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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ㆍ28 民主運動史. Ⅱ : 資料篇.

2ㆍ28 民主運動史. Ⅱ : 資料篇.

자료유형
단행본
단체저자명
2ㆍ28 40주년 기념사업회. 편찬분과위원회
서명 / 저자사항
2ㆍ28 民主運動史. Ⅱ : 資料篇. / 2ㆍ28 40주년 기념사업회 편찬분과위원회[편].
발행사항
대구 :   2ㆍ28 민주의거 40주년 특별기념사업회 ,   2000.  
형태사항
376 p. : 삽도 ; 2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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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정보

No. 소장처 청구기호 등록번호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No. 1 소장처 중앙도서관/교육보존(보건)/ 청구기호 953.0728 2000 2 등록번호 141030369 도서상태 대출가능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B M
No. 2 소장처 중앙도서관/민족문화연구원/ 청구기호 953.0728 2000 2 등록번호 192007101 도서상태 대출불가(자료실)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M

컨텐츠정보

목차

간행사 / 문희갑 ; 최용호 = 4
편찬사 / 홍종흠 = 6
일러두기 = 8
2·28 관련 국내신문기사 종합 = 23
영남일보 1960. 2. 10. 중고교 입시일 전후기 모두 연기 = 25
매일신문 1960. 2. 11. 입시일자 중학교만 변경 = 25
매일신문 1960. 2. 11. 학생이 혈서 = 25
매일신문 1960. 2. 29. 운영위 부위장 이대우군의 선동 = 25
대구일보 1960. 2. 29. 일요일등교 명령이 원인 = 25
대구일보 1960. 2. 29. 정계의 관심 고조, 자유당 대구학생데모 보고 미접 = 25
대구일보 1960. 2. 29. (사설) 학생시위사건에서 보는 교육당국의 불합리한 처사 = 26
대구일보 1960. 2. 28. 주모자의 석방 = 26
대구일보 1960. 2. 29. 일요등교 없도록 = 26
대구일보 1960. 2. 29. 아직 뒤숭숭한 각 고교 = 27
대구일보 1960. 2. 29. 배후를 계속 조사 = 27
대구일보 1960. 2. 29. 2·28 대구학생데모 = 28
동아일보 1960. 2. 29. 수성천변에 20만의 청중 = 29
대구일보 1960. 3. 1. 교내 해결못해 유감, 경찰 당국 수습엔 만족 = 29
영남일보 1960. 3. 1. (사설) 한국의 민주주의는 자라고 있다 = 30
대구일보 1960. 3. 1. (사설) 학생들의 자중을 거듭 요망한다 = 30
매일신문 1960. 3. 1. (사설) 2·28학생사건과 우리의 반성점 = 30
매일신문 1960. 3. 1. 관할 서장 책임 추궁, 래구한 치안국장, 데모사건에 언면 = 31
대구일보 1960. 3. 1. 3·1절 학생 행렬 금지. 도 시대중고학교장 회의서 지시 = 31
대구일보 1960. 3. 1. 학생 자숙을 촉구, 3·1절에도 동요했으나 수습 = 31
동아일보 1960. 3. 1. 일체를 불문에 붙일 터, 「원인·책임·배후 등 추궁」여당 = 31
매일신문 1960. 3. 1. 일요일 등교는 비열한 처사, 자유당 경북도당서 담화 = 32
대구일보 1960. 3. 1. 과외활동으로 생각, 공일 등교 모르는 일이라고 = 33
영남일보 1960. 3. 1. 학생 이용은 불가, 崔내무 각 도지사에 지시 = 33
영남일보 1960. 3. 1. 학생데모사건, 일체 불문키로 결정 = 33
동아일보 1960. 3. 1. 학원에 자유를 달라, 대구학생 데모사건 전모 = 34
조선일보 1960. 3. 1. 정치에 짓밟힌 학원, 대구학생 = 35
영남일보 1960. 3. 1. (유상무상) 결국은 무책임으로 낙착 = 35
서울신문 1960. 3. 1. 미성년자 선거운동 이용 불가 = 36
동아일보 1960. 3. 1. (사설) 대구학생시위 사건의 책임 = 36
조선일보 1960. 3. 1. (사설) 대구학생「데모」사건의 책임은 문교당국에 있다 = 36
영남일보 1960. 3. 2. (사설) 3·1절에 비상경계를 해야 하는 현실을 직시 반성하라 = 37
영남일보 1960. 3. 2. (사설) 학원의 자유와 자치문제 = 37
