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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시/해제

죽석총함(竹石叢函) 해제(解題)

작성자
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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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0-02-22 03:15
조회
1322
청구기호 육당 貴 78 서 명 죽석총함(竹石叢函) 저 자 서영보(徐榮輔) 편(編) 판 사 항 필사본(筆寫本)(고본(稿本) 및 정사본(精寫本)) 발생사항 刊寫地未詳, 刊寫者未詳, 순조(純祖) 1-15(1801-18156) 경(頃) 형태사항 9冊 : 四周雙邊 半郭 20.0 ×13.0 cm, 有界, 10行21字 ; 28.8 ×17.9 cm.
1. 개요

이 책은 조선 후기 학자인 서영보(徐榮輔, 1759-11816)가 자신의 글을 모은 내집(內集 )과 다른 사람들의 저술을 모은 외집(外集)으로 구성한 총서(叢書)이다. 서영보 저술의 특징은 박학(博學)을 추구하며 학문의 치국(治國)에의 도움, 학문의 실용성 등을 위한 저술을 남긴 것인데, 이 특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저술이 『죽석총함(竹石叢函)』이다. 서영보 자신의 저술인 내집(內集)에서는 서영보의 문예미(文藝美)를 추구한 문인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군정(軍政)과 농업(農業) 등 시무(時務)에 관한 일을 중심으로 중국의 저술과 다른 사람들의 저술을 인용하여 실용을 추구하는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였다.

이 죽석총함은 조선후기 박학(博學)의 학풍과 문예미와 실용을 추구한 서영보의 학풍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저술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이 죽석총함은 서영보 자신의 장서인(藏書印)과 친필이 섞여있는, 서영보가 직접 정리한 정사본(精寫本)으로도 가치가 있는 책이다.

2. 서영보의 생애

서영보(徐榮輔, 1759-1816)는 본관이 대구(大邱), 자(字)는 경세(慶世), 호(號)는 죽석(竹石)이다. 서영보는 그의 종조부(從祖父)인 수헌(秀軒) 서무수(徐懋修, 1716-1785)의 묘지명을 쓸 때 자신의 가문에 대해 ‘사세오공(四世五公)’이라 칭했을 정도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명문가이다. 서영보의 7대조인 서경주(徐景霌, 1573-1654)는 선조(宣祖)의 부마(駙馬)로 달성위(達城尉)에 봉해진 인물이고, 6대조 서정리(徐貞履, 1599-1664)는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5대조 서문상(徐文尙, 1630-1677)은 서정리(徐貞履)의 첫째 아들로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냈다. 고조부 서종태(徐宗泰, 1652-1719)는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 서명균(徐命均, 1680-1745)는 좌의정을 지냈으며, 조부 서지수(徐志修, 1714-1768)도 영의정에 오르며 3대에 걸쳐 정승을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 서유신(徐有臣, 1735-1800)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서영보도 대제학을 지냈으며 그의 둘째 아들 서기순(徐箕淳, 1791-1854)이 또한 대제학에 오르며 3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서영보 교유의 특징적인 면은 같은 소론(少論) 당색의 강화학파(江華學派)와의 교유이다. 그는 소론(少論) 명가(名家)의 후예들을 가르치며 강화학(江華學)을 이어나간 이광려(李匡呂, 1720-1783)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강화학(江華學)은 양명학(陽明學)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고증학(考證學)의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소화하였으며 박학(博學)을 추구한 학문으로 평가받는다. 서영보와 함께 이광려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완구(宛丘) 신대우(申大羽, 1735-1809),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 이만수(李晩秀), 박시수(朴蓍修), 서기수(徐淇修)와 동생인 서경보(徐耕輔, 1771-1839)가 있다. 이와 같은 교유로 인해 서영보는 이광려를 위한 「이참봉만(李參奉挽)」과 문집의 서문인 「이참봉집후서(李參奉集後序)」, 신대우의 제문인 「제완구신공문(祭宛丘申公文)」도 지었던 것이다. 서영보는 강화학(江華學)의 전통인 전내실기(專內實己 : 내면을 오롯하게 하고 자기에게 충실할 것)의 실학(實學) 전통을 이어나가며 자신의 학문을 열어나갔다.

