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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숲 : 조인선 시집

황홀한 숲 : 조인선 시집 (5회 대출)

자료유형
단행본
개인저자
조인선 , 1966-
서명 / 저자사항
황홀한 숲 : 조인선 시집 / 조인선 지음.
발행사항
서울 :   문학과지성사 ,   2002.  
형태사항
119 p. ; 21 cm.
총서사항
문학과지성 시인선 ; 261
ISBN
8932013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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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897.16 조인선 황 등록번호 111222620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2 소장처 중앙도서관/교육보존2/ 청구기호 897.16 조인선 황 등록번호 111222619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3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2/ 청구기호 897.16 조인선 황 등록번호 151130162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4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2/ 청구기호 897.16 조인선 황 등록번호 151130163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중앙도서관/제3자료실(4층)/ 청구기호 897.16 조인선 황 등록번호 111222620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2 소장처 중앙도서관/교육보존2/ 청구기호 897.16 조인선 황 등록번호 111222619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2/ 청구기호 897.16 조인선 황 등록번호 151130162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2 소장처 세종학술정보원/인문자료실2/ 청구기호 897.16 조인선 황 등록번호 151130163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컨텐츠정보

책소개

조인선의 새 시집 <황홀한 숲>은 친숙하면서도 낯설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언뜻 보기엔 우리 시에서 가장 보편적인 서정시의 맥락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찬찬히 페이지를 넘겨가다 보면 그러한 기대가 여지없이 깨어지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꽃집에서'라는 시만 보아도 '기차, 구름, 해, 무지개, 새, 거울' 등의 익숙한 사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러한 편안함은 '파란 연기 피우며 씩씩거리'다 '내 이마에 상처를 내고' '돌아오기엔 벅찬 그대 곁'을 떠나버리는 기차에 의해 금새 배반당한다.

서정시의 껍질을 뒤집어 쓴 채 그 내부의 균열 속에 자리하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이 돋보이는 시집.

시집 『황홀한 숲』은 시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그 열정의 힘은 견고한 자아의 정체성을 허물어뜨리는 것에까지 나아가기도 하고 문법의 혼란과 문장의 논리적인 맥락을 파괴하는 데로 뻗어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열정의 힘은 분열과 초 논리를 몰아오며 벼락과 같은 시적 직관의 세계를 열어보인다. 그리하여 이 시들은 논리와 정체성의 틈새를 파고들며 한순간 고착되고 상투화된 세계를 쪼개며 새 세계의 신성한 피를 수혈한다.

[해설]
군중의 서정시를 위하여
_정과리

가시가 없는 육체는 책에 씌어 있고 피가 없는 머리카락에 끈질긴 유혹이 자란다
─「종말론 1장―사랑편」 부분

조인선의 시는 묘하다. 친숙하면서도 낯설다. 날카로움과 어색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첫 페이지에 놓인 시를 보자. 시만 갖고 못산다는 걸 잘 알지 허나 시 없이 못산다는 걸 너무 잘 알아 사람들은 무심히 병이라 하지 정신병인 줄 너무도 모르면서 ─`「자화상 1」 전문분명하고도 엉뚱하다. 무용한 수난`Passion으로서의 시에 대한 흔한 생각이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마지막 행에 와서 그걸 두고 스스로 ‘정신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저 ‘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탓한다. 비웃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서운한 감정으로 보인다. 그 감정의 결이 무엇이든, 자신의 병이 ‘정신병’이라고 우기는 태도는 엉뚱하다. 이 정신병이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신병일까? 정신병자가 스스로 정신병을 인정하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일종의 과장일까? 시인임을 뽐내고 싶은 자가 시 쓰기를 비정상성으로 규정하고 다시 비정상을 특권으로 뒤바꿔놓은 것일까? 그러나 그의 시들은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나 그리 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기교의 극단을 보여주지도 않고 주제가 과격하지도 않다. 독자가 조인선의 시에서 낯설음을 느낀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시가 일종의 범용성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시에서는 젊음의 냄새(향기든 땀내든 혹은 피비린내든)가 풍기지 않으며 마찬가지의 정도로 젊은 시인에게 나타나게 마련인 새로움 더 나아가 ‘희귀성’에의 욕망도 잘 비치지 않는다. 다음, 그의 시의 진술법은 흔히 ‘서정시’라고 불러온 한국 시의 일반적 유형, 즉 자연에 기대어 내면을 조율하고 그렇게 빚어진 내면을 바깥으로 투사하여 삶의 보편적 의미에 귀속시키는 절차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독자는 그런 시를 한국 시의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취도는 천차만별이지만 그것이 한국 시의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특성을 넘어서 문화를 이루고 있으며, 더 나아가 문화를 넘어서 제도를 이루고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거의 전국토를 뒤덮고 있다고 해도 될 만한 한국 시 생산의 광대한 주변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시들과 대동소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이 그의 낯설음 혹은 엉뚱함을 그대로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독자의 눈길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은 이 범용성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뭔가’에 대한 느낌은 가령 방금 본 시의 ‘정신병’과 같은 단어가 자극하는 것인데 이 구절이 엉뚱하다는 독자의 인상은 다음 시로 넘어가면 좀더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다. 전문을 인용해보자.

