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Campus] "걸작 `죄와 벌` 한 대목, 마치 코로나19 예견한 듯" 도스토옙스키 권위자 석영중 인터뷰 (매일경제, 2021.11.17)
"도스토옙스키가 걷던 도시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녹음했어야 했는데, 전염병 탓에 못 가 아쉽다"는 석 교수. 그가 관장직을 겸직 중인 고려대 중앙도서관에서 만났다.
일생의 기둥이었던 작가를 추념하며, 석 교수는 신간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와 '도스토옙스키 명장면 200'을 출간했다. 전자는 전문 비평서이고, 후자는 일반 독자를 겨냥한 대중서다. 책 '명장면 200'에서 석 교수는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본질을 관통하는 단어로 '불안'과 '고립'을 꼽는다. 도스토옙스키가 바라본 불안의 정서가 200년간 보편타당한 공감을 얻었다고 본다.
"도스토옙스키의 인간론 맨 밑바닥엔 불안이 있습니다. 빈곤이나 정치적 부자유가 아닌, 실존의 조건으로서의 불안이죠. 젊은 나이에 인간 존재의 심연에 놓인 불안에 주목한 건데, 불안이 인간을 파멸시키기도 하고 또는 갱생으로 이끌어냄을 포착했습니다."
불안과 고립의 방을 넘어 석 교수가 발견하는 단어는 '고독'이다. 공감 없는 사회 속 개인, 세상을 혐오해 스스로를 자기만의 방에 가두는 행위는 모두 고립이다. 고독은 다르다. "자아의 진정한 독립을 위한 조건이 고독이다. 고독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완성해준다"고 석 교수는 믿는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많은 주인공이 고독 속에서 자아를 만나 갱생의 길로 들어서요.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깊은 응시, 그것은 인간 존엄의 한 단면이잖아요. 일반 독자에게 아직 덜 읽힌 '백치'와 '죽음의 집의 기록' 문장들에서 고독의 맨얼굴을 꼭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러시아어 알파벳도 모르던 석 교수가 도스토옙스키와 사랑에 빠진 건 학부 시절이었다.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신청했다가 넘쳐나는 수강생을 보고는 러시아어 수업으로 과목을 정정했다. 그 무렵, 텅 빈 도서관. 소냐가 '라자로의 부활'을 낭송하는 '죄와 벌' 한 대목을 읽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길로 러시아 문학에 생을 걸었다.
"위대한 독서란 '총체적 체험'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덩어리'가 내면에 가득 들어오는 느낌이죠. 대문호가 창조한 스토리의 세계가 불꽃을 튀기며 마주쳐 굉음과 함께 폭발하는 듯한 막강한 체험이었어요. 만약 불어를 공부했더라도 결국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했으리라고 확신해요."
도스토옙스키 문학엔 예언적 문장이 가득하다. '죄와 벌' 에필로그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꾸는 묵시록적 꿈은 코로나19를 예감한 문장같다. '전세계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번지는 어떤 전무후무하고 무시무시한 전염병의 희생물이 되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아주 적은 수의 선택받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죽어야만 했다. 어떤 새로운 섬모충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존재로 사람들의 몸 속에 기생해서 살았다'라는 문장이다.
"아수라장을 그린 꿈의 장면인데, 마치 오늘의 풍경과 흡사하죠? 현대의 전체주의와 절대권력 테러리즘을 예견한 문장도 있어요. '페스트'를 쓴 알베르 카뮈는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가장 예언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답니다."
1991년 고려대 교수로 부임하고 올해로 30년. 평생 도스토옙스키 문장을 연구한 그가 상상의 공간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만나면 어떤 질문을 할까.
"셰익스피어에겐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를 묻겠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를 물어야 할 것 같아요. 길이 안 보이는 때가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도스토옙스키 소설은 그 답을 해주리라 생각합니다."
[김유태 기자]