서영보는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장원하였고, 1790년 성절 겸 사은사(聖節兼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행에 갔다온 뒤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갔다. 함경도의 사정을 살펴본 결과로 「함경남도암행별단(咸鏡南道暗行別單)」을 보고하였고, 1794년(정조 18)에는 호남에 기근이 들어 호남위유사(湖南慰諭使)로 나가 호남의 바닷가 6읍을 다니며 백성의 삶을 살피고 「호남위유별단(湖南慰諭別單)」을 보고하였다. 1795년(정조 19)에는 영변부사로 있으면서는 「교민오칙(敎民五則)」을 지어 백성들을 잘 가르치고 다스릴 것을 강조하고 스스로 다짐하였다. 1808년(순조 8)에는 호조판서로 있으며 각종 시무에 대해 차대(次對)하였고, 심상규(沈象奎), 1766-1838)와 함께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편찬하였다. 또한 평안도관찰사로 나가서는 「관서응지계(關西應旨啓)」를 올려 전정(田政), 군정(軍政), 조정(糶政) 등에 대해 논하였고, 관서(關西) 지역의 국방의 중요성을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다.

이와 같이 서영보는 대대로 정승 등을 지낸 명문가의 후손으로 국가 통치의 실무적인 일에 큰 관심을 보여, 중앙 관직 뿐 아니라 지방관으로도 많이 다니면서 당대 재정(財政)과 군정(軍政) 등에 대해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실무관료로서 주요역할을 하였다.

3. 『죽석총함』의 구성과 내용

서영보 저술의 특징은 당대에 성행하였고 강화학(江華學)의 한 맥이기도 한 박학(博學)을 추구하며 학문의 치국(治國)에의 도움, 학문의 실용성 등을 위한 저술을 남긴 것이 특징이다. 이 특징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저술이 『죽석총함(竹石叢函)』이다.

『죽석총함(竹石叢函)』은 자신의 글을 모은 내집(內集)과 다른 사람들의 저술을 모은 외집(外集)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개인의 저술만으로 총서(叢書)를 엮은 서명응(徐命膺)의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와도 다르고, 자신의 저술과 기타 여러 저술을 같이 모아 편찬한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모습과도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저술이다.

고려대 도서관 소장 『죽석총함(竹石叢函)』은 내집(內集) 3책과 외집(外集)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집 1책은 문(文)으로 발문(跋文)과 기문(記文), 묘지(墓誌), 서문(序文), 책문(策問) 등이 문체 구별없이 수록되어 있는데, 주로 1791년(정조 15)부터 1794년(정조 18) 사이에 지어진 글들이다. 이 중 「중수몽천암기(重修夢泉菴記)」는 강원도 고성에 위치한 몽천암(夢泉菴)의 개축과정을 적은 글인데, 이만수에게 “「풍악기」보다 신운(神韻)을 더 느낄 수 있다”라는 극찬을 받은 글이다. 참고로 「풍악기(楓嶽記)」는 1806년 9월 금강산을 유람하고 지은 기행기로, 서영보의 대표적인 기문이다. 「상족형우상서(上族兄右相書)」는 구황(救荒)에 필요한 쌀을 살 수 있는 민전(緡錢)을 지급해달라는 주자(朱子)의 공이(公移)를 언급하고, 구황(救荒)이 급선무임을 강조하며 민생에 힘써야 함을 강조한 글이다.