내 몸이 죄로 덮여 있음이라 
씻어도 빛남이 없어 
울음조차 징그럽다

내 마음에 욕이 꽉 차 있으니
게워도 게워도 텅 빔이 없어 
누구를 대신해도
또 다른 윤회일 뿐

산다고 산 게 아니었지만
지나고 보니
씻고 게워낸 자리에 가득 찬 허물이여
끝내 벗어날 수 없어
더는 갈 수도 갈 곳도 없는 이곳에
누가 있어 곱게도 꽃 피우셨나

내려다보니 까마득한데
겁에 질린 바다가 애타게 내 이름 부르고 섰네 ─「자화상 2」 전문

이 시의 엉뚱한 부분도 마지막 연이다. 네번째 연까지는 비교적 진술이 순조롭다. 시 쓰기를 촉발한 것은 네번째 연에 제시된 꽃이다. 그 꽃의 아름다움이 그에 비해 욕스럽게 마련인 삶에 대한 죄의식을 유발하여, 그 감정이 먼저 언어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서 그 감정이 연장되고 확산된 이후에 꽃과 선명한 대립을 이루어 꽤 큰 정서적 울림을 갖는다. 그런데 마지막 연은 당혹스럽다. 특히 마지막 행이 그렇다. 앞 행의 “내려다보니 까마득한데”는 ‘내려다보니’가 약간 의아하긴 하지만 이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죄스런 삶과 꽃과의 “까마득한” 거리를 지시하는 것처럼 착각케 한다(왜 착각이냐 하면 앞 행에서 꽃은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행에 와서 갑자기 “겁에 질린 바다”가 나왔다. 그것이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까마득한데’는 삶과 꽃 사이의 거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꽃’은 지금 ‘나’와 함께 높은 곳에 있고, 까마득하게 저 아래 있는 것은 ‘바다’이다. 그래서 ‘내려다보’는 동작이 나왔던 것이다. 그런데, 저 ‘바다’가 왜 갑자기 튀어나왔는가? 그것은 무엇 혹은 누구인가? ‘바다’는 ‘나’가 아니다. ‘꽃’도 아니다. 왜냐하면 꽃은 시방 ‘나’와 함께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인가? “내 몸”과 “내 마음”이 죄와 욕으로 꽉 차 여기에 있으니, 내 몸도 내 마음도 아닌 곳에 나의 ‘삶’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텍스트 내에서 ‘바다’는 어떤 존재자도 은유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장소일 뿐이다. 마치 텅 빈 방처럼, 아무 원소도 포함하지 않는 공집합으로서의 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애타게 [……] 부르”는 동작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해, 어떻게 살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마지막 두 시행이 놀라운 것은 앞부분에서 진술한 욕된 삶이 ‘높은 곳’에 있다는 전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언을 포착한 순간 독자는 시의 초두로 되돌아간다. 충격은 마지막 연에서 일어났지만 그 충격이 지시하는 것은 앞의 네 연에 대한 재독이다. 앞의 네 연에서 독자는 화자의 욕된 삶에 대한 고백을 들었다. 욕된 삶은 상식적인 의식 속에서 말종의 삶이고 속된 말로 ‘하찔’의 삶이다. 그런데 그것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그것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 이상의 삶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인간 사회의 아주 오래된 상식이다. 그런데, 이 시는 드높은 삶이 욕된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는 그 실질이 무엇이든 고상하고 고귀하다고 ‘인정’받는 삶이 실은 죄로 가득 차 있다고 발언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상식의 체계로부터 공식적 가치 체계에 이르는 공인된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를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두 개의 전언이 더 있다. 하나는 ‘나’는 의식으로써 거부하는 세계에 가장 철저히 몸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다. 다른 하나는 ‘꽃’의 존재이다. 이 두 가지 전언은 시에 미묘한 운동성을 부여한다. 우선 ‘나’의 방향성이 문제이다. 이 높은 세계가 죄로 가득 찬 삶이라면 이 삶은 “산다고 산 게 아”닌 삶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는 서둘러 이 높은 곳으로부터 내려가야 한다. 제4연의 “끝내 벗어날 수 없어/더는 갈 수도 갈 곳도 없는 이곳에”는 분명 ‘나’가 삶을 벗어나려 애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방향은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는 것이었다. “더는 갈 수도 갈 곳도 없는”이라는 진술은 그 역설로 꽉 찬 진술이다. 그 진술은, ①`이 땅의 삶은 욕된 삶이다; ②`나는 벗어나기 위해 상승한다; ③`그러나 상승할수록 욕됨은 커졌다; ④‘나’의 도망이 막다른 벽에 부딪쳤을 때 나의 죄 역시 최대치가 되었다, 라는 의미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다.이 역설은 사회적 보편 관념(②)과 사회의 실상(③) 사이의 연루이자 동시에 모순인 사태에서 비롯한다. 사회의 부정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추락해서는 안 되고(추락은 부정성의 나락으로 더 떨어지는 것이니까) 더욱 상승해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보편 관념이라면, 그 관념에 기댄 상승 운동은 사회적 보편 관념을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고, 따라서 사회를 더욱 강화하는데, 사회가 애초에 부정적인 한, 그것은 사회의 부정성을 심화하는 결과를 빚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아주 평범한 듯 보이는 시가 실은 아주 깊은 숙명적 인식을 깔고 있었다. 