 달리 이 책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정쟁이 왜 이 시기에 일어났을까?’라는 역발상의 질문을 던진다. 기근이 하늘의 경고라는 유교적 자연관 때문에, 정부 신료와 재야 선비들은 기근이 들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책을 임금에게 제시하며 강요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재정, 제사, 사면, 민심 수습 등의 사안을 놓고 국왕과 신료, 신료와 신료들 사이에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기근이 정치집단 간의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자양분이 되었으리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시기의 주요 정쟁에는 기근이 깊숙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기근 와중에서 효종에 이어 현종이 즉위하자마자 제1차 예송이 발발했다. 그리고 1674년 효종비 장씨의 승하에 따른 조대비의 복상 논쟁에서 비롯한 제2차 예송에서는 남인 측 주장이 채택되었다. 남인 측 주장이 채택될 수 있었던 배경은 예론 자체에도 있었지만, 현종 대 중반 이후 남인이 대기근을 극복하며 튼튼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반면, 서인은 ‘경신대기근’ 극복 과정에서 실질적 역할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나 몰라라로 일관해 임금의 마음에서 멀어졌다.
이렇듯 저자는 17세기 조선이 전환의 시기였음을 강조하면서 그 동인으로 기후 변화를 꼽는다. 이상 저온과 일기불순 현상이 장기간 지속되자 갖가지 자연재해가 뒤따랐고, 급기야 조선 전역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위기가 일상인 시대, 이것이 저자가 발견한 17세기 조선의 모습이다.
충청도에서 굶주린 엄마가 어린 자녀를 삶아 먹은 사건이 발생했다. 충청 감사 이홍연이 급히 보고한 바에 따르면, 연산의 깊은 골짜기에 사는 순례라는 사비가 그의 다섯 살 된 딸과 세 살 된 아들을 죽여 먹었다. 같은 마을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고 관아 사람이 가서 사실 여부를 물었더니, 그녀는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중 아들과 딸이 병으로 죽자 삶아 먹었을 뿐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순례는 보기에 흉측하고 참혹해 얼굴이나 살갗, 머리털이 조금도 사람 모양이 없고 마치 미친 귀신 같은 꼴이었다.― 본문 중에서
조선에 대기근은 간간히 있었지만, 경신대기근처럼 위력적인 경우는 없었다. 경신대기근은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온갖 자연재해, 사상 초유의 식량위기, 유례없는 전염병이 휩쓴 대재앙이었다. 국가 재정이 고갈한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떠돌거나 죽었으며 도둑질과 살상이 빈발했다. 극복 과정에서는 위정자들의 시행착오와 정파 간의 소모적 대립이 드러났으며, 이웃 국가의 불안정한 정정은 재난 극복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은 조선 사회가 대기근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게 해준다. 그리고 재난에 처한 국가와 국민, 왕권과 신권,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를 여과 없이 보여 준다. 이 책은 그 가운데 민심과 정치세력의 동향에 특히 주목한다. 민심은 대기근의 피해 정도를, 정치세력의 동향은 극복 방향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피해 정도를 계량화하고 정치세력의 계보를 작성해, 대기근에 반영된 당시의 사회상을 종적, 횡적으로 조감한다. 이는 현종 대를 중심으로 17세기 전반을 들여다볼 수는 하나의 조감도로서 역사의 흐름을 한눈에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전염병이 한창일 때 우역이라는 가축병마저 겹쳐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높아졌다. 우역은 1670년 7월에 처음 발생해 8월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황해도와 경기도 등 중부 지방 일대가 가장 심했다. …… 황해도의 경우 7월에 우역으로 죽은 소가 무려 897마리에 이르렀다. 이때 염병이 돌아 505명이 감염되어 겨우 201명만이 차도를 보이고, 268명은 통증을 호소하고, 26명은 끝내 사망했다. 8월에 황해도에 우역이 크게 번져 죽은 소가 무려 1만 600마리에 이르렀다. 이때 도내 전역에 연달아 내리는 된서리와 큰 바람에 나무가 부러지거나 뽑히고, 남은 곡식이 바닥나자 백성들이 곳곳에서 울부짖었다.―본문 중에서
기회의 시대 17세기의 재발견―경신대기근은 무엇을 남겼나
‘재해 → 흉작 → 기근’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농업 생산성의 하락을 가져오고, 농업에 기반한 경제 구조에 큰 타격을 가하여 종국에는 사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높았다. 17세기 한반도에 불어닥친 대기근도 조선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가했다. 왕조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만큼 강력한 위력을 지닌 초대형 기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사회는 그 앞에 무력하게 굴복하지 않고 조금씩 극복해 나갔다. 대량 유민, 특히 버려진 아이들(유기아들)을 처리하는 문제가 기근이 격심한 현종 대에 정비되어 숙종 때 입법화되었고, 영조 대의 ≪속대전≫에 수록되었다. 이후 일어난 ‘아동관’의 일대 변화가 대기근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대기근은 신분별 인구 점유율에도 영향을 미쳐 지금까지의 신분 변동사에 대한 재음미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연이은 기근으로 기아자와 아사자가 대량으로 발생해 사회적 동요가 예상되는 만큼, 백성들을 구제하는 대책이 강구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진휼청의 상시화가 단기적 대책이었다면 청나라에서의 곡물 도입은 장기적 대책이었다. 청나라로부터의 곡물 수입은 현종의 수용 의사에도 불구하고 논의에 그쳤으나, 30년 후 ‘을병대기근’ 때 마침내 성사되어 청나라에서 도입한 3만 석을 진휼에 투입했다. 조선 역사상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단서 역시 대기근이었다.
이 외에도 대기근으로 인한 대동법 실시와 각종 제도 개혁, 동전 주조와 수차 보급 등과 같은 대책은 조선을 내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18세기 후반 영?정조 대에 와서는 이전의 경험과 노력을 토대로 재난 관리와 사회 안전망 확보를 제도화하게 되었다. 더불어 18세기 후반 이후 기근이 이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영?정조 대의 정치?사회적 안정은 사회 안전망 구축과 기근의 감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17세기는 화평한 날이 하루도 없을 정도로 ‘위기의 시대’였다. 농업을 주요 산업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회에서 대기근이 사회 전반에 가했을 엄청난 충격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점 때문에 지금까지 17세기를 바라본 시선은 위기 일변도였다. 그러나 17세기는 위기 속에서 새로운 ‘블루 오션’을 발견한 ‘기회의 시대’였다. 즉, 17세기는 위기이자 기회의 시대였다는 게 이 책의 논지다. 그래서 자연히 18세기는 17세기의 영향권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18세기는 17세기 대기근으로 빚어진 여러 모순을 수습해 사회를 새롭고 단단한 틀로 정착시킨 시기였다. 조선 사회는 17세기 대기근으로 받은 충격을 18세기를 거치며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교양서’라는 취지로 시행된 2008년 우수출판기획안 공모전(한국간행물위원회 주최) 당선작이다. 17세기 대기근의 현황과 극복 과정, 그리고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을 쉽고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과 탄탄한 구성력을 이미 검증받은 셈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대기근을 몰고 온 당시 이상 기후의 실태가 어떠하였고, 그것이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심각하게 휘저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 대기근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조치들을 취하고 사회에 정착시켰는지 이해할 수 기회가 될 것이다. 아울러 오늘날 지구 온난화라는 기후 문제에 봉착해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은 잠재적 불안을 환기시키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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