매일신문 1960. 3. 2. (사설) 공명선거추진 전국위원회의 정식 발족을 보고 = 37
매일신문 1960. 3. 2. 대구학생 데모 사건이 필도, AP보도 = 38
대구일보 1960. 3. 2. 학생들에게 재삼 자중을 맹촉한다
동아일보 1960. 3. 3. 모당서 배후 조정. 이국장 = 38
조선일보 1960. 3. 2. 대구의 경비 삼엄, 학생들 또 무언의 데모 = 38
영남일보 1960. 3. 2. 2·28학생데모 사건 진상조사, 崔내무 등 현지 파견 = 38
매일신문 1960. 3. 2. 스산한 대구의 3·12절, 시가행진도 중지, 각 학교 주변을 경계 = 39
서울신문 1960. 3. 3. 학생데모사건후의 대구선거 분위기 = 40
서울신문 1960. 3. 2. 미성년층의 중·고등학생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 = 40
매일신문 1960. 3. 3. 일요일등교는 잘못, 이대통령 = 40
매일신문 1960. 3. 3. 최내무 등 현지 파견 = 40
조선일보 1960. 3. 2. (사설) 대구학생데모사건의 책임문제를 재론함 = 40
매일신문 1960. 3. 3. (사설) 2·28학생사건은 빨리 수습되어야 한다 = 41
서울신문 1960. 3. 4. 부통령만의 선거 파기 내정 = 41
영남일보 1960. 3. 5. (사설) 학생데모 사건의 책임 소재 규명에 대한 논의 = 41
매일신문 1960. 3. 4. 배후 조종자 없다, 학생 데모 경고자체의 조사결과 = 41
매일신문 1960. 3. 5. 서울서 학생들이 데모 = 42
대구일보 1960. 3. 6. 학생의 자치적 단속 강화, 정치성 개입을 엄단 = 42
동아일보 1960. 3. 7. 2·28 대구데모 진상, 학생위 간부들이 말하는 경위 = 43
매일신문 1960. 3. 6. 학생들을 단속, 정치이용 안되도록 중고교장 회의 = 43
영남일보 1960. 3. 7. 학생데모 재연 안되도록 대비, 정치 이용은 부당 = 44
동아일보 1960. 3. 8. (사설) 학생의 정치운동 참여 한계 = 44
영남일보 1960. 3. 8. (사설) 학생은 선거운동의 이용물이 되서는 안된다 = 45
동아일보 1960. 3. 11. 「백만학도 일어나자」 대구시내에 벽보 나붙어 = 45
동아일보 1960. 3. 15. 포항서도 시위 = 45
매일신문 1960. 3. 12. 전국대학생구국경북연맹 결성식 = 45
동아일보 1960. 3. 17. 일부학생엔 형사가 미행까지, 대구의 경계태세 삼엄 = 45
영남일보 1960. 3. 13. (사설) 제발 그것만은 피하자 = 45
영남일보 1960. 3. 13. (사설) 학도호국단 폐지설에 대하여 = 45
동아일보 1960. 3. 26. 교사들이 가정방문코 감시, 대구학생데모 방지책 = 46
매일신문 1960. 4. 19. 집집에 투입된 삐라. 대구 = 46
한국일보 1960. 4. 20. 청구대학 교정서 농성중 = 46
한국일보 1960. 4. 20. 경북대생 2천 5백 데모 = 46
동아일보 1960. 4. 21. 대구서도 = 46
조선일보 1960. 4. 21. 20일에도 대구대학생들 데모 = 46
한국일보 1960. 4. 21. 요소마다 바리케이드, 학생 데모는 전부 좌절 = 46
한국일보 1960. 4. 20. 비맞으며 데모 학생 천 5백여명, 대구 = 46
영남일보 1960. 4. 20. 전장병 비상 소집, 2군사 전투 태세로 사태 대비 = 47
영남일보 1960. 4. 20. 19일 하오 시내서 경대생들 데모, 청대 야간부 학생도 데모 = 48
대구일보 1960. 4. 20. 3개 대학생 데모 좌절, 삼엄한 경계속에 평온 = 50
대구일보 1960. 4. 20. 낮에는 경대생 3천여, 밤에는 청대생 1천여 = 52
영남일보 1960. 4. 21. 계엄령하 대구거리는 평온, 각 관공서 종전대로 집무 = 54
대구일보 1960. 4. 21. 죽은 사람만도 115명, 부상자는 774명. 대구시내 군병력을 철수 = 56
매일신문 1960. 4. 22. 사망자 115명, 부상자 774명 = 58
대구일보 1960. 4. 20. 데모 앞으론 처단, 경찰의 보복 행위도 절대 불용 = 60
영남일보 1960. 4. 24. 대구지구 계엄소장 경대학생 대표와 회견 = 61
한국일보 1960. 4. 24. 내 피를 보내 달라. 대구학생들 혈액원에 = 61
영남일보 1960. 4. 24. 4·19사태에 말한다 = 61
대구일보 1960. 4. 24. 나는 이렇게 고문 당했다 / 배금원 = 62
대구일보 1960. 4. 24. 권력은 법을 돕는 것 = 62