삶의 죄악을 벗어나기 위해 솟아오를수록 죄악의 올가미는 더욱 강하게 나를 옥죈다. 왜냐하면 상승 자체가 죄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왜 상승 자체가 죄의 실천인가? 상승 운동은 거듭 아래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가 상승하면 할수록 아래에는 ‘나’에 의해 버림받은 것들이 가득 쌓인다. 그런 행동이 바로 죄와 욕이고, 그렇게 저 아래 쌓인 것이 바다이다.이 죄악의 숙명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이 사회를 아예 등지는 것. 그래서 저 바다로 굴러 떨어지는 것.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한다. 왜냐하면, ‘꽃’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더는 갈 수도 갈 곳도 없는 이곳에,” 즉 가장 높이 상승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운동의 관성이 스스로 몰아버리듯이 저 ‘꽃’은 항상 어느 만큼 떨어져 있다. 그 거리는 “누가 있어 곱게도 꽃 피우셨나”에서의 “곱게도”에 지시되어 있는 시선의 거리 그리고 “누가 있어”가 가리키는 어떤 다른 [선한] 존재에 대한 자발적 암시가 벌려놓는 거리이다. 이 꽃이 환상으로서의 꽃인지 진짜 꽃인지는 이 시에서는 분명치 않다. 다시 말해 사회적 보편 관념이 끝끝내 간직하고 있는 환상으로서의 텔로스인지, 아니면, 난데없이 거기에 있어 동공을 팽창시킨 실제의 ‘꽃’인지는 이 시만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시의 효과는 오히려 그 모호성에서 나온다. 그것이 사회적 보편 관념에 대한 기대(이 허망한 상승에 돌연히 주어진 지복)와 그에 대한 의혹(그것이 기껏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이라는 상반된 의식의 양 끝을 한껏 잡아당긴다. 게다가 꽃은 담론의 배열 속에서 다음 연의 ‘바다’와 인접해 있다. 그 인접성은 이 꽃은 혹시 저 바다가 아닐까? 하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한편으로 그 양태의 사뭇 다름에 놀라게 한다. 어쨌든 꽃과 바다는 다른 것이다. 시의 문맥 속에서 꽃은 도달할 수 없는 유일자이고 바다는 명명되지 않은 다수성이다. 분석의 도중에서 독자는 이미 ‘바다’가 버려진 가능성의 세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 ‘나’가 ‘탈출하기 위해서’`―`‘내려가지 않고’`―`‘상승하는’ 바람에 더욱 저 ‘밑바닥에 버려진’`―`‘사회의 지표면 아래로 하강해야만 만날 수 있는’ 참된 삶의 가능성, 즉 부정성의 기호로서만 현실에 존재하는 ‘명명될 수 없는 다수성’이 바다이다. 그것은 사회 밖에 버려졌기 때문에 명명될 수 없고(계산과 계약의 세계로서의 사회는 기호들의 집합이다), 저마다 명명될 수 없는 한, 잡초들이 그러하듯, 이질적인 형상으로 엉켜 있기 때문에 ‘개별성’도 ‘통일성’도 아닌 다수성이다. 그 명명되지 않는 다수성이 바다로 지시된 것은, 그것의 위치(지표면 아래, 그리고 상승의 벼랑에서 바라보는 까마득한 밑바닥), 형태(이물들과 이종들의 덩어리), 색채(검푸른, 명명될 수 없는) 그리고 운동(파도와 포말, 즉 버려진 것들의 온갖 애절하고 광포한 움직임들)이 통째로 그 형상을 이루고 증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바다와 꽃이 실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꽃은 환각으로 출몰하거나 환상으로 유지된 참된 삶의 표상이고, 바다 또한 참된 삶의 부정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러나, 동시에 그 양태의 극단적 배리(긍정적 극단과 부정적 극단)로서 당김과 밀어냄의 강력한 자장을 형성하며 끊임없이 상대편을 통해 자신을 의혹하거나 상대편을 부각시킨다. 환상의 환상성, 환각의 실재성, 부정된 것의 회귀를 말이다. 바로 그것이 마지막 행 “겁에 질린 바다가 애타게 내 이름 부르고 섰네”에서 ‘겁에 질린,’ ‘내 이름,’ ‘부르고’의 어사들을 붉게 물들이며 회오리치는 격정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제 독자는 맨 처음에 읽었던 ‘정신병’이 그저 엉뚱하거나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 단어는 표현이라기보다 차라리 그 자신 질병이며 동시에 그 질병을 통해 벌어질 어떤 사건의 입구이다. 그 자신 질병이라는 것은 그 ‘정신병’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병’이라는 어사가 그 자체로서 언어의 질병이라는 것을 뜻한다. 왜 언어의 질병인가? 즉각적으로는 정상/병을 가르는 사회적 기호 체계를 깨고 정상-병/정신병의 새로운 대립 체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며, 실질적으로는 조인선의 시가 기왕의 서정시의 문법을 거의 따르면서도 그것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반이란 말 그대로 쓰인 것인데, 왜냐하면 그의 시적 주제가 서정시의 문법이 요구하는 주제를 정면에서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분명 서정시의 제도가 요구하는 주제에 끌려 시로 다가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그곳에서 성취감을 얻지 못했으며 오히려 권태만을 잔뜩 이고 살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어지는 시 「자화상 3」은 그 사정을 이렇게 말한다:

