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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전시/해제

보만재총서(保晚齋叢書) 해제(解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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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2 03:14
조회
1280
청구기호   貴 235

서     명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저     자    서명응(徐命膺) 찬(撰) ; 서호수(徐浩修); 서형수(徐瀅修) 동교(同校) ; 서유본(徐有本); 서유구(徐有榘) 동열(同閱).

판 사 항    필사본(筆寫本)

발생사항   刊寫地未詳, 刊寫者未詳, 1787

형태사항   零本30冊 (全60卷31冊) : 四周單邊 半郭 23.4 ×15.8 cm, 有界, 10行20字, 上白魚尾 ; 32.5 ×21.2 cm.

1. 개요

이 책은 조선 후기 학자인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 1780년(정조 4) 벼슬을 그만둔 후 자신의 저술들을 모아 1783년(정조 7년)에 완성한 개인 총서(叢書)이다. 서명응의 학문은 경학(經學)·사학(史學)·천문학(天文學)·농학(農學) 등 학문 거의 전 분야에 걸친 박학(博學)의 경향을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서명응은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 걸쳐있는 자신의 저술 13종을 경(經)·사(史)·자(子)·집(集)의 사부(四部)로 분류하여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라는 이름으로 60권을 편찬하였는데, 이 보만재총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인 저작에 ‘총서(叢書)’라는 서명(書名)이 붙은 저작이다. 보만재총서의 편찬 사업에는 그의 아들 학산(鶴山) 서호수(徐浩修, 1736-1799)와 명고(明皐) 서형수(徐瀅修, 1749-1824), 손자 좌소산인(左蘇山人) 서유본(徐有本, 1762-1822)과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가 참여하여 그의 학문은 자연스럽게 가학(家學)으로 형성된 특징이 있다.

이 보만재총서는 수학(數學)·역학(曆學) 등을 사유의 중심으로 하는 가운데 다양한 학문을 탐구하는 박학(博學)과 고증학(考證學)의 학풍을 보이는 조선후기 지성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본교 도서관 소장 보만재총서는 여러 번의 수정과정을 거쳐 서명응 집안에서 직접 필사하여 완성한 책이다.

2. 서명응의 생애

서명응의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군수(君受), 호는 보만재(保晩齋)이다. 판서를 지낸 서성(徐渻)의 5세손이고, 정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서명선(徐命善)이 그의 동생이다.

서명응은 1754년(영조 30)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거친 뒤 연경(燕京)에 사행하였다. 영조 대에 문형(文衡)을 지냈고, 정조가 동궁으로 있을 때 빈객(賓客)이 되어 정조의 학문에 도움을 주었으며, 정조 즉위 직후 규장각에 세워진 후 규장각 대제학(大提學)에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영·정조대의 국가 편찬사업에 실무자로 활약하며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규장각지(奎章閣志)·역학계몽집전(易學啟蒙集箋)·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양한사명(兩漢詞命) 등을 편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개인적으로는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보만재사집(保晩齋四集)』 등 거질의 저술을 남겼다.

서명응의 호인 ‘보만재(保晩齋)’는 정조가 만년의 절개를 잘 지켰다고 칭천하며 직접 하사한 호이다. 서명응은 ‘보만재(保晩齋)’라는 호를 받았을 당시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고, 이후 그전에 사용하던 염계(恬溪)라는 호 대신 보만재(保晚齋)를 사용하였다.

阿兒言從紫闥歸, 아들이 조정에서 돌아와

恭敷至尊鄭重辭. 공경히 임금님의 은근한 말씀 진술하네.

保晩嘉號今肇錫, “보만(保晩)이란 아름다운 호 오늘 비로소 내리니

往揭卿父齋之楣. 가서 경의 아버지 서재 처마에 거시오.

卿父名節到老全, 경의 아버지 명분과 절의는 늙어서도 온전하니

約略數之有三奇. 대략 헤아려보자면 뛰어난 일 세가지라.”

老臣聽罷起拜受, 노신 다 듣고 일어나 절하고 받으니

感極而涕涕漣洏. 감동이 극에 달해 눈물이 줄줄 흐르네.