한국일보 1960. 4. 24 경찰이 마구 때려. 대구·청구대 裵양, 중태 = 63
한국일보 1960. 4. 24. 대구학생데모에서, 피의 기록 승리의 일지 = 63
매일신문 1960. 4. 25. 동포를 울어주는 이 정성, 4·19희생자에 위문금 답지 = 64
매일신문 1960. 4. 26. 모진 매질뿐만 아니라 하의 벗겨 추잡한 짓까지 = 65
영남일보 1960. 4. 27. 시장관사에 난입 = 65
대구일보 1960. 4. 27. 대구거리에도 「데모」의 열풍, 대구 등지 다시 비상계엄 = 66
매일신문 1960. 4. 27. 부정선거에 책임지고 오지사와 이시장 사임 = 68
매일신문 1960. 4. 27. 각 파출소 때려부수고 내외방적에도 불질러 = 69
대구일보 1960. 4. 27. 대구시내의 피해 = 69
매일신문 1960. 4. 27. 사상학생 위문금 답지 = 69
영남일보 1960. 4. 27. 사과문 발표, 오지사 = 69
영남일보 1960. 4. 27. 마침내 공포 발사까지 = 70
대구일보 1960. 4. 27. 아직도 안가신 여분. 학생선무반 「질서」외치고 = 71
영남일보 1960. 4. 28. 차량운행금지 = 71
대구일보 1960. 4. 29. 사찰경관을 추방, 정치도구화 등도 방지 = 72
매일신문 1960. 4. 28. 흥분의 뒷치닥거리에 나선 비자루부대 = 72
영남일보 1960. 4. 28. 데모학생 편승한 불량배 일당 17명 = 72
영남일보 1960. 4. 28. 건설이다! 새날이 밝은 민주터전에 = 74
대구일보 1960. 4. 30. 불꽃번지는 학원정화 = 75
영남일보 1960. 4. 28. 학도장례식은 거족적으로 = 75
대구일보 1960. 4. 30. 대학 성명서 = 75
매일신문 1960. 4. 30. 발걸음도 가볍게 다시 학원으로 = 76
영남일보 1960. 5. 2. (사설) 혁신세력의 진출에 부친다 = 76
대구일보 1960. 5. 3. 4대 국회 물러가라, 대구시내 학생 2천여명 데모 = 77
영남일보 1960. 5. 3. 중고교생들 데모, 국회해산외치며 = 77
대구일보 1960. 5. 3. (사설) 학원의 민주화는 학문의 폭넓은 문호개방으로 = 77
영남일보 1960. 5. 3. 4·26과 어용학자, 아부근성의 독소를 뽑자 / 이원성 = 78
대구일보 1960. 5. 4. 어제 하오에도 6천여명 데모 = 78
영남일보 1960. 5. 4. 선선 후개 데모에 재검토론 = 78
대구일보 1960. 5. 4. 이제와서 책임전가의 추태 = 79
대구일보 1960. 5. 3. 3일에도 3천여명 데모 = 79
매일신문 1960. 5. 4. 도학무과장이 강요, 민주당 강연에 못나가게 = 80
영남일보 1960. 5. 5. 국회해산 데모는 중지 = 80
매일신문 1960. 5. 6. 민주혁명 횃불밝힌 별들, 경고 이대우군을 찾아 = 81
매일신문 1960. 5. 5. 우중에도 데모, 영남중·고 = 81
대구일보 1960. 5. 5. 선개후선에 동조, 국회해산요구데모 중지키로 = 81
대구일보 1960. 5. 3. 개헌후 해산토록, 대구 4개대학 대표들 결정, 중고생에 호소 = 82
매일신문 1960. 5. 7. 2명을 구속 기소, 데모에 편승 파괴행위한 불량배 = 82
영남일보 1960. 5. 3. 총장 사퇴 등 결의, 2일 상오 법대서 학생총회 열고 = 82
영남일보 1960. 5. 8. 각 기관장 사표받겠다고 시위, 남녀 중·고생들 농성까지 = 82
매일신문 1960. 5. 8. 데모 재발되면 연장, 대구 통금시간을 단축 = 82
매일신문 1960. 5. 7. 평화적 데모라도 강경한 조치 = 83
매일신문 1960. 5. 11. 동요하는 대학생들, 경대서 동맹휴학, 계대 일부학생 동요 = 83
매일신문 1960. 5. 12. 반청 단장 교장 자퇴 요구, 오성중고생들 = 83
영남일보 1960. 5. 14. 결의문(오성중·고교 교사 일동) = 83
영남일보 1960. 5. 18. 학생들, 교장 사택을 포위, 오성중·고 분쟁, 급기야 군 출동 = 84
대구일보 1960. 5. 27. 데모, 데모, 데모 황금시대? = 84
대구일보 1960. 5. 30. 이박사의 망명 방조 규탄, 오늘 구대생 천여명이 데모 = 85
매일신문 1960. 5. 19. 설계 도안 현상 모집, 민주혁명·대구학생 데모 기념탑 = 85
영남일보 1960. 5. 31. 허 내각 규탄「데모」, 망명 주선 사죄하라 = 85
매일신문 1960. 6. 1. 공납금을 인하하라 = 86
대구일보 1960. 7. 16. 신생활운동 전개, 대구서도 학생들이 가두 진출 = 86
영남일보 1960. 11. 1. 거리의 청소부터 첫 출발, 경대 문리대 신생활계몽대 발족 = 86