눈 뜨면 늙는 줄 알면서도 들어온다
이 안에서 났으니
결국 이곳에 묻힐 것이다
빛의 열기에
언어의 비늘이 반짝일 때마다
끝없이 덮여 있는 권태가 싫어 ─「자화상 3」 부분

앞의 해석에 기대면 이 구절들의 자구적 의미는 명백하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시인의 시적 실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우선, “눈 뜨면 늙는 줄 알면서도 들어온다.” 이 구절만 따로 떼내어 읽으면 살아감 그 자체에 대한 반어적 풍자가 둔하게 휜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삶의 출발의 계기이다. 그러나 멀리 비켜서서 보면 인생의 방향은 늙음과 소멸을 향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신생을 살 수 있다는 믿음에 빠진 채로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그의 다른 시에서 이와 비슷한 비스듬한 시각에서 씌어진 시구를 만날 수 있다: “눈 뜨고 보지 못하는 것이 믿음이니”(「종말론 1장`-`사랑편」) 같은 구절이 그렇다. 그러나 이 시의 의도는 삐뚤어진 지혜(왜 삐뚤어졌느냐 하면, 그렇게 말하는 행위 자체도 실은 늙어감의 실행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쨌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를 갈파하는 게 아니다. 시의 언어는 스스로 비꼬인 감정을 넘어서서 자신의 실존적 정황을 절실하게 드러낸다. 바로 “들어간다”는 것. 시인은 시인이 유혹되어 다가간 곳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감옥임을 어느새 알고 만 것이다. “이 안에서 났으니/결국 이 곳에 묻힐 것이다”는 그 숙명을 알고 만 자가 저절로 흘리는 비애의 말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제시된다. “빛의 열기에/언어의 비늘이 반짝일 때마다/끝없이 덮여 있는 권태가 싫어.” 시인은 반짝이는 언어의 비늘과 그것을 휘감고 있는 빛의 열기에 끌렸을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비늘이 한 번 반짝일 때마다 권태가 또한 하나씩 생성되었고 결국 권태가 “끝없이 덮여 있는” 상황에 직면한다. 비늘은 언어의 반짝임과 권태를 동시에 은유한다. 다시 말해 반짝임 옆에 권태가 있는 게 아니다. 반짝임이 곧 권태이다. 비늘은 덮여 있다는 형상적 특질, 그것이 은유 관계를 성립시키는, 다시 말해 광휘의 세계를 순식간에 각질의 세계로 돌변시키는 특이점이다. 그러니까, 이 은유에는 그에 대해 교과서가 가리키는 바와 같은 ‘통일’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반(離反)이 작동하고 있다. 그 이반이 서정시의 전통적 주제에 대한 부정을 가리킨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시는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왜 여기에 은유가 작동했는가? 이어지는 시구를 마저 읽어 보자.

여기 왔지만
이곳은 홀로 둘이 되는 곳
이 거대한 묘지에서
사고의 괴로움이 즐거운 생이라
죽음도 멀게만 느꼈었기에
돌아보니 하루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살았다
작은 어항 속
그저 온몸 흔들어
내 속의 나를 꺼내 떠오르던 이곳은
누가 있어 내 사랑 하나로 할까 ─「자화상 3」 부분