自從立朝三十年, 조정에 선 지 30년

環顧言行多忸怩. 그간의 언행 살펴보니 부끄러움 많아라.

飄然白髮每自傷, 표연히 백발이 되어 매번 슬퍼하니

將何他日報嚴慈. 부모같은 은혜 장차 어느 날에야 갚을까.

사후 문정(文靖)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838년(헌종 2)에 금릉취진자(金陵聚珍字)로 문집인 『보만재집(保晚齋集)』이 16권 8책으로 간행하였다.

3. 『보만재총서』의 구성과 내용

서명응은 보만재총서를 완성한 후 직접 「제보만재총서(題保晩齋叢書)」를 적어 자신의 저술에 대한 자부심을 다음과 같이 내보였다.

明代에는 『漢魏叢書』가 있고 『唐宋叢書』가 있으며 『格致叢書』가 있는데, 모두 여러 사람들의 저술을 모아 책을 만든 것으로 한사람의 말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말로 叢書를 만든 것은 오직 唐나라 陸天隨의 『笠澤叢書』이지만, 詩文일 뿐이고 저술은 거의 없으니 어찌 叢書라 이름지을 수 있겠는가? 나는 젊어서부터 六經의 뜻과 天地의 문장, 禮樂과 政法의 연유를 궁구하여 책으로 저술하여 한 질을 만들고, 늘그막에 이르러 여러 아들과 손자들로 하여금 엮고 교정보게 하여서는 『保晩齋叢書』를 만들었다. 保晩齋는 우리 임금님께서 賤臣에게 내려주신 號이니, 이 책을 보면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家業의 전수를 알 수 있고, 또한 道가 이같이 통하기 어려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後生들은 힘쓸지어다!

여기에서 자신 저술로만 엮은 개인 총서와 ‘보만재(保晩齋)’라는 호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다. 서명응은 명대(明代)의 『한위총서(漢魏叢書)』·『당송총서(唐宋叢書)』·『격치총서(格致叢書)』 등은 여러 사람들의 저술을 모은 것이고, 개인 총서는 당(唐) 육천수(陸天隨)의 『입택총서(笠澤叢書)』가 있지만 이 또한 시문(詩文)만 모은 것으로 제대로 된 총서라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러면서 다양한 방면의 개인 저술을 묶은 개인 총서는 자신의 저술이 처음이고, 자신의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는 ‘보만재(保晩齋)’라는 서명으로 쓰인 첫 번째 저술이기 때문에 그 기쁨도 함께 나타내었다.

『보만재총서』는 전체 60권 31책이나 본교 도서관 소장본은 『참동고(參同攷)』 권5-6 부분이 결본인 영본 30책이다. 『보만재총서』는 경(經)·사(史)·자(子)·집(集)의 사부(四部) 분류체계에 따라 경익(經翼), 사별(史別), 자여(子餘), 집류(集類)로 되어있으며, 수록된 저술은 다음과 같다.
구 분 권 차 서 명 권수 의미
경익

(經翼)
卷 1-2 선천사연(先天四演) 2권 음양(陰陽)
卷 3-4 상서일지(尙書逸旨) 2권 음양(陰陽)
卷 5-6 시악묘계(詩樂妙契) 2권 음양(陰陽)
卷 7 대학직지(大學直旨)
卷 8 중용경위(中庸經緯)
사별

(史別)
卷 9-10 주사(疇史) 2권 음양(陰陽)
卷 11-22 위사(緯史) 12권 12月
卷 23-34 본사(本史) 12권 12月
자여

(子餘)
卷 35-36 비례준(髀禮準) 2권 음양(陰陽)
卷 37-38 선구제(先句齊) 2권 음양(陰陽)
卷 39-42 원음약(元音鑰) 4권 사상(四象)
卷 43-48 참동고(參同攷) 6권 육효(六爻)
집류

(集類)
卷 49-60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 12권 12月
보만재총서 전체를 60권으로 구성한 것은 율력(律曆)의 60조(調)나 60갑자(甲子)에서 그 수를 취한 것이고, 각 저술의 권수도 12월의 12권, 육효(六爻)의 6권, 사상(四象)의 4권, 음양(陰陽)의 2권 등 율력(律曆)과 역학(易學)에 관련된 수로 구성한 특징이 있다.