매일신문 1960. 6. 4. 성명서(오성중·고등학교 학부형 대표) = 86
매일신문 1960. 7. 16. 반혁명인사 규탄, 오늘 대구시내 만여 학생 모여 대회 = 86
대구일보 1960. 9. 29. 제자들도 단식 농성 = 87
매일신문 1960. 9. 29. 까닭없는 권리제한을 배격 = 87
영남일보 1960. 9. 29. 학생들도 농성투쟁에 동조 = 88
매일신문 1960. 9. 29. 스승 지지하려는 학생움직임 = 89
영남일보 1960. 9. 30. 노천 수업에 돌입, 대구상고 전교생 = 89
영남일보 1960. 9. 30. 스승없이 학도없다, 영남중고, 대구상고생 시위 = 89
매일신문 1960. 9. 30. 만여 학생 연좌 데모 = 90
매일신문 1960. 9. 30. 노래에 덧붙인 모방 구호, 국민교 꼬마 3백 명 데모 = 91
매일신문 1960. 9. 30. 쓰러져가는 우리 스승, 국회는 책임지라 = 92
영남일보 1960. 9. 30. 단식투쟁 스승과 함께 계속 = 93
대구일보 1960. 9. 30. 스승대열에 가세한 꼬마 = 93
영남일보 1960. 10. 2. 효대분규 격화 일로 = 94
영남일보 1960. 10. 10. 사친회연합회 월권적 성명을 취소하라 = 94
매일신문 1960. 10. 6. 학생은 새 질서의 선봉, 로이타 기자 = 95
매일신문 1960. 10. 6. 태반은 교장 배척, 4·19후 학원분규, 경북만 32건 = 95
영남일보 1960. 10. 20. 구대 정치학회 주최, 제5회 학생토론대회, 특등 김정오(경북고등) = 96
영남일보 1960. 10. 21. 구대 정치학회 주최, 제5회 학생토론대회, 일등 김동휘(양정고) = 97
영남일보 1960. 10. 22. 구대 정치학회 주최, 제5회 학생토론대회 = 97
영남일보 1960. 10. 23. 구대 정치학회 주최, 제5회 학생토론대회, 3등 협성상고(김문구) = 98
영남일보 1960. 10. 24. 구대 정치학회 주최, 제5회 학생토론대회, 서용석(양정고) = 99
매일신문 1960. 10. 26. 풍기문란은 절정, 4·19학생교외 생활지도 엉망 = 99
영남일보 1960. 11. 11. 민족통일촉진학생연구회 결성, 경대서 3백여 명 모여 = 100
영남일보 1960. 11. 5. 위령탑 등 30여점, 청대서 4·19기념물 건축전 = 100
매일신문 1960. 11. 27. 신생활계몽 등 민족주의학생운동협회 발족 = 100
영남일보 1960. 11. 26. 두 군데서 청중없는 강연, 세 명 앞에서 한 시간 열변 = 101
영남일보 1960. 1. 13. 아직도 남아있는 정치적 사찰, 학생단체 간부 성분 내사 = 101
매일신문 1960. 11. 30. 4·19돌날에 준공, 29일 건립위 모형도 함께 채택 = 101
영남일보 1960. 11. 30. 공고생들 교사반환을 한사 주장 = 102
대구일보 1960. 12. 9. 2·28과 4·19 = 102
영남일보 1960. 12. 1. 스스로 고치도록 지도, 학생생활지도위원회를 결성 = 102
영남일보 1960. 12. 14. 혁명전야 = 103
영남일보 1960. 12. 4. 입초선 돌파코 교사반환 절규, 경일중학생 = 103
매일신문 1961. 1. 13. 학생 취직, 정치적 난제로, 한국판「뉴·딜」정책에 기대 = 104
매일신문 1961. 1. 14. 통일 추진에 전기, 15일 서울서 학생·사회·종교단체 통합대회 = 104
영남일보 1961. 1. 25. 학생들·기성인을 다시 불신, 통일 우선을 주장 = 105
매일신문 1961. 2. 3. 학도예술제, 2·28을 기념 = 105
매일신문 1961. 1. 19. 2·28데모 앞장, 약초캐어 엄마 치료 = 105
영남일보 1961. 2. 17. 학생자치적으로 행사, 2·28기념 = 105
영남일보 1961. 2. 14. 탑세워 그 정신 기리 추앙, 2·28학생의거 일주년 맞아 = 105
영남일보 1961. 2. 17. 2·28데모의 배후 압력을 조사 = 106
영남일보 1961. 2. 19. 학생들끼리 기념식, 2·28행사 종합운동장서 개최하기로 = 106
영남일보 1961. 2. 21. 교과서 대금 인하 등. 각 단체 교원노조 지원 횃불 「데모」도 = 106
영남일보 1961. 2. 21. 2·28행진곡 = 106
영남일보 1961. 2. 21. 혁명풍(1) 2·28전야 = 106
영남일보 1961. 2. 22. 혁명풍(2) 혁명전야 = 107
대구일보 1961. 2. 23. 학교별 기념식 추진. 민주당, 2·28행사 등에 겁먹어 = 107
영남일보 1961. 2. 24. 2·28이 위기라고, 학생데모 책임은 교장에? = 107