시 전문에서는 제 7행이 되는 첫 행은 모호하다. 그것은 앞 행과 연결되어 이렇게 읽힐 수 있다: “끝없이 덮여 있는 권태가 싫어[서]/여기[로 옮겨]왔지만.” 만일 이렇게 읽는다면 앞의 독서는 근본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권태가 발생하는 곳과 ‘나’가 들어오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시를 망가뜨린다. 두 장소의 의미론적 위치가 불분명해짐으로써 시적 음미에는 불필요한 허망한 추론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오히려 독자는 ‘여기’가 실제 권태로 덮여 있는 세상임을 확인한다. 세번째 행을 보면, ‘여기’는 “이 거대한 묘지”인데 그것은 곧바로 “끝없이 덮여 있는 권태”의 은유임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권태가 싫어서 여기로 옮겨 왔다”는 해석은 물리치는 게 낫다. 그렇다면 “여기 왔지만”은 무슨 뜻인가? 이 진술은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게 아니라 기능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을 이동의 항구성을 가리키는 편재적 지시문으로 읽는 것이다. 권태가 싫어서 ‘나’의 이동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여기’로 온다. 시의 첫 행에서 진술된 “들어온다”가 가리키는 장소가 여기이다. ‘여기’는 “언어의 비늘이 반짝”이는 곳이자 동시에 ‘여기’는 여전히 ‘권태’로 덮인 곳이다. 이 편재적 지시문의 기능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동의 필연성, 혹은 이동에 대한 열망 혹은 의지가 사그러들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다음 행, “이곳은 홀로 둘이 되는 곳”은 따라서 이중적 의미를 낳는다. ‘홀로’와 ‘둘이’는 어떤 결여를 전제로 하고 있다. 흔히 ‘하나됨’이라는 말로 쓸 때의 ‘하나’가 그것이다. ‘홀로’는 하나로서 하나됨에 실패한다. 하나됨은 둘 이상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둘이’는 그 자체의 상태로서 하나됨에 실패한다. 그러나 ‘홀로’ ‘둘이’ 되는 사태는 그 실패로써 하나됨의 의지를 구현하고 그것을 향한 행동을 실천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통일을 향한 나’와 ‘실패한 나’의 분열을 가리키지만, 바로 그 지시를 통해서, 통일을 향한 나의 엄연한 존재성을 명시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시행이 “사고의 괴로움이 즐거운 생이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하나로 합쳐지기 위한 바깥의 타자를 만날 수 없으나, “내 속의 나를 꺼”냄으로써 만남에의 의지를 물질적으로 지속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앞의 시에서 제시된 “꽃”이기도 한 것이다.)다음 시 「자화상 4」에서 화자는 그것을 “갈라진 언어의 황홀함이여/나는 이제야 그대를 찾았네”라는 감격적인 어조로 진술하고 있다. 물론 ‘나’가 찾은 것은 실존자로서의 ‘그대’가 아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만남의 실패이고(그래서, “그대의 입술이 떨려 어둠이 더욱 짙”었다는 고백이 나온다), 그가 만들어낸 것은 만남에의 의지이고, 그가 찾아낸 것은 그 의지를 실천하는 장치로서의 언어이다. 그 언어는 그 자체로서 분열된 언어이다. 그 언어는 “갈라진 혓바닥”(「자화상 5」)에서 발성되어 “파동에 일렁이는 모음과 자음이 이루어낸 공간”(「자화상 4」)을 조성한다. 