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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ampus] 12만 장서에 담긴 생의 무늬, 아름다운 결을 이어가다-고려대 한적실 (KU Story 2019.05.23)

Writer
도서관
Date
2019-05-27 12:00
Views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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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만 장서에 담긴 생의 무늬, 아름다운 결을 이어가다

고려대 한적실

 

사람이 남긴 무늬, 이를 우리는 ‘인문’이라 부른다. 그 무늬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책들의 전당, 도서관에는 억겁의 시간 동안 쌓여온 생의 무늬들이 겹겹이 놓여 있다. 1937년 중앙도서관 개관과 함께 한문으로 쓰인 서적들을 관리하는 한적실을 운영해온 고려대. 그 안에 보존된 약 12만 장서 속 생의 무늬, 아름다운 결을 찾아서.

 

1937년에 세워진 고려대 최초의 도서관 안에는 한문으로 쓴 책을 보관하는 한적실이 있다. 총 3층에 나눠 보관 중인 한적들을 질적으로 평가한다면 국내 시립대학 최고라 할 수 있으며, 양적으로는 서울대 규장각 다음으로 많은 책을 보존 중이다.

한적실을 담당하는 학술정보열람부 한민섭 과장은 요나라 승려 행균이 997년에 펴낸 한자 자전 <용감수경>과 <삼국유사>, <용비어천가>을 포함한 국보 1점과 보물 9점을 한적실의 대표적 자료라 소개했다. 그 외에도 보관 중인 12만여 권의 장서 중에는 귀중서로 분류된 것들이 상당수이며,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 출판된 의미 있는 한국관련 서양서도 많다. 고려대 한적실의 특이점은 책 분류법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일반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문학, 사학, 역사철학 식의 분류법이 아니라 동양의 전통적인 방식인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분류를 따르고 있는 것. 그래서인지 몰라도 고전적 유산을 그대로 간직해 온 이 공간에 들어선 이는 누구나 숭엄한 감정에 휩싸인다. 물론 누구나 이곳에 입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층의 대학원 자료실만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개방돼 있다. 또한 실물로 한적 열람을 원한다면 미리 열람 신청을 통해 누구나 한적실에서 서적을 직접 볼 수 있다.

 

▲한적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서가의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한 항온항습서고의 모습. 약 6,000여 권의 귀중서만이 한정된 서고에 보존되어 있다. 층층이 보존된 지혜의 결, 역사의 흔적

 

아름다운 구 중앙도서관의 석조계단을 따라 걷다 보면 총 3개 층에 자리한 한적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제일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는 2층 서가에는 도난과 방화를 방지하기 위해 마련했던 셔터는 물론 손으로 레버를 돌려 열고 닫던 창문까지 그 시절 그대로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새롭게 단장하기보다 옛 서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보수하는 데 힘쓴 과거가 여실히 드러난다.

 

 

한적 대부분은 중앙도서관 신관으로 이전했는데, 대부분을 일일이 포갑 처리해 정갈하게 세워 두었다. 남아 있는 한적은 대부분 실로 묶어 놓은 선장본 형태이다. 한편 책들을 꽂아 둔 철제 붙박이 서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벽과 바닥 사이 서가를 매립해 지진 등의 어떤 위기상황에도 책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고안한 이 책장은 1937년 이 건물이 완공됐을 때부터 있던 서가 그대로이다. 폭이 넓지 않은 이 공간을 지나 걷다 보면 안쪽에 따로 별치해 둔 개인문고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을 별치해둔 서가는 60년대 도서관 건물을 증축하며 마련한 것으로, 지금은 흔히 볼 수 없는 통나무로 제작돼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만송 김완섭 선생이 1975년부터 기증한 고서적 1만 7000여 권과 1968년 2월 육당 최남선 선생이 기증한 고서적을 비롯해 8인의 개인 서고들이 이름표를 붙이고 나란히 세워져 있다.

3층 서가에는 고진보 박사가 모아둔 공량문고 외 작은 별실에 비치해둔 연속 간행물들이 보인다. 1929년에 창간된 교양잡지 <삼천리> 창간호를 집어 드니, 익살스러운 기사들과 함께 당시의 시대상이 펼쳐진다. 한편 청마 유치환 선생이 조국과 민족에 대한 애정을 담아 간행한 시집 <울릉도>가 보인다. 책장을 펼쳐 드니, “지훈 형 혜존, 청마”라 적은 친필이 남아 있다. 당시 친하게 지내던 시인 조지훈에게 선물한 것임을 읽어낼 수 있다. 오래된 종이 안에 적힌 한문들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문화사적인 의미와 이야기들이 합쳐지니, 마치 책이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더해진다.

 

▲한적자료의 보존처리를 담당하고 있는 박상호 보존처리가

 

▲보존서고의 책들을 살피고 있는 한적실 한민섭 과장

 

오래도록 소중하게 보존해야 할 의무

이처럼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한적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도록 하려면 서가의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것이 좋다. 그래서 고려대 한적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항온항습서고는 25도의 온도와 45%의 습도를 항시 유지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안타까운 사실은 공간의 제약 때문에 이곳에 보관할 귀중서의 양이 단 6,000권에 제한 됐다는 사실이다. 앞서 소개한 보물들 외 임진왜란 이전에 출간된 것이나 유일한 원본이 이곳에 보관될 자격을 얻었다.

서가는 고급오동나무로 제작했으며, 책은 역시나 포갑 처리해 무게에 눌리지 않도록 한 권씩 눕혀 보관한다. 그외 고지도와 고문서도 함께 보존 중인데, 여러 문서 중 <왕세자입학도첩>이라 하여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과정을 묘사한 화첩을 펼쳤다. 6폭의 그림으로 구성된 <왕세자입학도첩>에는 단 한 명의 표정과 몸짓도 겹치는 것이 없다. 한편 오랜시간이 무색하게 건강함을 유지한 한지의 생명력과 고려대 보존서가의 환경에 감사하게 된다. 동시에 아직 온전한 보존환경에 놓이지 못한 한적들에게도 알맞은 환경이 주어지길 바라본다.

다행히도, 한적의 수명을 연장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고전적 보존처리실에 자리한 박상호 보존 처리가가 혼을 담아 한 겹 한 겹 정성스레 배접 처리하는 방식이다. 배접은 종이나 헝겊, 또는 얇은 널조각을 포개는 것. 원자료가 이물질에 의해 오염되거나 훼손됐을 때 상태를 점검한 뒤 해책하고, 건식 혹은 습식으로 세척한다. 이후 배접하는 단계를 거쳐 책을 건조해 새 숨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여전히 보존을 위한 필요조건은 채워지지 않았다. 무궁무진한 영감과 이야기를 전하는 생의 무늬. 그 쓸모를 이어가고 보존할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다.  

 

12만 장서에 담긴 생의 무늬, 아름다운 결을 이어가다-고려대 한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