영남일보 1961. 2. 23. 혁명풍(3) 경고학생 데모 = 108
대구일보 1961. 2. 24. (사설)2·28기념식은 학생·시민이 한 자리에서 가져야 한다 = 108
영남일보 1961. 2. 24. 혁명풍(4) 경고학생 데모 = 109
영남일보 1961. 2. 25. (유상무상) 학생은 이용물이 아니다 = 109
영남일보 1961. 2. 26. 오직 살 길은 통일 = 109
매일신문 1961. 2. 26. 2·28행사토의, 중고교장 회의 = 109
매일신문 1961. 2. 26. 대학생대표는 퇴장, 2·28기념행사 이견 백출로 = 110
영남일보 1961. 2. 26. 대학생들 총퇴장, 2·28기념준비회의서 = 110
영남일보 1961. 2. 25. 혁명풍(5) 경고학생 데모 = 110
영남일보 1961. 2. 26. 반민자 16명 심사 청구 = 111
영남일보 1961. 2. 26. 혁명풍(6) 경고학생 데모 = 111
대구일보 1961. 2. 26. 악질반민행위자는 16명 = 112
매일신문 1961. 2. 26. 16명만 심사청구하기로. 25일 첫 케이스 = 112
대구일보 1961. 2. 26. 「순수와 자치적」으로 행사, 2·28행사 학생추진위 합의 = 113
영남일보 1961. 2. 27. 혁명풍(7) 경고학생 데모 = 113
영남일보 1961. 2. 28. (사설) 2·28 1주년에 부친다 = 114
영남일보 1961. 2. 28. (사설) 독재타도의 봉화 2·28 = 114
영남일보 1961. 2. 28. 학생의거 일주년 기념 예술제 성황 = 114
영남일보 1961. 2. 28. 기성세대를 불신하던 날, 2·28 = 115
대구일보 1961. 2. 28. 혁명의 봉화, 대구 2·28 「데모」첫돌 = 116
대구일보 1961. 2. 28. 한 자리에 3만명, 2·28기념식 = 116
매일신문 1961. 2. 28. (사설)2·28대구학생 데모 사건 1주년을 맞아 = 116
대구일보 1961. 2. 28. 4·19도화선 경고생 데모, 다시 보는 1960년 2월 28일 = 117
매일신문 1961. 2. 28. 독재 뿌리뽑은, ''민주의 횃불'', 오늘 2·28한 돌 = 117
대구일보 1961. 2. 28. 이젠 부푸른 희망속에서, 2·28獅子들은 말한다 = 118
영남일보 1961. 2. 28. 2·28 한돌, 李독재는 무너졌건만 = 119
매일신문 1961. 2. 28. 의거 사자만의 성대한 기념식 행진도 = 119
매일신문 1961. 2. 28. 함성에 뒤덮인 혁명 횃불, 2·28기념 학도예술제 대성황 = 119
매일신문 1961. 2. 28. 2월의 화단에 꽃씨를 / 김윤식 = 120
매일신문 1961. 2. 28. 묵은 일기장에서, 2·28과 우리의 각성 / 김광진 = 120
영남일보 1961. 2. 28. 2·28정신과 우리의 반성 / 채희문 = 121
매일신문 1961. 3. 1. 4만학도가 참집 = 121
영남일보 1961. 3. 1. 교사반환 요구코 농성, 28일 대구중학생 = 121
매일신문 1961. 3. 2. 우리집 내놔라, 대구중학생 = 121
매일신문 1961. 3. 1. 한 돌만에 다시 터진 노도같은 외침, 2·28기념학생대회 = 122
영남일보 1961. 3. 1. 기리 빛나리 2·28의 정신 = 123
매일신문 1961. 3. 3. 대구중학생 데모시 미군 무장 낭설 = 123
매일신문 1961. 3. 3. 단체 특등에 경북중, 2·28기념 웅변대회 = 123
영남일보 1961. 3. 8. 대학생들에 회유 정책 = 124
대구일보 1961. 3. 21. (사설) 대구데모사건은 어떠한 각도에서 중대시해야 할 것인가 = 124
영남일보 1961. 3. 10. 「3월의 능선」 학도호국단을 상속받은 학생자치단체 = 125
영남일보 1961. 3. 19. 대구「데모」는 민의의 일단 = 125
대구일보 1961. 3. 19. 미명 아래 자유 억압, 천여 구중 우중 데모 = 125
매일신문 1961. 3. 19. 대구역전서 부딪칠 우려, 반공강연회와 악법반대 궐기 대회 = 126
매일신문 1961. 3. 20. 반공법 반대 데모·조법무장관 자택 투석, 대구사건 중대시 = 126
대구일보 1961. 3. 20. 대구 데모 사건 중대시, 20일 각의 열고 대책 강구 = 126
대구일보 1961. 3. 22. 졸업생없는 졸업날, 대구사법학생들 이틀째 맹휴 = 127
대구일보 1961. 3. 21. 대구사범 전교생 등교 거부, 반민 교장 물러가라고 = 127
영남일보 1961. 3. 21. 졸업식 전날에 동맹휴학, 대구사범 = 128
대구일보 1961. 3. 23. 결국 임시 휴교령, 대구사범 = 128