따라서 조인선 시의 자화상은 삼중의 존재로 포개져 있다. ‘나’ ‘내 속의 나’ ‘그대’가 그들이다. ‘나’는 사실태이고 ‘내 속의 나’는 운동태이며, ‘그대’는 부재태이다. ‘나’는 사회적 ‘나’이고 ‘내 속의 나’는 사회의 눈으로 볼 때 ‘병든 나’이며, ‘그대’는 정신병을 앓는 ‘나’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한국 시의 맥락 내에서 보자면, ‘나’는 서정시의 문법을 가리키고, ‘내 속의 나’는 서정시에 대한 열망과 실패가 야기한 고뇌를 동시에 지시한다. 그리고 ‘그대’는 서정시의 역설적 긍정을 가리킨다. 시인은 서정시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는 가운데 그것의 근본적인 부정에 맞부딪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래의 꿈을 버리지 않는다. ‘서정시’의 꿈을 말이다. 그것이 그의 시를 야릇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의 시는 서정시에서 출발하여 그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갔으나 서정시의 벽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서정시의 울타리를 보존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시가 본래의 서정시로 복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독자는 그 서정시의 세계에서 화자가 겪은 일이 무엇인가를 보았다. 그것은 빛을 향해 올라갈수록 죄로 가득 찬다는 것, 그것은 어둠의 세계를 거듭 만들어내고 어둠의 울부짖음을 크게 만들었다. 그러니 그의 시는 서정시를 따르되 아주 다른 서정시를 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서정시는 궁극적으로 버려진 바다의 서정시, 사회적 맥락으로 치환해서 말하면, 군중의 서정시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시인은 “빛나는 타락이 되고 싶다”(「미소」)라는 명제로 간명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이 “빛나는 타락”은 곧바로 바다로 이루어진 꽃이다. 시인이 서시(序詩)들로서 제시한 ‘자화상’ 연작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실제 그의 시들 대부분은 ‘자화상’ 연작에서 제시된 삼중적 존재태의 변주라 할 수 있다. 그 존재태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것이 “빛나는 타락” 혹은 군중의 서정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명제가 간명하다고 해서 그 실제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권태란 놈이 보들레르의 귀에 닿아도/그대 심장을 뚫고 들어가진 못하겠다고/두 눈 감고 권태가 기어나온다/빛과 어둠 사이로”(「유혹」)에서 기술된 것처럼 그 서정시는 서정의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것들, 혹은 서정의 세계로부터 비어져 나오는 것들로 이루어져 결코 본래적 서정의 핵심 속으로 회귀하지 않고 서정의 바깥에서 형성될 것이다. 그것은 서정시의 세계를 서정 바깥에 건설하려 하기 때문에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것처럼, 가령,

떠다니는 풍선은 사실 무서워
터지는 곳이 일정치 않거든
우리집은 작은 화분 속에 있지만
화장대는 유난히 크지
입 맞추면 떠오르고
귀 열면 숨곤 하네
그대 몸엔 작은 구슬이 있겠지
나는 그대 한입에 먹는 물고기라오
나를 잡아 먹고 내가 산다오 ─「어류 일대기」 부분