2책은 공가문(公家文)의 표제로 「호남위유별단(湖南慰諭別單)」과 각종 전문(箋文)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실린 내각전문(內閣箋文)은 그의 문집인 『죽석관유집(竹石館遺集)』에 실려있지 않은 글들이 많이 있다. 책3은 잡저(雜著)로 『죽석관유집』 책7의 외편(外篇) 부분이다. 『죽석관유집』의 「수차삼선설(水車三選說)」에는 수차(水車) 그림이 없지만 『죽석총함』에는 그림까지 갖춰진 온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외집의 1책과 2책은 비궁편(匪躬編)이란 표제를 붙이고 있다. 비궁편(匪躬編)은 『주역(周易)』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충성한다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방책을 모은 글로 구성되어 있다. 1책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상소문 등을 실었는데, 군정(軍政) 등에 대한 시무책이 주를 이룬다. 2책은 율곡주차(栗谷奏箚)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앞서 생애에서 서술했듯이 당대 재정(財政)과 군정(軍政) 등에 대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는 실무관료로서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3책은 수차(水車)와 수법(水法)으로 『농정전서(農政全書)』와 『태서수법(泰西水法)』의 내용을 옮겨놓은 것이다. 서영보 자신이 「수차삼선설(水車三選說)」을 쓰는 등 수차의 활용에 매우 적극적인 모습과 관심을 보였기에 중국의 수리학(水利學)이 총정리 되어있는 『농정전서』와 『태서수법』을 자신의 저술에 옮겨온 것이다. 4책과 5책은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중 권51-52 부분인 『청령국지(蜻蛉國志)』이다. 이는 다양한 학적 관심 뿐아니라 서영보의 국방 등에 대한 관심에서 기인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6책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이다. 『기기도설』은 거중기(擧重器), 수차(水車) 등 서양의 기기 등을 설명한 책으로, 서영보는 원전 그대로 그림과 함께 전재하였다. 정조는 1798년(정조 22) 11월 30일 전국의 유생들과 관료들에게 당면한 농업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담은 농서(農書)를 써서 의무적으로 바치라는 「권농정구농서윤음(勸農政求農書綸音)」을 내린 일이 있다. 이로 인해 많은 학자들이 농업에 관심을 더욱 가지게 되며 각종 농서들을 저술하게 되었는데, 서영보의 저술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보만재총서』를 저술한 서명응은 중 농서인 『본사(本史)』에서 수리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수차지식을 체계적으로 고찰하였는데, 서영보도 수차에 대한 문헌을 이와 같이 정리했다는 점에서 동시대에 학문적 관심과 정보를 공유했다고 할 수 있다. 서영보의 서명응 일가와의 교유관계를 보았을 때 이와같은 학문적 교류는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기기도설』의 수차 기록을 그림과 함께 소개한 것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가 처음이라고 평가받았는데, 『죽석총함』을 통해 보면 오히려 서영보의 기록이 더 앞설 수 있다.

『죽석총함』은 고려대 소장본 외에 연세대와 규장각 소장 10책본이 있는데, 구성이 조금 다르다. 연세대와 규장각 소장 10책본의 내집은 1책이 『죽석관유집』 8책 부분인 『예기차록(禮記箚錄)』이고, 2책과 3책은 시(詩)와 문(文) 습유(拾遺)로 고려대 소장본과 조금 다르다. 또한, 외집 부분의 구성도 차이가 있다. 외집은 5책까지 비궁편(匪躬編)으로 고려대 소장본의 李恒福과 柳成龍의 상소문 뿐 아니라 김육(金堉),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의 상소문 등을 싣고 있다. 6책은 북관사의(北關事宜)와 균역혹문(均役或問), 해서관방(海西關防)을, 7책은 8도의 감영소재지를 기점으로 하는 이정표를 기록하고 있다. 고려대 소장본 『죽석총함』이 군정(軍政)과 국방 등 시무와 농업 관련부분까지 다양한 관심의 저술을 모아놓은 것과는 다르게, 연세대와 규장각 소장 『죽석총함』은 주로 국방 부분 위주로 외집을 구성하고 있다.

4. 『죽석총함』의 가치

『죽석총함』은 조선후기 문신 서영보가 자신의 글을 모은 내집(內集)과 다른 사람들의 저술을 모은 외집(外集)으로 구성한 총서(叢書)이다. 이는 개인의 저술만으로 총서(叢書)를 엮은 서명응(徐命膺)의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자신의 저술과 기타 여러 저술을 같은 주제아래 함께 엮은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모습과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총서이다. 이는 조선후기 박학(博學)의 학풍 중에 나온 또 하나의 특징적인 저술로, 문예미와 학문의 실용성을 추구한 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죽석총함에는 서영보인(徐榮輔印), 옥경산방(玉磬山房) 등 서영보 자신의 장서인(藏書印)이 찍혀 있고, 주묵(朱墨)으로 두주(頭注), 상란외주(上欄外注), 비점(批點), 권점(圈點) 등의 서영보 친필이 있는, 서영보가 직접 정리한 정사본(精寫本)으로도 가치가 있는 책이다.

5. 참고문헌

심경호, 2007, 「한국 유서(類書)의 종류와 발달」, 『민족문화연구』 47.

이현일, 2015, 「죽석 서영보의 풍악기(楓嶽記)에 대하여」, 『우리한문학회』 33.

한민섭, 2013, 「『죽석관유집(竹石館遺集)』 해제(解題)」, 역주 『죽석관유집』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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