매일신문 1961. 3. 22. 사범교 맹휴 계속, 학생·교사 졸업식을 거부 = 129
대구일보 1961. 3. 25. 뒷따라 찬성데모도(반공법) = 129
대구일보 1961. 3. 25. 횃불「데모」일체 불허, 정부에 대한 불평은 부분적인 것 = 129
대구일보 1961. 3. 24. 오늘 대규모로 2차 데모, 구속학생 석방·악법 철회 절규 = 130
대구일보 1961. 3. 25. 상반된 두 개 데모, 악법 규탄싸고 학생 충돌 우려 = 130
대구일보 1961. 3. 25. 대구역전에 3만 군중, 꼬마에서 할머니까지, 학생투위 주최 = 131
대구일보 1961. 3. 25. 2차 데모 삼엄·흥분 속에 종료 = 132
대구일보 1961. 3. 25. 횃불 데모로 일대 충돌?, 경찰 강력히 제재 = 133
대구일보 1961. 3. 25. 교장실서 단식 투쟁, 대구사범 분규 = 133
매일신문 1961. 3. 25. 악법반대 궐기대회, 시민 여론 그대로 반영 = 134
영남일보 1961. 3. 25. 학생과 경찰태도 모두 강경, 횃불들면 소방법 적용 = 135
대구일보 1961. 3. 26. 관제「빨갱이」로 몰려는 수작, 민주당 정부는 무능. 부패 = 136
대구일보 1961. 3. 26. 물만으로 무기단식 돌입, 대사 농성 여학생 한 명 위독 상태
대구일보 1961. 3. 26. 4월 위기설 정체 모르겠다, 장 총리 가장 결혼 등 검토 후 처리 = 137
대구일보 1961. 3. 26. 오늘부터 전교생이 단식, 맹휴 6일째의 사범교 학생 결의 = 137
매일신문 1961. 3. 25. 청중 속에 여야 고위, 조재천씨 집 앞엔 3중의 피켓트 = 137
매일신문 1961. 3. 25. 가장 결혼·관 사르기 금지, 횃불데모도 = 138
대구일보 1961. 3. 26. 악법반대 데모 전국에 확대 = 138
매일신문 1961. 3. 26. 삼가 고한다(경상북도학생연합회) = 139
대구일보 1961. 3. 27. 16시간만에 해제, 사범교생 단식, 표 교장 경질 확약받고 = 139
영남일보 1961. 3. 28. 대구학생들 상경, 악법 반대에 서울학생들과 합류 = 140
영남일보 1961. 4. 2. 대구학생 세 명 구속, 악법반대 자금 얻으려고 상경 = 140
영남일보 1961. 4. 3. 학생 세 명도 연행, 삐라 뿌린게 도로취체 규칙 위반 = 140
대구일보 1961. 4. 7. 학생 데모 교문 앞에서 좌절, 경고 5백 여명 경찰 제지로 = 140
매일신문 1961. 4. 9. 4·19진원을 상징, 2·28학생의거기념탑, 오늘 기공식 = 140
매일신문 1961. 4. 10. 민족의 횃불 영겁히 빛나리, 2·28학생의거 기념탑, 기공식 = 141
영남일보 1961. 4. 10. 기리 빛날 2·28정신, 의거 학생기념탑 10일 상오 기공 = 141
매일신문 1961. 4. 10. 기관 주최를 거부, 4·19행사 학생만으로 준비 = 141
매일신문 1961. 4. 10. (사설) 역사적인 2·28학생의거 기념탑 기공식에 부쳐 = 142
영남일보 1961. 4. 9. (사설) 단식중인 데모대원은 시급히 석방되어야 한다 = 142
매일신문 1962. 3. 1. 기념탑에 묵념 = 142
대구일보 1962. 4. 19. 피로 엮은 민주사 = 142
대구일보 1961. 4. 13. 구속학생 석방하라, 대구서 앞에서 40분간 연좌 데모 = 143
영남일보 1961. 4. 14. 정군 석방을 요청, 구대교수단, 김차장 검사를 찾아 = 143
영남일보 1961. 4. 12. 정위원장을 구속, 10일 밤 공무집행방해 등 혐의 = 143
영남일보 1961. 4. 15. 학원의 자유마저 뺏는 만행, 악법반대학생투위 규탄대회 = 144
매일신문 1961. 4. 15. 뭉쳐야 한다.(대구시 4월혁명 기념행사 학생추진위원회) = 144
영남일보 1961. 4. 19. 귀에 쟁쟁한 작년 오늘의 아우성 = 145
매일신문 1961. 4. 19. 결국 갈래갈래 4·19기념, 관제행사라고 몇 학교는 독자로 = 146
영남일보 1961. 4. 15. 어용 판사 물러가라, 4·26민주투사 석방 외쳐 = 146
매일신문 1961. 4. 19. 혁명 오나수의 길로, 4·19 한 돌 맞아 각계서 기념사 = 146
대구일보 1961. 4. 20. 일곱군데의 4·19 = 147
영남일보 1961. 4. 19. 4·19의 회상 / 권혁소[구대 대학원장] = 147
대구일보 1961. 4. 20. 꽃바람타고 돌아온 4·19, 4·19일지 = 148
대구일보 1961. 4. 20. 6개교 참가 거부, 학교별로 기념식과 운동회 = 149
대구일보 1961. 4. 20. 교사 농성을 해제, 영남교 분규 = 149