와 같은 시구에 요령부득의 양상으로 제출되어 있듯 착란적이며, 서정이 수립될 수 없는 곳에서 서정시의 문법을 부단히 흉내내기 때문에,

텅 비지 않으면 중력도 없으리

별빛이 물 위에 어리어 청둥오리 다정하다 ─「空」 부분

에서 보이듯 환몽적이다. 독자는 위 두 시구가 모두 ‘텅 비어 부풀어 오른 것’에 대한 강박관념을 타고 씌어진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착란과 환몽은 다 그 텅 비어 부풀어 오른 것에 대한 유혹과 환멸과 소외로부터 태어난다. 그 텅 비어 부풀어 오른 것, 시인이 종종 ‘풍선’에 비유하는 그것이 바로 한국적 서정시라는 제도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서정시는 한국 시의 제도라고 말했다. 많은 시인들이 그 제도에 거역해 다른 시들을 개척해나갔다. 김수영으로부터 시작된 그 거역은 한국 시의 지도에 비판적 인식(부정)의 영역과 땀으로 번들거리는 생활의 영역, 그리고 발성되자마자 언어가 휘발하는 산[生] 이미지들의 영역을 추가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그런 모험 속에서도 서정시는 적어도 세 개의 지대에서 큰 군락을 이루어왔으며, 이루고 있다. 우선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둘째, 한국 문학의 주변부는 실질적으로 서정시들로 가득 차 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 동호인들의 시 생산, 청소년들의 감상 시 혹은 지하철?이발소?옛날식 다방 등의 문학적 뉘앙스를 풍기는 문화 지대들에 그것은 편재한다. 셋째, 이탈을 감행한 시인들의 서정시로의 회귀가 또한 지속적으로 되풀이 되었다는 것이다.
조인선의 시는 그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서정시든 반서정시든. 그가 간 길은 서정시의 내적 균열의 지대이다. 독자는 그 이전에 진이정의 시에서 그러한 균열이 나타났음을 기억한다. 진이정은 그 균열을 내는 데 온 힘을 소진하였다. 조인선은 그 균열 사이로, 명명되지 못한 다수성의 지대로 진입한다. 그 다수성의 지대는 아직 명료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책’에 씌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가시가 없는 육체는 책에 씌어 있고 피가 없는 머리카락에 끈질긴 유혹이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의 새로운 서정시는 책이 아니라 가시와 피로 이루어질 것이다. 문화의 지대로부터, 언설의 지대로부터 제외된 곳에 가시와 피가 있다. 그곳은 명명받지 못한 군중의 지대에 다름아니다. 그러니까 바다의 서정시는 바로 군중의 서정시이다. 그의 시에서 한국 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예감하는 마음이 미리 짚어 보는 자리가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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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조인선(지은이)

196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993년 첫 시집 『사랑살이』를 시작으로 시집 다섯 권을 냈다. 안성에서 소를 키워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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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자화상 1 = 9
 거울 = 10
 황홀한 숲 = 12
 사랑 1 = 13
 민들레 = 14
 징징징 돋아난 = 15
 토마토 = 16
 유혹 = 17
 미소 = 18
 집 = 20
 합창 = 22
 입을 씻다 = 23
제2부
 자화상 2 = 27
 추억 속에 잠자는 여인 = 28
 파도 = 30
 사랑 2 = 32
 권태 = 33
 흔들리며, 삐걱이며, 스미는 = 34
 가족 사진 = 35
 새처럼 = 36
 호박 = 38
 수박 = 39
 空 = 40
 손을 씻다 = 41
제3부
 자화상 3 = 45
 벙어리 연가 = 46
 청춘 1 = 47
 숲속의 밤 = 48
 국화 옆에서 = 49
 구두를 찾아서 = 50
 데생 = 51
 어류 일대기 = 52
 아름다운 여인에게 1 = 54
 아름다운 여인에게 2 = 56
 존재는 의식 너머에 있다 = 58
 ○ = 60
 귀를 씻다 = 61
제4부
 자화상 4 = 65
 사랑하는 이에게 = 66
 鍾 = 68
 별 = 70
 먼지에 대하여 = 71
 꽃집에서 = 72
 한 줄의 연애 편지 = 73
 얼굴 없는 희망 = 76
 행렬, 그림자 없다 = 78
 장미 = 79
 經 = 80
 항아리에 들어가 앉다 = 81
 눈을 씻다 = 84
제5부
 자화상 5 = 89
 병원 = 90
 入夏 = 91
 청춘 2 = 92
 안개 = 94
 반성 = 95
 종말론 1장 = 96
 종말론 2장 = 97
 종말론 3장 = 98
 종말론 4장 = 99
 종말론 5장 = 100
 佛 = 101
 발을 씻다 = 102
해설·군중의 서정시를 위하여 / 정과리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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