또한 각 저술의 성격에 따라 저자의 표시도 다르게 하였다. 맨 처음에 놓인 『선천사연(先天四演)』의 저자 표시는 ‘달성(達城) 서명응(徐命膺) 학(學)’으로 적혀있다. 이는 역학(易學)에 대해 학인(學人)의 자세를 보인 겸양의 표현이며, 또 주목되는 점은 ‘達城 徐命膺 學’ 외에 ‘남(男) 호수(浩修) 형수(瀅修) 동교(仝校)’, ‘손(孫) 유본(有本) 유구(有榘) 동열(同閱)’이 적혀있다는 점이다. 『선쳔사연(先天四演)』은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 맨 앞에 놓이며 13종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보만재총서』 및 서명응 개인 저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저술이다. 따라서 서명응은 자신의 학문 핵심이 담겨있는 이 저술 작업에 아들과 손자를 모두 참여시켜, 자신의 학문을 가학(家學)으로 전하고자 하는 뜻을 담았다.

『선천사연(先天四演)』과 같이 ‘達城 徐命膺 學’으로 되어 있는 저술은 『상서일지(尙書逸旨)』, 『시악묘계(詩樂妙契)』, 『대학직지(大學直指)』, 『중용경위(中庸經緯)』, 『원음약(元音鑰)』이 있다. 그리고 ‘학(學)’과 비슷하게 겸양의 표현을 쓴 것으로 여러 글들을 모았다는 뜻의 ‘집(輯)’이 있다. ‘달성(達城) 서명응(徐命膺) 집(輯)’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저술은 『주사(疇史)』, 『비례준(髀禮準)』, 『선구제(先句齊)』가 있다.

지리지 『위사(緯史)』는 서명응(徐命膺)이 의례를 정한 뒤 서유구에게 편찬을 맡겼기 때문에 ‘달성(達城) 서명응(徐命膺) 감정(鑒定), 손(孫) 유구(有榘) 편열(編閱)’이라 하여 편찬 경위를 밝혔다. 그리고 농서인 『본사(本史)』는 ‘달성(達城) 서명응(徐命膺) 찬(撰)’이라 하였다.

집류(集類)에 수록된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은 기존의 저술인 『고사신서(攷事新書)』를 개정한 것으로 저자 표시도 ‘달성(達城) 서명응(徐命膺) 중정(重訂)’이라 하여 『고사신서』를 수정하였음을 밝혔다.

4. 『보만재총서』의 가치

『보만재총서』는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 1780년(정조 4) 벼슬을 그만둔 후 자신의 저술들을 모아 1783년(정조 7년)에 완성한 개인 총서(叢書)이다. 이 책은 다양한 방면에 걸친 한 개인의 저술을 묶은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 개인 총서이고, 본교 도서관 소장본은 여러 번의 수정과정을 거쳐 서명응 집안에서 직접 필사하여 완성한 책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본교 도서관에는 또 다른 필사본 『보만재총서』 12책(육당 E2 A2)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는 본문에 수정이 가해지고 종이가 오려 붙여진 흔적이 보이는 편집 과정에 있던 원고본이다. 육당문고본은 『보만재총서』의 편찬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육당문고에는 서명응 일가에서 저술을 편찬하는 과정에 있던 원고본이 다수 보인다.

서명응의 보만재총서 편찬사업에는 그의 아들 서호수)와 서형수, 서유본과 서유구가 참여하여 그의 학문은 가학(家學)으로 형성이 되었고, 다양한 학문을 탐구하는 박학(博學)의 학풍은 조선후기 지성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5. 참고문헌

김문식, 1996, 「서명응 저술의 종류와 특징」, 『한국의 경학과 한문학』.

조창록, 2004, 「조선조 개성(開城)의 학풍과 서명응 가의 학문」, 『대동문화연구』 47.

한민섭, 2010, 「서명응 일가의 박학(博學)과 총서(叢書)·유서(類書) 편찬에 관한 연구」, 고려대 박사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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