영남일보 1961. 4. 20. 가로수를 식수, 경북학생건설대 = 149
영남일보 1961. 4. 21. 4·19 1주년 기념식, 「관제」란 의견 지배적, 학생투위서 = 149
영남일보 1961. 4. 21. 사흘 결석으로 간과 = 150
매일신문 1961. 4. 22. 거시적인 운동될 때까지, 4·19서 시작된 부고생 거리 청소 = 150
영남일보 1961. 4. 20. 뭉쳤던 4·19흩어진 돌 잔치 = 151
매일신문 1961. 4. 20. 다시 학생을 거리에 나서게 하지 말라 = 152
영남일보 1961. 4. 22. 고교생들도 통한 촉진에 한몫, 민족통일경고준비위를 결성 = 153
영남일보 1961. 4. 23. 4·19 회고 좌담회 = 154
대구일보 1961. 4. 26. 성명서(영남중·고등학교 학생자치회) = 154
영남일보 1961. 4. 25. 4·19 회고 좌담회 = 154
영남일보 1961. 4. 27. 4·19 회고 좌담회 = 155
영남일보 1961. 4. 27. 단식하면서 수업, 경여고 교사 전임 반대 농성 = 155
영남일보 1961. 4. 28. 4·19 회고 좌담회 = 155
매일신문 1961. 5. 7. 침묵데모하며 행진, 남북학생회담 지지대회 마치고 = 155
매일신문 1961. 5. 6. 자동케이스 아니다, 경여고생 전배 교사 유임 요구 농성 = 155
영남일보 1961. 5. 10. 남북한 학생 교류 데모와 대회로 지지 = 156
매일신문 1961. 5. 16. 종이로 만든 남북학생 지지 = 156
매일신문 1961. 4. 24. 민권의 불심지, 학생이기에 교직자리이기에 = 156
영남일보 1961. 5. 18. 군사혁명 토대위서 이룩, 민통련학생 조국통일에의 바람
대구일보 1962. 4. 19. 독재물러간 그 날 4·19 두돌 = 157
영남일보 1962. 4. 19. (금주의 인터뷰) 5·16에의 중간다리 역할(노 경대문리대학장) = 158
영남일보 1962. 4. 19. (내가 겪은 4·19) / 서한규 ; 배금원 = 158
영남일보 1962. 4. 19. 또 4월이 왔는데 = 158
영남일보 1962. 4. 19. 씨를 뿌린 4·19 두 돌, 12년 독재 아성은 이렇게 무너졌다 = 159
대구일보 1962. 4. 19. 예리했던 독재의 눈초리, 4·19의 비화 = 160
매일신문 1962. 4. 20. 햇빛 본 학도의 얼, 2·28학생의거기념탑 제막 = 160
대구일보 1962. 4. 20. 되새겨 본 그 날의 감격 = 161
대구일보 1962. 4. 20. 학생기념탑 제막 = 161
매일신문 1962. 4. 20. 4·19 두 돌 맞아, 대구를 중심으로 한 그 날 = 162
대구일보 1963. 2. 28. 2·28 세돌, 학생운동의 거점, 그 날을 살펴본다 = 162
매일신문 1963. 2. 28. 2·28의 시인은 말한다 / 김윤식 = 163
매일신문 1963. 2. 28. 우회로의 상 - 2·29에 부친다 - / 이만근 = 163
영남일보 1963. 2. 28. 그 정신 이어가는 길, 2·28의 선배에 욕되지 않게 = 164
매일신문 1963. 2. 28. 재건 학생들 뭉쳐, 2·28 감격되새겨 기념 웅변도 = 164
매일신문 1963. 2. 28. 그 날의 의(義)·오늘의 침묵 = 165
대구일보 1963. 3. 1. 「정의의 역사」새겨, 2·28대구학생기념탑 제막 = 165
매일신문 1963. 2. 28. 그 젊음, 그 의혈, 그 장거, 오늘 2·28 세 돌 = 165
매일신문 1963. 4. 19. 젊은 목숨 불사른 조국수호의 학생 의거. 3·1운동서 4·19까지 = 166
대구일보 1963. 2. 28. 그 날의 교장, 김영기 옹 = 168
매일신문 1963. 3. 1. 구악 철저히 뽑자 = 168
대구일보 1963. 2. 28. 새 감격·새 결심 = 168
영남일보 1963. 3. 1. 불의와 싸운 달, 2·28정신 다짐 = 168
대구일보 1963. 4. 16. 4월 사자에 건국 포장, 경북엔 부상자 등 21명 = 169
대구일보 1963. 4. 18. 4·19 세 돌 맞이, 「2·28의거」가 근원 = 169
대구일보 1963. 4. 19. 자유를 먹고 사는 4월의 광장, 오늘의 4·19 세 돌 = 170
대구일보 1963. 4. 21. (학생들의 좌담) 정의의 승리, 그날의 4·19를 말한다 = 171
매일신문 1963. 4. 21. (사설) 4월의 광장에 폭력이라니 = 172
매일신문 1964. 2. 28. "피맺힌 절규" 벌써 네 돌, 다시 2·28이 = 172
영남일보 1964. 2. 28. (사설) 2·28을 어떻게 기념해야 할 것이다 = 172
대구일보 1964. 2. 28. 2·28학생의거 네 돌 맞이 = 172
대구일보 1964. 2. 29. 그 날 의분 되새기며, 2·28 네 돌 감격어린 기념식 = 173
대구일보 1964. 2. 29. 4·19의 진원 2·28 대구학생의거 기념식 엄수 = 173
대구일보 1964. 4. 19. 4·19 네 돌, 그 명성을 되살린다 = 174
대구일보 1964. 4. 19. 세계사의 민주혁명 - 다시 4·19를 맞으며 - = 175
매일신문 1964. 2. 29. 다시는 부패없게, 2·28 네 돌 = 176
대구일보 1964. 3. 15. 2·28 내건 웅변대회 말썽, 찬조금받아 잠적 = 176
영남일보 1964. 4. 21. 전야제가 새벽제로 = 177
영남일보 1965. 3. 2. 2·28 기념식 엄수, 결의문 등 채택 = 177
영남일보 1965. 2. 28. 아쉬운 2·28 정신, 진정한 학생운동이어야 = 177
매일신문 1965. 2. 28. 4·19의 도화선 = 178
매일신문 1965. 2. 28. 퇴색해가는 자유 수호의 정신 - 2·28 5주년을 돌아본다 - = 179
매일신문 1965. 4. 18. 4·19는 의거나 혁명이냐, 학생의거탑과 비문 4·19 다섯 돌 = 180
영남일보 1965. 3. 2. 그 날의 의분 되새겨, 2·28의거 5주 기념식 = 182
영남일보 1965. 4. 27. 휴교·개교·쌍곡선, 구대·청구고 수업 재개 = 182
매일신문 1965. 4. 27. 계성·영남고생 데모 = 182
대구일보 1965. 4. 27. 계성·영고도 데모 = 182
대구일보 1966 3. 1. 2·28 제6주년, 28일 기념탑 앞서 기념식 = 182
매일신문 1966 3. 1. 자유수호를 다짐, 2·28 여섯돌 기념식 간소히 = 183
영남일보 1966 3. 1. 2·28에 생각나는 일 / 박찬 = 183
자료편 = 185
결의문 = 187
아직은 체념할 수 없는 까닭(『대구일보』, 1960. 3. 1) / 김윤식 = 188
2·28 기념탑 비문 / 청마 유치환 = 190
2·28 대구학생「데모」사건의 진상(『世界』, 1960. 11) / 남욱 = 191
『奇蹟과 幻想』(1960) 발췌 / 안동일 ; 홍기범 = 197
『慶脈』제7호(경북고등학교, 1960) 발췌
여는 시 『大河』 / 유치환 = 206
2·28은 정의의 본 / 장면 = 207
3·1운동과 4월혁명 - 경고의 실록과 전통 / 백기만 = 210
청사(靑史)에 빛날 2·28 「데모」 - 감격의 그날의 어이 잊으랴 - / 박정봉 = 214
2·28은 자유민권 혁명의 기수 / 김윤식 = 219
2·28이 남긴 교훈 / 효봉 = 222
내일을 위한 투쟁 / 이대우 = 225
2·28 경과 상보 = 230
2·28 평론 묶음 - 언론계는 이렇게 보았다 - = 240
4월의 교단 / 김규성 = 249
2·28정신과 학생의 자각 / 채희문 = 252
『達斤』 창간호(대구고등학교, 1960) 발췌
대구고교생의 장거는 민주혁명의 선봉 / 장면 = 254
학생 제군에게 부탁하는 말 / 한솔 이효상 = 255
부정에 항거하는 젊음들 / 손진흥 = 257
2·28의 의미는 - 경맥 2·28특집을 보고 - = 269
『群星』 8호(경대 사대부속고등학교, 1961) 발췌
역사의 전환점 - 2·28을 중심으로 - / 박재철 = 271
대구 사회의 동태(『사상계』, 1961. 5) / 탁희준 ; 이정재 = 276
2·28 대구학생 데모(『영남일보』, 1970. 11. 29) = 307
정치사에 남긴 2·28의 의의(『영남일보』, 1970. 2. 27) = 310
10년 뒤에 평해 본 2·28의거(『대구경제신문』, 1970.) = 314
2·28 10주년 매일신문 특집 - 기상에 끼어든 2·28 주역들 피맺힌 증언 - (『매일신문』, 1970. 2. 28) = 316
2·28 29주년 기념좌담회 - 「2·28 학생의거」 민주 운동의 시발 - (『경북일보』, 1989. . 28) = 319
『경북중고등학교 70년사』 중 중고통합시대(1959∼1971)에서 발췌 = 325
『대고 30년사』에서 2·28 관련부분 발췌 = 340
『대륜 70년사』에서 2·28 관련부분 발췌 = 348
『대구농고 80년사』에서 2·28 관련부분 발췌 = 349
『경북대 사대부고 40년사」에서 2·28 관련부분 발췌(최용호 기고문 포함) = 351
2·28 대구학생의거(「정경문화」, 1984. 2.) / 홍종흠 = 359
편찬위원 및 집필위원 명단 = 377

관련분야 신착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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